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액보다 자신이 접대한 맛을 우선 물어보는 이는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렸던 것이, 자신의 음식을 검증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섬세한 배려일 수도 있다. 그는 내게 맵지는 않았냐고 물어왔다.
씁씁거리는것이 제 호흡법인 줄 착각할 정도로, 하루 종일 침을 삼켰다. 그것은 내 혀가 부추기는 일종의 신음 비슷한 것이었다. 혓바늘이 돋은 혀는 수시로 아렸고 침의 분비는 성급해졌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아 본 적이 있는 짐승의 선명한 본능처럼 내 혀는 자신의 영역에 관하여 필사적이었다. 너무나 예민했고 반사적으로 닿는 것마다 쓰렸다. 곰팡이는 덤처럼 초과분을 살아낸 것에게 피는 표식 같은 것이라 믿었지만 유년 시절부터 흰 곰팡이같이 혓바늘이 돋는 일은 어쩌지 못했다. 부위를 가리지 않았고 그 수도 보통을 넘어섰다. 습관인 양 헐면서 가끔씩 피가 고이기도 했으나, 한 번도 길들여 본 적이 없는 아픔은 늘 새것이었다. 고통은 결코 유실되어서는 안 될 삶의 수화물인 듯 보인다. 누군가와 살갗을 데어본 일이 오래된 사람은 모든 만남에서 어떠한 아픔을 예감하는 것과 비슷하게, 내 혀는 연약했다.
표면에 질감을 지닌 유형의 것에게 혀는 매번 나약하게 굴었다. 음식의 맛이나 온도에도 그랬다. 주로 마실 것을 채워 넣으며 감각을 버리듯이 액체 속으로 수장시키는 날이 많았고 나는 혀가 내 숙주인 것처럼 먹으며 살았다.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은 입이 잘 헌다는 말을 기억한다. 나는 꿈을 자주 꾸지는 않았지만 비우며 덜어낸 허공이나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닮아, 하얗게 헐었다. 어쩌면 지독히 긴 암전이 꿈이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지저분한 소리를 아픔으로 들을 줄 아는 이는 참 마음이 따듯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내게 맵지는 않았냐고 물었다.
거칠게 삼킨 숨의 잔여로 침을 빨아 마셨다. 입 안이 유독 심하게 헌 날은 침의 분비보다 삼키는 일이 더디다. 아니, 충분히 삼킬 수는 있었는데 혀가 아려서 호흡으로 들이켜야 했다. 채무 된 피로를 오직 혀로만 충당하는 듯이, 아주 가끔 입 안은 과장되게 헐었다. 그 날은 씁씁거리며 가게에 들어서던 때였다. 분명, 사정을 모르는 이는 나를 두고 수군댈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혀는 제 스스로 너무 은밀해서 수치를 들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멀리 주방에서부터 주인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맞춘다. 종업원이 없는 1인 가게였다. 천장은 순한 푸른색으로 뒤덮였고, 천장이 끝나는 지점부터 벽면을 따라서 바닥까지 온통 하얗게 칠해져 있다. 나는 천장을 보면서도 감탄 인척 씁씁 소리를 냈다. 주인은 미지근한 국화차와 폭신한 빵과 발사믹 식초가 몇 방울 잠긴 올리브유 약간을 내주었다. 보드라운 빵을 뜯어 올리브유에 적시면서도 식초는 섞지 않았다. 사실 무엇을 적신다는 이유에서였다면, 올리브유는 필요도 없을 것이다. 환부는 습기가 가득했다. 올리브유를 찍은 것은 맛을 보기 위해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맛을 보기 위하여 찍었다고 적어야 할 만큼 지난 한 시절이었다. 너무나 당연해 묘사될 필요 조차 없이 버려지는 말들이 다시 들추어질 때,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절박함을 알아챈다.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저마다의 안감에 쌓여 있을 것이다. 나는 쌓아둔 말들을 하나씩 풀어보듯, 글을 쓰고 싶었다.
메뉴판을 받아 훑는 동안에도 손님은 연이어 들어오지 않았다. 씁씁거리는 소리를 죽이려고, 국화차를 머금고 침을 삼켰다. 그러는 편이 덜 아렸다. 메뉴는 서 너 개 밖에 되지 않았다. 분명 추리고 추려 가장 자신 있는 메뉴 몇 개를 선보였을 텐데, 그의 고심은 내 혀가 닿기엔 꽤 자극적인 것이었다. 미식가란 자신의 혀가 지니는 맛에 관하여 엄정한 태도를 일컫는다면, 나 역시 그렇게 부를 수도 있었다. 나는 수시로 가려먹으며 아픔으로 자주 수렴되는 맛을 재단했다.
