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끝에 다다라서야 눈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평소에는 무감각하다가도 막바지에 이르면 그제야 절박해진다. 급하게 날씨를 살폈다. 겨울이 통 겨울 같지 않던 요즘, 모처럼 폭설이 내릴 거란 소식을 들었다.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어마어마한 양의 눈이 쌓여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며칠 눈을 보지 않더라도 겨울 기분을 실컷 낼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그해 겨울은 왜인지 평소보다 시시했고, 초라했으니까.
눈을 보러 가기로 한 곳은 강원도에 위치한 어느 원시림이었다. 봄이 올 즈음부터 여름의 한창까지 야생화가 군락을 이룬다는데, 한 겨울 눈꽃이 핀 풍경도 제법 장관이란다. 들은 바로는 큰 눈이 쌓일 적이면 처마 밑까지 눈이 쌓일 정도라고. 그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원시림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적당한 경사에 차를 세워두고 갈 요량이었는데, 차가 눈 바닥 밑으로 푹 꺼지더니 말을 듣지 않았다. 앞으로도, 뒤로도 나가지 못한 채 바퀴만 연신 헛돌았다. 오히려 바퀴가 회전할수록 경사면을 깎아내리면서, 차는 더 깊게 아래를 향했다. 그렇게 십 여분을 어쩌지도 못하고 서 있는데, 저 멀리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사내가 내려와 상황을 살폈다.
"급하게 가셔야 하는 거예요?"
이제 막 도착했던 터라,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그가 말했다.
"그럼, 이렇게 두고 가세요. 그냥."
이어, 그는 정상을 타고 내려올 즈음이면 눈이 거진 녹을 테니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덧붙였다.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라, 정상에서 한 숨 돌리고 내려와도 해가 떠있을 거란다. 그 말을 듣곤 이곳을 자주 찾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별안간 다른 선택지가 없을뿐더러, 당장 차를 빼야 할 처지도 아니므로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책을 내놓고는, 내가 바퀴 부근에 쌓인 눈을 파내는 사이 금세 사라져 버렸다. 미안하고, 또 아쉬워 한참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날 폭설이 내렸다지만, 눈은 예상보다 적게 쌓여 있었다. 식욕 좋은 볕에 그새 녹은 모양이었다. 그와 상관없이 겨울은 겨울답게 추웠고, 눈부시게 환했다. 눈에 반사된 빛은 사방으로 번지며 주변의 밝기를 높였다. 그 무엇으로 대체될 수도, 물릴 수도 없는 선명함이었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은 거센 눈발이 잦아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길가엔 의아할 정도로 발자국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른 오전. 이르게 숲을 찾았다고 생각했건만, 일찍부터 산행을 마치고 돌아서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다들 하나같이 표정이 가벼웠다. 산을 타고 온 게 아니라, 마실을 다녀온 듯한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옷차림이 단출했고, 지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몸이 산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 같았다.
산행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폭설이 내렸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이 적기도 했고, 무엇보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았다. 나는 걸으면서 자주 멈춰 주위를 살폈다. 이제 막 겨울 티를 벗어내려는 듯, 눈틈으로 숲의 살갗이 겨우 비쳤다. 눈이 녹고 얼기를 반복한 탓에 땅은 울퉁불퉁하게 굳어 있었다. 종종 물 흐르는 소리가 얕게 들려왔다. 겨울은 속으로 웅크리며 조용히 웅얼거렸다. 겨울의 체온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아무래도 너무 늦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겨울 기분을 내기에는 모자라겠다 싶었다.
숲에 깊이 들어갈수록 서서히 눈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발밑에 닿던 눈은 어느 사인가 발목까지 집어삼키고 있었다. 발이 바닥으로 푹푹 꺼졌다. 큰일 났다 싶으면서도, 괜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숲 안쪽에선 산행을 마치고 오는 이들의 말소리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이토록 부지런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데에 내심 놀랐다. 더불어 표정이 하나같이 개운하다는 점도. 대단한 무언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원 없이 눈을 보고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힘든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얼마간 더 걷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눈 쌓인 숲 안쪽으로 몇 안 되는 가구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 말소리며, 습관이 만들어 낸 일상의 기척이 부산스럽게 풍겼다. 굴뚝마다 뿌옇게 더운 김을 쏟아냈다. 한동안 마을 근방을 어슬렁거리다 어느 한 집에 이르러서 걸음을 멈췄다. 내장을 말끔하게 손질한 생선이 무더기로 널브린 채 장관을 이루고 있어서였다. 도저히 한 가구에서는 다 먹을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이 마을 식구들과 나누어 먹을 요량으로 양껏 말려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주변을 기웃거리는데, 마침 집주인분으로 되어 보이는 분과 그만 눈이 마주쳤다. 생선 말려둔 모습이 인상 깊어 보고 있었노라고 말씀드렸더니, 주인분이 말없이 웃어 보였다.
