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에 몇 번 가지도 않는 출근을 하려 치면 시외버스를 타고 가느라 두 시간 되는, 제법 넉넉한 시간을 덤으로 받는다. 내게 호사란 하루에 온전히 그것도 훤한 대낮에 두 시간을 부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쓰이기에 족한 말이다. 두 시간. 딱 두 시간 정도가 좋다. 그 보다 넘치면 과해서 시간을 죽이려들고 부족하면 남는 시간을 재느라 주어진 시간조차 편히 쓰질 못한다.
드라이브라는 말은 어감이 좋지 않아 그런대로 산책이라는 말을 달아놓고 산다. 적당한 시간과 돈만 주어진다면 일부러라도 시외버스를 매번 타고 다녔을 텐데, 산책치고는 꽤나 까다로운 편이려나. 에둘러 시내버스라도 타자니 매번 제 때 제 시간 정거장에 들러 사람이 오고 내리고 어느 정거장에 승객들을 우르르 토하듯 쏟을 적이 있으면 또 꾸역꾸역 물고기 물 마시듯 승객이 몰아 타는 경우도 있어 여간 부산스러운 게 아니다. 더구나 서서 가는 몇이 부러운 눈으로 힐끔거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말 다했다.
시외버스는 좀처럼 떠들썩할 일이 없다. 그 한적함이 좋다. 정해둔 한 곳에 실어 나르면 되는 탓에 짐짝처럼 과묵하게 앉아 있기만 해서 좋고 육중한 건물들이 성가시게 그늘을 덧씌우는 일이 없어서도, 친근한 풍경들의 무심한 고요 때문에도 좋다. 다만 불편한 것은 시외버스의 창은 열리지 않는다는 점, 두 공간의 분절을 고집스럽게 가르는 창은 막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여서 창 밖 회화 한 점 감상하는데 드는 삯이라고, 그 값이면 헐값이라고 추슬러 참아야 한다.
가깝지 않은 제법 먼 거리를 약속해 가도 그 끝에선 제 각기의 드라마가 다시금 펼쳐진다. 그 모습이 신기할 법한데도 그 누구도 버스에 눈길을 되돌려주진 않는다. 곧고 단단한 나무의 줄기에서 가지가 제 결대로 힘이 부치는 대로 뻗치듯, 한 곳을 동승하여 와도 제 사정대로 걸음을 옮겨 잡는 것이다. 그러다 훗날에 두 줄기가 스치면 찰나의 우연이, 감아 돌아 얽히면 인연이지 싶다. 그리고 그럴 때면 들러붙는 두 가지 사이의 두근거리고 꿈틀대는 떨림을, 역동을 말하는 모든 형태의 말들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반면에 퇴근 길에는 몸이 노곤한 탓에 무엇을 하려 들지 않는 편이다. 대게 몸을 구겨 넣어 잠을 자거나 그마저도 순탄하지 않으면 기껏해야 창만 들여다 보고 만다. 눈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고, 뜨고 있어도 실상 감고 있는 것과 다를게 없다. 그렇게 벙쪄서는 필사적으로 창에 얼굴을 묻곤 하는데, 저번날은 그러지 못했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표를 뜯어 한쪽은 기사님에게 건네고 다른 한쪽에 쓰인 좌석 번호를 눈으로 가볍게 훑어 보았다. 24번이다. 3열로 가지런히 줄 세운 좌석을 셈해보니 창가열, 다름 아닌 1인석 창가 자리였다. 두 시간 좀 타고 말 자리를 어떻게든 편히 써보겠다고 짐부터 의자 기울기 돌돌 말린 커튼자락까지 휘적이며 얘처럼 굴던 와중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러자 나는 곧 얌전해졌다. 유난 떠는 행색이 그리 머쩍을게 아닐뿐더러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이 일 저 일 거리낄 만큼 신사적이지도 않지만, 그가 무척 갈급해 보여서였다.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그가 밖에서 둘러온 한기를 채 떨지 못하고 서둘러 내 옆 건너 자리에 앉을 무렵, 뜯어진 반 쪽 자리 표도 없었고 나처럼 좌석 번호를 셈하지도 않았다. 가장 깊숙이, 몸을 웅크려 숨기에 적합한 자리가 곧 그가 골라 앉은 이유였다. 연이어 한 남자분이 고개를 두리번대며 들어왔다. 그 역시 뜯어진 반 쪽 자리 표도 없었고, 나처럼 좌석 번호를 셈하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찾는 듯 보였다. 자연히 내 옆에 앉은 사내에게 눈길을 흘렸다. 그 둘은 부자관계인 듯했다.