손가락 첫마디로 메뉴를 가리켰다. 주인은 메뉴를 정확한 발음으로 되물으며 주문을 확인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종종 음식을 대하면서 알 수 없는 비감에 휩싸이곤 했지만, 혀에서 느끼는 물리적인 것과 크게 상관없어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혀는 좋은 명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픔이, 둘러 댈 수 있는 말들을 경유하다 잠시 혀에 정박한 것이거나, 수시로 밀려오는 아픔을 구별하는 것이 힘들어 모조리 혀 때문이라고 매달아 두었을 수도 있다. '엄마'나 '당신' 같은 말들을 그곳에 오래 걸어 두었던 것 같다. 주인은 주방에서, 나와 눈을 맞춘 공간으로 접시만 쑥 밀어 넣고는 건너편으로 돌아와 다시 접시를 집었다. 원형으로 오목 히 패어있는 접시였다. 고개를 몇 번 움직이면 그 수만큼 음식이 희끗 보이다 말았다. 주인은 분명 맨 얼굴이었으나 음식을 조리할 때는 안경을 집어 걸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수증기가 고이면서 손으로 몇 번을 문댔는지, 안경알에는 기름 얼룩이 기이한 문양으로 번져있었다. 그가 요리를 하면 수증기는 그의 눈가를 더럽힐 테고, 그러면 손등으로 부비면서 눈가를 헤집고. 그러다 한 번 펜을 휘적이면 수증기는 들킨 듯이 그의 눈을 감추어버리고, 또 그는 그것을 쓸어내리고. 혹여 왜 안경을 써야만 했는지가, 내가 기어코 먹을 수 없는 더러운 입을 이끌고 이곳에 와야 했던 이유와 닮은 것이라면, 당연한 말을 또 되풀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단지 맛을 보려고, 그는 아마 보고 싶어서라고.
그는 참 가지런해 보인다. 반듯한 사람 같다. 아마 이발도 2주에 한 번 꼴로 자신이 집어놓은 길이만큼을 비워낼 것이다. 단정한 사람의 차분한 모습은 하나의 정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방과 테이블을 몇 번씩 번갈으며 음식을 내어줄 때도, 제자리로 돌아가 국화차가 우려 져 있던 투명한 티포트에 물을 채워 넣을 때도 흔들림은 적었다. 그렇게 그는 비워진 잔에 국화차를 부어주며 내 쪽으로 티포트를 밀어주었다. 내가 꽤나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음식을 입에 털듯이 던져 넣고 연이어 차를 들이켰다. 뱃속에서 차오르는 음료의 포만감은 생각보다 거대해서, 스스로 구석구석을 출렁이며 몸집을 부풀리는 듯했다. 음식의 절반이 입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식어있었다.
음식이 아까워 억지로 입에 넣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픈 일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절반의 음식이 버려져 있어도, 주인분의 표정은 이제 막 울음을 그친 사람처럼 편안해 보인 것은 의외였다. 음식에게 한 번도 애정을 느껴 본 적이 없거나 들여지지 않는 음식에겐 애정을 쏟지 않는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계산대에서 맛은 괜찮았는지 물었다. 음식을 절반이나 남겨둔 상황에서 맛있다는 말은 맛없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적어도 더욱 모질게 들릴 수는 있다. 자신의 질문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바꾸어 물었다. 음식이 맵지는 않았냐고,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아랫개에 가져다 놓고 두드리는 시늉까지 거들으며 말했다. 그는 주방에서부터 내 혀의 사정을 알아주었다.
입이 진창으로 헐었음에도 이상하게 발은 음식점으로 가닿았던 것을 보면, 내가 헷갈린 것은 분명 맛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일 텐데. 그렇다고 통째로 놓아둔 티포트나, 주인이 대접한 편안한 표정도 답이 되기에는 어딘가 모자라다. 며칠을 골몰하다 놓아버린 질문을 이렇게 적는 것이다.
그냥 그의 모든 의뭉스러운 행동들이 살가웠다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