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은 수많은 여름 중 제일 새것 같던 여름이었다. 잠결에 걷어찬 홑청처럼, 지구가 이른 더위를 어쩌지 못하고 웃옷을 벗어던져버린 듯했다. 바람은 차고, 채도는 높던 여름. 나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들떠 있었다. 동명의 여름이 다 같은 여름은 아니라는 듯, 이제껏 불러온 여름이 실은 각 여름의 본명이었음을 알아차린 듯이. 내겐 아홉 번째 맞는 여름이었고, 그중 절반은 여름인 줄도 모르고 지나왔다지만, 그 해 여름만은 지금까지 수차례 겪어온 여름과 분명 다른 것이었다.
여름, 하고 운을 떼면 입 안에 부드럽고도 단단한 여운이 감돈다. 첫 음을 가볍게 올리고선 름, 하고 추락하듯 닫힌다. 여름, 여름. 연이어 발음하면, 어느 한 밤의 진한 풀냄새가, 축축한 습기가, 서럽도록 목청껏 울어대는 벌레의 울음이 바람에 가득 실려오는 기분이 든다. 확실히 여름은 다른 계절보다 활력적이고 드센 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몸에 좋다는 음식을 끊임없이 먹어가며 기운을 차렸고, 몸 안에 열기가 가득 차 쩔쩔매던 나는 자주 집 밖을 나서곤 했다. 이상하게, 그즈음 나는 병을 앓기라도 하듯 하루 종일 마음이 미열에 들떠 있었다. 여름 더위와는 상관없이 마음의 열기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몸 밖의 더위와 몸 안의 열기가 사뭇 버겁게 느껴질 때면, 나는 한참을 무작정 걷기만 했다.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힘이 닿는 대로, 시간이 되는대로 걷기만 하면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어딘가로 멀리 떠나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는 것,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곳에서 길을 잃다 허기를 느껴보는 것. 이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아홉 번째 여름, 내게 한 친구가 있었다. K였다. K는 그해 늦은 봄, 전학을 온 남자아이였다. 말수가 적고, 소심해 큰 인상이랄 게 없던 친구였다. 전학 온 첫날. 우연히 하굣길이 겹쳤던 나는 K의 어머니와 느닷없이 마주쳤고, 그만 몸이 굳고 말았다. 아주 큰 실례를 저지른 것처럼. 나도, K도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K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달래는 듯한 상냥한 말씨로 내게 K의 친구냐며 물어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처음 본 사이인데, 친구라는 말을 쉽게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친구라는 관계는 서로의 동의 같은 게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 다만, 그의 어머니가 내게 다정하게 건넸던 말. 잘 지내라는 말도, 이름이 뭐냐는 말도 아닌 잘 좀 부탁한다던, 그 말이 나를 몹시 난처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말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아니, 이해할 수 없어 더 난감했던 그 부탁 아닌 부탁은 그녀가 내게 건넷 첫인사이자 마지막 안부였다. 그 이후, 나는 한 번도 K의 어머니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K와 친구가 됐다. K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나는 숫기가 없었다. 우리는 자주 같이 걸었다. 핏줄처럼 도심 사이를 잇는 강을 따라 매일같이, 또 정처 없이. 배가 고플 때면 꼬깃한 지폐 몇 장을 주섬주섬 꺼내 무언갈 사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신기한 것은 그토록 무수한 계단을 오르고,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골목길을 서슴없이 걷고, 난생처음 가보는 동네에 이르러도 결코 길을 잃는 법이 없었다는 거였다. 우리가 한 걸음 내딛는 사이, 마음은 본능적으로 반걸음씩 되뇌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는 사라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단지 멀어지고 싶었을 뿐이었을 테니까.
대부분의 크고 작은 일들이 그렇듯, 하루하루가 반복적으로 흘러갔다. 나와 K는 여전히 오랜 시간 밖을 걸었고, 각자의 손에는 천 원 남짓한 비상금이 늘 들려 있었다. 몇 번의 비가 내렸고, 감기처럼 짧은 추위가 들었다. 그리고 그 무렵, 학교엔 돌연 전학을 간다거나 오는 일이 잦았다. 전학 소식이 교내에 흉흉한 소문처럼 심심찮게 술렁이던 때였다. 아홉 번째 초여름. 나는 어디선가 외풍처럼 새어 들려오는 이름들을 가만히 반복해 듣다 보면, 사뭇 서운한 마음이 들곤 했다. 일면식이 없는 사이인데도 그랬다. 전학을 갔다던 친구의 텅 빈 책상을 힐끗 훔쳐본 적도, 비워놓은 사물함을 열어본 적도 있었다.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말끔히 정리된 사물함에선 젖은 나무 냄새가 났다. K는 그 냄새가 텅 빈 공간에 쌓인 먼지 때문이라고 했다. 먼지가 고여 나는 냄새라는 거였다. 그새 허공으로 부유했던 먼지가 힘이 풀려 짐 내려놓듯 쌓인 모양이었다. 나는 먼지가 주는 오래되고 아늑한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옷장 안이나 이불속에 웅크려 숨었을 때처럼 푸근한 안도감을 줬다. 나와는 다르게 한 장소에서 시간을 견디며 만들어진 냄새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 시절, 떠나고 남겨진 이름과 헤매던 낯선 지명, 텅 빈 거실 속 그늘 안에서 나는 자주 마음이 수척해졌다. 막 시작된 새 학기의 긴장된 설렘이 나를 감정적으로 부추겼기 때문일 일지도 몰랐다. 내가 끊임없이 어디론가 떠났던 건, 어떤 물리적인 장소에 다녀오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심리적인 불안을 덜어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K와 무작정 걷고 있을 때면, 현실의 원근감으로부터 조금 멀어질 수 있었다. 우리가 초봄 추위에 아랑곳 않고, 옆동네까지 걸어간 건 전부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 의도를 설명할 순 없었다. 그토록 어디론가 달아나고자 했던 이유가 실은 일종의 심리적 유배였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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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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