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볕이 정수리를 꾹 누른 듯, 늘 열기가 가득했다. 기껏해야 수은주가 오르고 내리는 유우한 움직임과는 별개로 온몸으로 체득된 열기. 교감의 기류 같은 것이 그곳에선 숨처럼 이어졌다. 꽤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였다. 건반처럼 일렬로 줄지어진 붉고, 노랗고 푸른 내벽은 색이 부실한 크레파스를 닮기도 했고, 주인분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도 그와 비슷해 보였다. 가게는 온통 붉고 노랗고 파랬다. 오로지 세 가지 색으로만 뒤범벅된 곳이었지만 의외로 지루하진 않았다. 각각의 색들은 자신 옆의 두세 개 색과 교합하여 끊임없이 단조로움에 균열을 일으켰고 그것이 분주히 소란함을 넓혀갔다. 지루함이란 가짓수의 한정에 있다기보다 득달같이 일관되는 배열의 문제일지도 몰랐다.
주인분은 참 과장된 사람이었다. 나는 늘 오고 가며 '안녕하세요'와 '수고하세요' 정도로 일축되는 말을 되풀어도 그는 결코 그러는 법이 없었다. 더욱이 어떻게든 말 한번 더 해보겠다고 씩씩대는 유치한 말싸움 같은 것이 있어서 내 말의 길이보다 두음 절은 꼭 길게 덧대었다.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첫 만남의 상투적인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알았어도, 그 말이 다채로운 말들을 한껏 손에 쥐고 올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에 '오늘 날씨가 좀 춥죠? 따듯하게 입어요'나 '점심은 드셨어요? 빵을 몇 개 구웠는데 같이 먹어요.'와 같은 대답은 단순한 인사말을 그 자체로 완벽하고 위력적이게 만들었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란 이렇게 말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이들이다. 처음 주인분의 미묘한 과잉이 친절과 배려라는 것을 아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는 건 참 슬픈 일이었다. 이 미묘한 과잉은 언제나 친절과 배려 그리고 의심의 교집합이었다.
하나하나 레게 스타일로 땋은 머리 칼은 실뱀처럼 그의 턱을 넘어 목의 중앙 부근까지 쓸어 내려왔고 아내분은 주로 쿠키인지 빵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아가주먹만 한 간식거리를 구워 놓았다. 그것은 보통 코코넛 빵일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노래는 항상 자메이카 레게였다. 벽 한 면의 창은 단순히 창이 아니라 또 하나의 벽같이 거대했고 기와처럼 덮어놓은 포스트 잇은 절단마술을 부리듯, 지나는 행인들의 몸을 기괴하게 연출했다. 성경의 한 구절이 적혀있는 포스트잇이나 주인분의 얼굴을 크로키한 포스트잇, 대부분은 여느 연인의 육중한 사랑을 과분하게 담고 있는 포스트잇이었다. 연인이란 세상 모든 것에 사랑의 결백함을 호기로이 새겨 넣고는, 닳고 해진 사랑 앞에서 스스로의 무모함을 지각한다. 나는 평소 좋아하는 노랫말을 적어 붙였다.
그 날 빗줄기는 수신이 끊긴 텔레비전의 잡음처럼 드세게 추적였고, 파인지 양파인지 아무튼 알싸한 채소를 뭉근히 볶은 단내가 코끝에서 장난질을 치며 골렸다. 비가 오는 날의 간식은 코코넛 빵이 아닌 노릇하게 구운 파전이 대신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찰나의 만남과 아연한 작별을 둥그런 원형 속에서 무수히 번갈은 시침과 분침은, 어느덧 7시 부근에서 돌아올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저 둘의 처연한 연애사에 들러리로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본래 삶은 자신을 제외한 주변을 까마득한 원경으로 침잠시키는 것일지도, 명확한 건 삶의 범주에선 어중간함은 존재치 않는다.
