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는 길을 조심해야 한다고

by 이음


여행을 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의미일까. 그 날을 위해 쓸 돈을 제법 묵혀두어야 하 단지 나의 시간만을 분리시키는 것으로는 턱도 없어, 관계된 사람들과의 일정을 조율하며 '과연 내 시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비좁았던가.'라고 반쯤 자조하듯 말하면서 여행의 첫날부터 이미 끝을 회상할 수 있을 정도인, 나는 기어코 여행을 다녀와야만 했던 것일까.


여행이라는 것은 '출발'과 '도착'의 공간을 지정해두고 "다녀왔어"라고 기분 좋게 나열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좀 다른 것 같다. 여행은 회귀한다는, 제 특성상 최초와 최후가 한데 어우러져 그것이 혼미한 설렘으로 요동친다. 최초와 최후가 맞닿아 있는 곳, 그 얼마나 마술 같은 묘한 일일까. 떠나지 않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중독되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일상에 있어서 최초는 무척이나 생소하고 최후란 너무도 먹먹한, 극지에서 또 다른 극지까지의 거리였다. 어쩌면 적응과 무뎌짐 사이의 선명하지 않은 말장난 같은 것, 디딘 몇 걸음이 도약을 위한 최소한의 도움닫기인지 착지를 넘어선 과분한 걸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것. 주체할 줄 모르고 증식하는, 흡사 끔찍한 괴물의 형상 같은 것.



정확한 무엇을 상정하지 않은 채 떠난 막연한 여행이 당도하는 곳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단편들이었다. 휘황찬란한 건물이나 기품 있는 유적지를 들러보는 것은 썩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보통 견학은 부차적이고 타지 일상의 훔쳐본다. 그것이 결국은 나눌 수 없는 분리된 생태계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무엇을 더듬어보기 위해 최소한의 골자가 필요하듯, 일시적으로 내 삶을 투영해보는 것이다. 낯익은 것이 낯설게 체험될 때, 그 낯익음은 비로소 다면체가 된다.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얼마간의 거리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여행객이라는 사실로서, 언제까지나 타지의 삶은 철저히 본연의 삶과 유리된다. 그것은 이방인에 관한 환대를 좀 더 너그럽게 다듬기도 한다. 엮어진 공간과 시간을 통과하여 온 이방인을 마주한다는 건, 떠나온 자의 간절함만큼이나 맞이하는 자의 마음도 여간 축축하여 설렐 수밖에 없는 일이라,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때로 그 의미가 상응한다. 어쩌면 여행의 의미는 꼭 '가야만 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가장 명확하게 가늠해 볼 수 있는 타인으로 대체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야만 했던 이유는 누군가가 절실하게 오지 않아서 대신하여 떠난 것 일수도, 혹은 내가 둔감하여 여느 절실함을 모질게 잘라낸 것 일수도 있다.


삶에 한 줌의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경이로운 찰나여도 결국 삶은 적정 근사치로 수렴하고 만다는 사실로 여행 그 자체가 삶의 진통제가 될 순 없다. 아마 자신의 삶에 관한 제약 처방 목록을 기록하는 것에 가깝다. 이질적인 삶이 부딪칠 때 서로의 미간에 갈래 길처럼 나눠진 주름의 수축과 이완, 무심히 응시하듯 풀려있는 공기에서 감지된 주관적인 떨림이나 서로의 말에 겹쳐진 몇 부분들을 추적하여 알아듣는 추상적인 말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묘한 인력이 작용한다. 그것은 다분히 인정과 배려의 결과물이었고 결코 인위적일 수 없다고 믿는다.