"왜 타셨어요. 저 갈 거예요. 말리지 마세요."
"일단 내리고 말하자. 얼른 내려 다른 분들께 실례되잖아. 큰일 나 빨리 내려."
아들은 괜찮다고, 갈 수 있다는 말을 서너 번 못 박았고 아버지는 그래선 안된다고 더불어 죄송하다는 말도 서너 번 되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일 아닌 줄 알았다. 흔한 부자관계에서 벌어지는 어긋남, 어쩌면 모든 관계 속에서 되풀이되는 클리셰, 뭐 그러한 것들. 근데 또 그것이 출발시간과 관계없이 길어지자니, 그 둘 중 누군가는 서둘러 무르기를 조급히 지켜보아야 했다. 아들은 내릴 줄을 몰랐고 그렇다고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줄 아량도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좌석표도 없으면서 가겠다고 생떼를 부리는 아들이 내려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출발시간이 3분 남짓 남을쯤 그 사내가 앉은 좌석의 승객이 제가 든 표와 적힌 좌석 번호를 번갈아 보자, 아버지는 까마득히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가슴과 목의 거리는 짧았으나 시커멓게 태운 속에서 몇 말을 가까스로 꺼냈다. 이 아이가 정신착란이 있다고, 얼마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죄송하다고.
가겠다는 말만, 이제 자신도 다 큰 자식인데 내버려도라는 말만 악쓰듯 반복하는 아들을 두고 타이르려는 아버지의 서러운 안간힘을 아량이 없다고 말해버렸으니 연신 죄송하다고 덧붙이던 그 말들은 정작 내가 했어야 옳았을 것이었다. 그는 보낼 곳도 갈 곳도 없는 자식이 어딜 그렇게 간다고 해서 얼마나 난망했을까. 나는 왜 그 난망함을 허투른 아집으로 여겨, 안 그래도 버겁게 들고 사는 마음에 무게를 늘려 버렸을까.
"내 안경알, 내 안경알 어디 갔지. 안경알 좀 찾아줘요."
대뜸 사내는 안경알을 찾기 시작했다. 사내의 안경에는 알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조잡한 안경으로 부릴 멋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몸을 부닥치다 어딘가에 흘려 놓고 왔을게 뻔해 보였다. 사실 안경알은 탑승하기 전부터 없었다. 어디에 슬쩍 흘려 놓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곳이 이곳은 아니었다. 몇 명은 거드는 시늉이라도 할라 몸을 움적 댔고 옆 동승자는 말리려는 눈치였다. 어느 한편으로 위로하려 토닥이는 것이 자칫 부추기게 될 수도 있음을 그는 알았던 모양이었다.
한동안 지속되던 그 상황은 아들이 아버지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으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성급히 이어받으면서 끝이 났다. 갈급하게 들어서던 처음과 달리 아무 말이 없었다. 이전의 일은 자신이 벌여놓은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 순간 무음은 또 하나의 슬픈 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슬픔을 연주하는 음은 바로 무음이다. 말이 삼켜진 곳에서 침묵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독특한 질감을 부여한다. 단순히 침묵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공간에 이질적인 질감을 투영하여 다각화하는 것에 그 본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 침묵은 더 높은 층위에서 비루한 말들을 내려다 본다.
그 사내는 종일 누군가와 같이 있었으면서도 몇 번씩 어딘가 다녀왔을 것이다. 몸은 가까워도 헤어지고 만나고를, 한 몸을 두고 두 영혼이 맹렬히 부딪쳐 싸우는 듯 보이지만 결국 한 영혼에 깃든 두 가지 모습이라는 사실로서 끝없는 무승부를 반복하고 있었다.
커튼에 얼굴을 들이밀고 슬쩍 흘려 본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가득 힘주어 잡고 있다. 발작처럼 지끈거리는 눈짓을 보건대 그는 아들의 손을 움켜 쥔 것이 아닌, 눈에 집히지는 않으나 존재할 자식의 온전한 넋을 붙들고 있는 쪽에 마음이 더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