분침은 또 한번 균질하게 시침을 지나치며 8시 정각에 맞추었고, 주인 분과 몇몇 단골은 테이블을 일제히 덜그럭 대며 자리를 조금씩 비켜 잡았다. 그 시각엔 어김없이 분주했다. 주인분은 중얼대는 노랫말로 호흡한다 할 정도로 워낙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매번 제 가게를 소극장으로 흥겨운 판을 벌였다. 단순한 취미로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문적인 종사자도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이도 저도 아닌 청객, 그 뿐이었다. 만약 귀도 어떠한 경유 과정을 거쳐야 하는 기술적인 구조였다면, 나는 아마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현을 몇 번 튕기고 손을 몇 번 치대는 것으로 그들은 대충 합을 맞추었다. 누군가의 서투른 연주가 수줍게 새어나왔고 보다 원숙한 음이 종종 웅얼거리듯 일그러진 음을 다독이며 천천히 스며들었다. 주인분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흐르는 음 속, 아스러진 틈을 황급히 매우며 유려하게 휘감았다. 한바탕 내뿜은 음들이 가게 안에 조밀히 쌓이자, 그들의 가열된 호흡만큼 흩어진 공기도 그을렸다. 너무나 강렬하고 후터분했다. 누군가의 절규처럼 폭우는 아랑곳 않고 밖에서 지속됐다. 추적이는 빗물은 그을린 공기를 식히지 못했고 역으로서 한 방울의 빗방울 조차 증발하지 않았다. 서슬 퍼런 밖과 후터분한 안을 중재하는 유리판 앞에서 모든 것은 연약하게 뒤틀렸다. 참으로 기묘한 밤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모든 것은 결국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왔다. 그들에게 8시와 9시 사이, 한 뼘만큼의 시간은 여분의 시간보다 더욱 간절했던 순간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값은 단순히 길이로서 치환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내리찍는, 깊은 울림의 진폭에 더욱 근접했다.
연주를 구경하던 덕에, 도통 눈에 집히지 않던 책장이 비로소 띄었다. 정작 책장에는 책 보다 갖가지 장식품들이 즐비했고 몇 권의 책마저 내겐 썩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검지 하나로 책들의 앞코를 살며시 스쳐 갈 때, 한 녀석의 빳빳한 감촉이 유독 메마르게 느껴졌다. 뜯어진 실밥으로 힘겹게 종잇장을 꿰고 있는 책이었다. 그것은 제목도 씌어 있지 않은 일기장, 눅진한 삶의 기록이었다. 주로 사랑과 영화에 관한 이야기 었으나 어디에도 음악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좀 이상했다. '어쩌면 그는'으로 시작해서 '설마'를 가끔 곁들었지만, 그래 봤자 나와 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괴리로서 '에라 모르겠다.'쯤으로 귀결되는 무의미한 추론과 억측을 반복했다. 분명한 건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철학을 들먹일 정도의 영화학도였다는 사실, 쓸데없이 그게 궁금해졌다.
주인분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으므로, 섣불리 '수고하세요'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주인분은 '비가 아직도 많이 내리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나는 그 말을 비껴 갔고 되물었다. 영화 좋아하시나 봐요. 이번에는 그가 내 말을 비껴 갔고 되물었다. 영수증은 필요하신 가요. 나는 괜찮다고 답했고 그러자 그가 이어 말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꾸준히 쓴 시나리오의 분량도 제법 된다고도 했다. 나는 이미 생떼를 부리는 아이, '그런데.'라는 질문을 기어코 하고 말았다.
"글쎄요. 좋아했는데 왜 안 할까요."
정녕 놓아야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결국에야 놓아버린 현실까지의, 까마득한 공백이 그 말 안에 짙게 축약되어 있었다. 축적되는 과거와 부푸는 미래 사이에서 현재는 가끔 터무니없이 초라하다. 그 순간, 나는 너무 이기적이었다. 혹여, '내가 그의 추락을 요깃거리로 삼았다'는 우려를 먼저 떠올렸으니. 말의 위력을 이런 식으로 밖에 부리지 못하는 나는 정말.
가게 문을 열자, 여전히 비는 거슬리게 추적였다. 우산을 들고 나온다는 걸 깜박 잊은 건, 황급히 나온 탓이었다. 그렇다고 되돌아 가기엔 마음이 편치 않은데, 이기적인 나는 내 몸 적시는 일은 더 더욱 싫어서 문에 걸린 종을 얕게 울렸다. 다행히 주인분은 마중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마중 나왔어도 좋을 법했다. 그가 책장을 서성거리던 모습을 보고 나서는. 일기장을 뽑아 들고, 그렇게 서서 몇 장을 읽고, 다시 꼽아두지는 않고. 아, 그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차마 묻지 않았다. 집어온 우산 속, 멍처럼 녹이 슨 빗살을 보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