"근데, 눈이 많이 내려서 힘드시겠어요."
때늦은 폭설 소식에 걱정되어 물어본 말이었지만, 주인 분은 웃어일 뿐이었다. 이 정도는 눈도 아니라고, 한창 내릴 적에는 허벅지가 눈에 잠기던 일이 예사였다고. 마을 밖으로 나서는 일이 쉽지 않을 정도인데, 지금은 이렇게 외부인도 들어오지 않느냐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른 오전부터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이며, 옷차림이 유독 가벼웠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모두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른 오전부터 산행을 마치고 숲을 빠져나왔을 리가 없었다. 어쩐지 하나같이 옷차림이 단출하더라니.
"정상 부근엔 눈이 많이 쌓였을까요?"
혹여나 하는 마음에 내가 물었다. 폭설이 내린 것 치고는 기대했던 것에 비해 상당히 초라했으니까.
"글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없지는 않을 거예요."
다행히도, 숲의 중턱에 들어서자 눈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눈은 산 전체를 뒤덮은 채 숨죽여 흰 빛을 드리웠다. 사방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이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쉬이 불 때마다 눈이 먼지처럼 일었다. 숲은 홀씨를 방사하듯 거듭 가랑눈을 쏟아냈다. 흩어지고, 도로 쌓이길 반복하는 새하얀 눈의 입자가 마치 숲의 입김처럼 보였다. 숲이 내쉬는 날숨 같았다. 나는 그 숨소리를 태동처럼 귀 기울이며 걷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새하앴지만, 눈길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험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정강이가 파묻혔다. 길은 표면보다 한층 더 깊게 박혀 있었다. 발이 시렸고,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몸속 허기와 피로가 점차 선명해졌다.
그때, 주위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뒤쪽에서 누군가 거리를 둔 채 조금씩 뒤따라오는 게 보였다.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편히 앞질러 가라는 뜻에서였다. 한데, 그는 내 움직임을 살피더니 이내 걸음을 멈췄다.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서두를 필요도, 주저할 필요도 없다는 뜻 같았다. 그 배려에 기대 부지런히 걸었다. 산머리에 가까워진 탓인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볕이 유난히 강렬했다.
정상에 다다르자 주위는 온통 흰 눈뿐이었다. 한낮을 넘긴 오후임에도 눈은 조금도 녹지 않았다. 눈은 하나같이 짙고, 깊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내 몸의 체온과 바깥공기가 만나 뿌옇게 입김이 일었다. 그만큼 매서운 추위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둔덕의 정상을 렌즈 안에 한가득 담고 싶었는데, 구도가 맞지 않거나 배경이 아쉬워 자리를 자주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온몸으로 눈길을 쓸고 다니는 와중,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내 뒤를 쫓던 사내였다. 그는 마치 차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보였다. 정상 초입에 서서 가만히 내 쪽을 바라볼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사진을 찍다 내려오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물어왔다.
"잘 나오던가요."
예상보다 눈이 제법 쌓여 좋았다고, 이만하면 한동안 눈 생각은 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그는 다행이라며 한껏 푸지게 웃어 보였다. 그러곤 늦겨울도 겨울인지라 해가 금세 저물면 어쩌나 걱정이었다고, 일몰 즈음이면 길눈이 어두워 내려오지도 못한다며 나를 거들었다. 순간, 그가 숨죽여 내 뒤를 쫓던 일이 상기되며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그는 순전히 내가 걱정되어 산 정상까지 뒤를 살피며 왔다는 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사진만 찍어댔으니. 내가 미안한 기색을 표하자, 그는 그럴 필요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폭설이 내린 다음 날이면 으레 하는 일이라고. 그러니, 전혀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되려 모처럼 쌓인 눈 구경도 하고 좋지 않느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숲을 빠져나오자 눈은 거진 다 녹은 상태였다. 눈에 파묻혀 꼼짝도 못 하던 바퀴도 그제야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월히 눈더미를 빠져나와서는 내가 이 숲에 빚을 지고 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빚은 어떠한 물리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이었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미안한 마음만 챙겨가는 것이 전부였다. 가끔 내가 세상에서 제외된 듯한 기분이 들었던 적은 있다지만, 이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합세해 내게 어떤 낭만을 선물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숲을 벗어나면서도, 경사에 미끄러지듯 마음이 숲을 향하게 되는 경험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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