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크리스마스 트리

by 이음

2층 건물 창가에 앉아 밖을 보고 있으면 모든 것이 좀 더 작고 뿌옇다. 지저분하게 찍힌 손자국 때문인지 창이 노안이 든 탓인지, 쪼그라진 밖은 막연히 머릿속으로만 방문하는 고향집처럼 더 이상 그곳에 갈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온 길이 분명한데, 우습게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그게 전부 사실일리 없어 보인다.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있다. 그 앞에 하늘색 2인용 벤츠가, 나무 몸뚱이엔 장식품을 열매로 꾸려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고, 어김없이 정수리엔 두발로 거산을 눌린 등반가의 모습을 한 별 하나가 당당히 서 있었다. 의무처럼 꼭 사진을 찍고 가야만 할 것 같은 남사스러운 충동을 무럭무럭 불러일으키는 곳, 크리스마스 부근에 띄는 고정적인 풍경인 트리와 벤츠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저 풍경의 주술에 걸려든 이들은 벤츠에 앉아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치거나, 찍거나, 기다렸다. 어떻게든 담아보겠다고 빠듯하게 쑤셔 넣은 여행가방처럼 너저분히 자리한 잿빛의 건물들 사이, 거대한 트리는 배회하는 모든 시선을 푸근히 보듬었다. 어떠한 공백도 둘 사이에선 결코 용납하지 않다는 듯, 서로의 팔을 걸어 잠근 연인도, '하필 내가 너와'라고 괜히 어깨를 툭툭 건드려보는 동갑내기 친구들도, 마이크를 집어 반복적으로 멘트를 되감으며 무엇인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손에 꼭 쥔 저 여인도, 마다하지 않고 축축한 먹빛 눈자위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득 심어 놓았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매워진 눈은 가끔 물을 들이부었으나, 그것은 받침대가 없어도 흐르지 않는 물이었다. 트리인지, 눈자위인지 자박했던 물을 금세 들이마셨다.



무엇을 기념하는 곳에선 연인은 늘 제 사랑까지 끌어와 편승하는 버릇 때문에, 크리스마스 트리 앞 하늘색 벤츠를 다녀가는 이는 태반이 연인이었다. 그러다 가끔 동성의 친구들이 눈치를 보며 재빠르게 사진을 찍어가는데 그것은 보통내기에서 졌을 경우가 많았고 희한하게 이성 간의 친구들은 죽어도 그 자리에 함께 앉지 않았다. 남녀 간 친구 사이는 있을 수 없다는 속엣말이 거슬렸던 것일까 헌데 정말 둘은 친구사이로 남아있길 바라기는 한 것일까, 혹시 한 친구라도 인연이 연인이 될 수 없어 억지스레 우정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라면 크리스마스 트리는 사람의 마음을 보다 물렁하고 부피를 넓히는 법이니까, 부디 미약하게나마 여분의 자리에 마음을 얹혀 놓길.


어느 외국인은 벤츠에 앉지 않고 바지의 좁은 주머니에 두손을 수직으로 꼽아 사진을 찍었고 벤츠는 멋쩍게 바지의 뒷 춤을 훑었다. 다섯의 학생들은 그가 자리를 뜨자, 때가 된 밀물처럼 스멀스멀 기어 들어와서는 수 십 번 어쩌면 수백 번을 무릎으로 받아낸 벤츠의 모처럼 헐거워진 모습을 도로 고쳐 잡아버렸다. 양 무릎은 물론이거니와 양팔에도, 나머지 한 친구는 벤츠의 무릎 위 두 친구 무릎에 걸터앉았다. 사진을 찍고 난 후 학생들은 자신이 골라 앉은 순서를 역순으로 되감으며 자리를 떴다. 또 다를 발걸음이 벤츠 쪽으로 허정허정 방향을 돌렸다. 발로 바닥을 더듬는 묵직한 두 걸음과 분주한 두 눈을 쫒으려 허우적거리는 하나의 걸음이었다.


노부부는 각자 손주의 양손을 집고 벤츠까지 걸어가,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선 사진 한 장 찍어 주길 부탁했다. 얼른 청년이 휴대폰을 받아 들고 노부부와 아이는 단정히 벤츠에 자리를 잡으려 했지만, 2인용 벤츠여서 아이를 앉고 찍기엔 가려지는 부분이 많은지라, 쥔 양손을 그대로 걸고 서서 찍자고 합의를 본 듯했다. 분명 아이는 자식이 사정하여 맡겨 두었을 것이나, 적적할 노인에게 손주가 좀 부리는 어리광이 그런대로 심심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키엔 가죽과 살의 접면이 어긋나 일그러진 주름이 거슬렸고, 그 살갗 사이를 매섭게 쏘다니는 추위가 썩 반갑지 못했다. 쉴 새 없이 반짝거리며 사람의 빛과 냄새에 무턱대고 스미는 아이의 눈망울 앞에 추레하게 늙은 모습만을 보여주자니, 그것이 또 죄스러운 일이라 하릴없이 이곳으로 나온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아이는 천진하게 웃음을 지었고, 노부부는 지난한 미소를 만들었다. 네모난 렌즈는 뒤편의 휘황찬란한 풍경을 볼모로 아이의 시선을 길들였으나 노부부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저당 잡힌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들은 경직된 채 스스로 렌즈를 응시했다. 핸드폰은 자신이 찍는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사진기처럼 '찰칵' 흉내를 냈을 것이다. 시간을 붙박이는 일은 참으로 쉬웠다. 노부부는 찍힌 핸드폰을 받아 들어 확인했지만 아이는 그러지 않았고 조르듯 자꾸만 팔을 당겼다. 사람을 빼곡히 머금은 곳에서 노부부와 아이는 흡사 표류하는 배같이 쓸렸다. 제 방향으로 걸음이 맞을 때는 순풍을 만난 듯 몇 걸음을 덤처럼 걸었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역풍과 고투하는 뱃사람처럼 걸음에 손해를 보아야 했다. 비워진 벤츠는 새롭게 자리를 매웠어도 지나쳐간 이들과 별 다르지 않아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사진 행렬 속 찍는 시간을 평균으로 흐르는 시간을 가늠할 법했다. 매무새를 가다듬는데 2~3분 남짓, 찍어줄 사람을 잡는 것은 1분 정도, 찍는 시간은 고작 5초 내였다. 시간을 붙박이는 일은 참으로 쉽다. 허나 순간이 집합된 세월을 봉제하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렵고 아득한 것일까. 노부부와 아이 그 둘의 항해 속에 자리한 불행은 삶을 되돌아 추슬러는 자와 이제 막 나아가려는 자의 거리였다.


새해를 맞아도 트리는 건재했다. 모든 날들은 어제처럼 오지만 결국엔 모두 저마다의 새로운 날들이고, 그래서 아직 치워지지 않은 트리는 억지로 새해를 기념한다. 새해는 삶의 빗장을 열고 그곳의 지저분한 것을 모조리 문질러 없애는 일종의 의식 같다. 나이의 획을 뒤틀면서. 아직의 주저함과 이제의 설렘이 교차한다. 노부부와 아이 역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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