어떠한 파랑도 거대한 몸집의 선박을 저지하기엔 역부족했고 더불어 부추기지도 못했다. 선체는 정면을 응시한 채, 연신 입체적으로 출렁거리는 수면을 커튼 자락처럼 질질 바닥에 끌었다. 부유해 간다는 건 너무도 추상적인 감각이었다. 까미득한 수심에 푸르 다기보다 검게 탁한 물은 흡입력이 있었다. 그것은 유혹이 아니라 처연한 들짐승에 대한 연민처럼 가엾어 보일 때가 많다. 유독 흰자위에 비해 검은자위가 지배적으로 많은 짐승들의 눈에서도 그러한 저미는 감정들이 종종 불려나온다. 너무나 검은 것은 무척이나 깊어 보여서, 침수된 듯 절박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비루한 감정들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고들 말하지만, 늘 덜어내어 소실되는 것도 아니다. 돌연 증식되기도 한다. 오랜 시간 먹빛의 수면을 건너오는 것은 그래서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가까스로 도착한 육지는, 정신이 띄어도 몸이 곤해서 초점이 흐린 막 깬이의 눈처럼 갈피를 못 잡도록 뿌옇게 흐려있었다. 번져 있는 안개는 오래도록 곤할 몸을 예고하는,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 될 것이란 허투른 불길함을 자욱하게 덮고 있는 듯 보였다. 푹푹 꺼지는 눈이 복사뼈에 닿았고, 나를 좀 더 볼품없고 추레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눈부시게 흰 곳에서 한없이 붉어진 볼은 추위의 생채기가 아니라 도저히 취하지 않고 배길 수 없는, 눈의 본향을 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야에 자리한 모든 것에 눈이 쌓여있다는 사실로 문득, 포장된 선물을 연상했다. 엄마의 손가락을 버겁게 쥔 아이가 질질 더듬는 걸음으로 눈을 뜯었다. 이제 그만 가자는 시늉에도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정없이 발자국을 찍고 싶다는 듯 손가락을 더 먼 곳으로 뻗었다. 눈이 쌓여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걸어야 할 이유가 된다는 건 길이란 꼭 당도해야 할 방향을 가리킬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 길의 구획을 동등하게 덮고 있는 눈은 길과 길이 아닌 것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려 놓는다. 길이 아닌 곳이 돌연 길처럼 위장하기도 하고, 본래 길이었던 곳은 자신이 길이라는 것을 더 이상 자신할 수 없었다. 길은 순전히 아이의 발도장으로 그려져, 걸음이 닿는 곳에 길이 번졌다. 아이가 부지런히 발을 놀리자, 눈 칠이 벗겨진 곳에선 다시금 길과 길이 아닌 것의 이분이 나뉘었다. 갈 수 있는 곳과 가서는 안될 곳, 눈을 빌미로 모든 공간은 잠재적 길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는 단 한번 길의 효력을 실감한 채 원래의 모습대로 되돌아 간다. 자신이 길임을 의심받던 공간은 왠지 치사해 보일지 언정, 다시 소외될 황망한 공간들에게 눈은 아련한 백일몽일지도 모른다. 눈을 걷는 아이의 발은 여느 공간의 애처로운 귀로였다.


길을 걸으며 신발 속 들어찬 눈은 체온에 녹아 축축이 발을 적셨고, 수분을 빨아들이는 식물처럼 몸 구석구석에 한기를 실어 날랐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고양이들은 인근 주민들의 두둑한 인심을 출렁이며 온유하게 걸었다. 숙소에 도착해 사서함의 번호를 셌다. 호스트는 키를 그곳에 두었고 비밀번호는 447이라고 적어주었지만, 그것이 버튼 입력 식이 아니라 회전식이라는 건 알려주지 않았다. 표시된 숫자만큼 돌리고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돌려야 하는지 4번 회전 후 연달아 4번을 이어 돌리는 것인지, 영화에선 덜그럭 대는 부품의 마찰음을 힌트로 정답을 유추하던데, 귀를 비벼대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든 간에 4번 4번 7번은 변함없으니까, 무작정 돌려 보는 것이 해결책이라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었다. 어차피 키만 꺼내놓고 본다면, 사서함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았다. 그것은 여행객이라는 사실을 돌려 말할 수 있는 뜻으로도 쓰인다. 나는 네다섯 번만에 사서함을 열었다.



