아이는 쇠고리를 되찾았을까

by 이음

원목의자 하나를 밑에 두고 앉아 있었다. 굽은 내 등은 어쩌고 제 멋대로 곧고 반듯한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등을 의자 등받이에 맞추어 대자, 뼈마디가 결리며 둔탁하고 뻑뻑한 소리를 한껏 낸다. 나는 들리지 않은 척, 역시 사람이나 사물이나 물렁한 구석이 있어야 어울리기가 좋은 법이라고 뜨끔한 속으로 소심하게 투정 한 번 쏟고 말았다.

하늘이 유독 파랗다. 하늘은 청명하니 예쁜데, 구름이 못난 게 흠이라 아쉽다. 몽실몽실 부픈 빵처럼 봉긋하지 못하고 맘 내키는 대로 찢어 둔 흡사 보풀 인 솜뭉치 같기도 했다. 헌데 또 못난 구름이라도 있어줘서 고마운 것이, 그 마저도 없었으면 하늘을 단조한 바다인 냥 여겨 맘 고생 좀 했을 터였다. 받치는 의자를 조각배 삼아 머릿속으로 하늘에 띄워보거나 괜히 소금기 짙은 짠내가 나진 않을까 하며 허공에 킁킁대느라 넓지도 않은 마음을 다 쓸 뻔했다. 오늘 하루 자칫 그 생각만 하다 귀한 시간 다 흘려보낼 뻔했으니, 그런대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모처럼 일찍이 카페에 앉아하는 것이라곤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고작이다. 작은 이야기들을 몰래 훔쳐 들었다. 그것은 귀가 있다고 들리는 것도 아니었고, 마냥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었다. 옷자락을 끌고 와 앉아 한가히 시간의 어깨에 기대는 쪽에 가까웠다. 그것은 시간의 몫이다. 아무튼 간에 한가한 일임은 분명했다. 앞서 말한 창밖의 하늘과 딱 눈이 맞아버리고 만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 저렇게 제 빛 톡톡히 뽐낼 적엔 뭐라도 걸어 주어야 싶다. 고운 얼굴 꽃 핀 하나를 머리칼에 끼워주듯이, 뭐든지 접어다 띄워 날리면 걸리지는 못해도 나름 펄럭이는 것이 구색은 있어 보이지 않을까. 때마침 세 살쯤 되보이는 아이 하나가 손에 풍선을 꽉 쥐고선 놀 양으로 넉넉히 걷는 엄마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 가고 있었고, 쇠고리가 달린 풍선도 그 아이 뒤를 이었다.


기름 때인지 무엇인지 쇠고리가 알록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번쩍이는 것만큼 눈을 간지럽히는 것도 없다. 단지 늙으면 그 값이 귀중하다는 걸 알아서 좋고 어리면 값이 어떻건 고운 빛을 손에 쥘 수 있어서 좋아한다. 그 아이도 그러한 모양이었다. 쇳내가 나는 쇠고리를 얼마간 조물대다, 성에 차지 않은지 둘러있는 끈을 헤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묶인 풍선을 풀어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쇠고리에 마음이 더 쓰인 듯했다. 엄마는 저만치 앞서가도 아이는 급하게 따라갈 마음이 식었다. 발은 미동도 없다. 손만 분주했다. 여러 번 둘러 매인 끈이 켜켜이 쌓여 뭉친 실뭉치를 닮기도 했고 거의 다 쓴 두루마리 휴지심 같기도 했다. 아가는 한 줄. 한 번, 한 바퀴를 돌려 연거푸 풀어댔다. 매달린 끈 몇 가닥을 포장된 선물의 그것 쯤인 줄 알았을까, 신이 난 아이의 모습과 달리 나는 살살 애가 타기 시작했다.


결국엔 바람은 풍선을 부여잡고 내달렸다. 여전히 손은 분주했고 고개는 미동도 없었다. 이번엔 마음이 식은 게 아니라 다소곳한 연풍에 풍선이 실려간 것을 마음이 모르고 있었다. 풍선은 등진 아이를 두고 부풀며 동시에 작아졌다. 그곳은 종종걸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곳인데, 쨍한 볕이 풍선을 베어 물게 분명한데. 정작 조급해야 할 마음은 내 것을 쓰고 있자니, 그게 참 못마땅 해도 별 수 없었다. 그저 풍선이 아이에게 넋두리는 풀지 말아달라고, 제 몸도 어색한 얘를, 아직 정도 못 붙은 몸을 노여워하면 그 얘는 얼마나 가엾겠냐고. 내 마음 한 번 시큰하게 꼬집히는 것으로 대신하자고 혼자 믿는 수밖에.


손바닥 전체로 꽉 덮어도 내 손가락 하나 버겁게 감 쌀 손인데, 그 중 얄가운 손가락 하나로 쇠고리에 걸었으니 덜렁이는 게 당연했다. 그 덜렁거림을 놀이 삼아 또 얼마간 만지작 거 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삶은 즐기며 살아야지'라는 비근하면서도 난망한 명제가 아가의 까딱이는 마디 몇 번에 불현듯 고개를 추켜올렸다.


앞서 든 고개와 불편한 눈길을 주고 받던 와중 아이는 기어코 쇠고리를 놓치고 말았다. 맨 바닥에 떨어졌다. 아, 근데 뭐가 좀 이상했다. 그 소리가 너무 명료하게 들린 탓이다. 층이 져 꺼진 바닥을 평지처럼 태연히 걷다 발을 헛디뎠을 때 쿵하는 그 느낌, 딱 그런 느낌이었다. 미적대거나 주저하는 것, 한 치의 망설임이나 서성임도 없이 제 무게가 정직하게 실린 소리에 아가는 그제야 풍선이 간 줄 알았다. 하늘에 박힌 풍선은 쇠고리만큼 크기는 줄었어도 그 거리가 까마득히 늘었다. 그 탓에 아이는 다시 엄마를 쫓을 마음이 자랐다. 걸음은 어수룩해도 쉼은 없었다. 성급했다. 손은 교차로 번갈아 움직이며 걸음의 박자를 맞추었다. 그 순간 실컷 뻐기던 손은 분주해도 발의 연주를 위한 메트로놈에 지나지 않았다. 그 아이의 뒷모습이 내게 오래 남았다.



엄마는 한 시에 있어주리라곤 알았어도 풍선은 그렇지 아니했다. 애타게 흠모했어도 정작 소홀한 탓에 그 풍선은 무덤덤하게 제 길을 갈 뿐이었다. 쇠고리를 바닥에 내려놓자 풍선 간 줄 알았듯이, 그렇다면 쇠고리가 바닥에 놓인 줄은 어느 날에 알게 될 것인가, 혹은 영영 모르게 잊혀지는가. 그게 궁금해졌다.


특정 가치를 측정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그것이 꽉 들어 앉은, 가득 채워진 쓰임에 있기보다 충만에서 부재로서의 빈 공간, 그 낙차 폭의 비례하여 분명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얻을 때 보다 잃을 때 그 귀함을 더 잘 안다. 결국, 아이가 쇠고리를 되찾을지 혹은 놓아둘지는 간단했다. 그 낙차에 의해 새겨진 맘 속 상흔의 모양새에 달려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돌아와 나 역시 미처 줍지 못해 놓아둔 쇠고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있다면 그것은 어디쯤일까. 이번엔 그것이 또 궁금해졌다.


안간 지금쯤 그 아이는 쇠고리를 되찾긴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