알에 금이 가버린 안경, 날이 무딘 면도기, 오랫동안 입에 머금어도 모가 딱딱한 일회용 칫솔과 휴대용 가글, 두터운 양장본의 책 한 권, 끈적한 잉크가 반쯤 남은 검은색 펜, 빗물의 꿉꿉함을 담은 향수, 어딜가건 이것은 늘 캐리어에 거주한다. 늘러붙은 녹처럼, 애초에 꺼내어 보관해 둘 생각도 않는다. 우글거리던 추위에게 물린 발의 감각은 깊숙이 살 안쪽으로 박혀 들어간 것 같다. 질감만 어렴풋이 느껴진다. 단단히 굳은 발 덩이를 물속으로 데리고 가, 물고기처럼 휘저으며 감각을 살갗 바로 뒷면까지 우려냈다.


그렇게 되살아 난 감각들이 매진하는 것은 피로였다. 연하게 물러진 살들은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듯, 닿는 것마다 손사래를 치는 것 같았다. 늘어진 피로를 받아낼 여력이 없는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눈꺼풀과 눈시울은 서로 만남과 작별을 오갔다. 오랜 시간 먹지 않아도 허기는 몰리지 않는다. 오랜 시간 몸을 헹구지 않아도 되려 개운한 착각마저 든다. 침대에 몸을 뉘이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용서받는 기분이다. 가끔씩 나는 몸을 누군가에게 허락받고 쓰는 것은 아닐까 하는 허튼 생각으로 잠이 들어야 했다.


잠에서 깬 것은 스며나온 땀이 시트를 축축이 적실 무렵, 그 거북함 때문이었다. 시간은 손가락의 한 마디 만큼 흘렀다. 허기가 쏟아지고 뒹굴던 땀이 흙탕물인 듯, 찝찝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의식이 수면으로 피신해 있을 적에, 내 몸은 그동안의 부채를 빠짐없이 정산하고 있던 듯 싶었다. 나는 빚을 청산하느라 또다시 분주해졌다.



그곳에 며칠 동안 머무르면서 마주친 한 할아버지가 내내 마음과 동행한다. 이른 아침부터 검어진 밤까지 그는 수신호로, 골목에 엉켜버린 차들과 사람을 분류했다. 타의에 의한 의무 같아 보이진 않았다. 뒤엉키는 것도 공간이 어느 정도 넉넉해야 가능한 일이라, 더구나 인적도 드문 곳에서 현란하게 손 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분주했을지도 모른다. 보아온 풍경은 집으로 출입하는 때에 이루어졌으니, 유난히 적요로운 순간을 하루인 냥 제멋대로 늘여버렸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골몰하여 예단하는 것이 물론 그는 섭섭하지 않았겠지만, 불편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말을 붙여야 했다.


이 일은 자의로 하는 것이라고. 밥때를 거르면 매일같이 자리를 지킨다고도 말해주었는데, 그는 연신 더듬어가며 말을 이어가는 것 같았다. 아니, 그는 확실히 자주 말을 더듬었다. 타국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모름지기 '몇 음절을 발작적으로 되감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만큼은 안다. 입의 움직임은 적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너무나 많은 말들이 입속에서 밀려있는 듯 했다. 미처 나오지 못한 예전의 말들이 끈적이게 출렁이고 있었다.


혹한이 수면을 꽝꽝 얼어붙게 만든다고 해서 수심마저 그러한 것은 아니다. 쉴 새 없이 출렁이고 싶을 수심은 벽처럼 굳어진 수면을 향해 우글대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말들도 그 처럼 속에서 출렁일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이 일은 그에게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 올 때면, 낡은 구식 자전거를 덜컹거리며 요란하게 왔다. 바구니엔 철보온통이 담겨있다. 대책 없이 흐르는 빗물인데, 소심한 컨테이너는 매섭게 할퀸 녹 자국으로 빼곡히 기록해 놓는다. 그 옆으로 자전거가 늘 기대어 있다. 녹은 부식된 오염이기보다 시간의 주름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낡고, 녹슬고 늙은 것은 모두 그렇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길가에 팔을 수평으로 쭉 피어 보고는 거리를 재고 중심을 잡는다. 그 모습이 민둥한 사막의 한복판에서 외로이 자라난 선인장을 떠오르게 한다. 있어도 좋지만 없어도 되는 것이었다.


매번 아침을 나서는 내게 길을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곱씹게 되는, 여행자에게 더 없이 요긴한 충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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