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한 번, 지독하게 벌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잔고를 확인해야 하는 일이나 돈 때문이라는 변명도 슬슬 박하다 싶어서였지만, 원래 버는 일은 돈이니까라는 말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만약 무엇 때문에 벌러 왔느냐고 물어본다면, 돈이니까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새파랗게 어린놈 치고 무르지 않고 독한 기질이 있다는 말도 좀 듣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왜나 무엇 같은, 질문을 한 번도 건네지 않았다. 그냥 할 수 있느냐는 말만 던지듯이 물었다. 조금 삐딱하게 다리를 괴어 앉고는, 너 같은 애들은 수없이 봐왔다는 식으로 할 수 있겠냐고, 정말 그럴 수 있겠냐는 말만 했다. 보수가 충분하다고도 했다. 그가 대뜸 이런저런 질문을 쏟다가 가리듯이 입가로 두 손을 모았다. 결국 내가 학생이라는 것과 그에 필요한 비용들에 관하여 셈을 마친 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충분한 일이니까. 더구나 학비와 자취 비용, 용돈까지 충당할 수 있다는 말을 가끔씩 곁들일 때면, 그는 흡사 무엇을 노리기라도 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다, 마침 사무실로 회색빛의 유니폼을 입은 한 사내가 들어왔다. 땀에 절어 쥐색에 가까운 색이었지만 분명 회색빛의 유니폼이었을 거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내는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을 뜨러 왔다고 했다. 더듬듯이 말을 구겨 넣는 발음이었다. 숨을 어지럽힐 정도의 더위였으니, 땀을 온몸에 묻히는 중이었으니. 당신에겐 충분히 맑고 시원한 것이 필요해 보였다. 팀장은 그러라는 휘날린 손짓과 함께 시원한 물을 가득히 따라가라고 했다. 물을 뜨다가 땀을 턴 손에 약간의 물을 적셔 목 부근을 문지르기도 하던, 당신은 몽골사람이라고 했다.
우연히, 그때 처음 마주친 이후로 당신과 나는 같은 곳에서 잠을 자는 사이가 되었다. 삼십 대 중반 정도에, 입에는 구수한 말씨가 넉넉히 배어있었다. 거친 일과 거친 사람들 사이에서 터득한 말들은 반쯤이 욕이었으나, 들어도 나쁘지 않은 그런 욕이었다. 아마,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말이었으니 욕인 줄 모르고 그렇게 사용했을지도. 더운 날, 몸에선 갑갑하고 탁한 기운이 자주 올라오던 날. 유독 찬 바람을 싫어하던 당신은 여간해선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서늘함이 모두 선량한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그 바람은 시원하지 않은 차가운 바람이라고, 바람을 구분하는 드문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알아볼 수 없는 자막이지만 쏘름끼치도록 징그러운 공포영화를 좋아했고, 얼굴을 구기며 보는 내가 우습다며 골리기도 했던 당신.
첫 근무 날, 우비같이 노란 방산복과 방독면을 서툴게 쓰고 있었다. 손목과 팔이나 발목과 발, 얼굴과 목 사이 같은 벌어진 틈에는 간간히 테이프를 찢어 가리듯 막아놓았다. 얼마 전 테이프를 꼼꼼히 붙이지 않아 살이 산에 썩었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그렇게 오래, 여러 번을 확인했다. 온몸을 감싸는 복장은 일종의 막처럼 가두거나 덮는 듯이 갑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신 가득히 올라오는 열기와 가뿐 숨이 눈 주변에 뿌연 김을 피웠다. 체온이 투명한 유리알 속으로 번져가는 중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뿐더러, 일회분의 숨을 거듭 마시는 것처럼 거북하고 매스꺼운 느낌이 몸 깊숙한 곳부터 서서히 울렁였다. 허리와 고개를 고꾸르면서 숨을 골랐다. 호흡에도 적당의 온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런 나를 보고 손짓으로 내려가 쉬라고 말했지만, 내 몫의 일만큼 덜 쉬어야 할지 모르는 당신 걱정에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다만, 어려운 느낌과 난해한 감정 사이에서 어쩌지도 못하고 한참을 서있었을 뿐. 한동안 무력하게 당신의 뒤를 살폈다. 겨우 두 눈으로 당신을 가득 문지르다가 돌아왔다.
하루에도, 족히 서너 번은 꼭 물로 온 몸을 헹궜다. 땀을 온몸에 쏟던 일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도꼭지를 더운물 쪽으로 돌려도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았다. 되려 물줄기만 허약해지다 수그러들었다. 물의 온도가 아니라 단지, 수압을 조절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다. 아무리 체열로 달궈진 몸이라도 시리도록 찬 물을 끼얹는 일이 고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슬픈 일도 못 되었다. 슬프다는 말은 고되거나 번거롭다는 의미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어쩔 줄 모르는 마음과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이 만나, 그렇게 단단히 굳으면 슬픔이 된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래야 슬픔이 된다고 믿는다. 어쩌면, 슬픔의 대부분은 시간의 몫이다.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조잡한 컨테이너가 전부였다. 정성껏 복장을 벗고 서로 숨을 고르기에 부족하진 않았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어항을 뚫고 나온 물고기처럼 입을 자주 뻥긋거렸다. 숨이 상했거나 이 세계의 호흡법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암모니아 같은 날카로운 냄새가 온종일 넘쳤고 테이프를 자르겠다며 꺼내 놓은 잘 마른 칼심은 일주일도 안되어 녹이 슬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은유나 비유가 아니라 그들은 진짜 속을 문 드리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팔이나 정강이에 촘촘한 주사자국이 둥그렇게 박혀있었고, 발 부근이 으스러진 사람도, 시취가 날 듯이 몸의 절반이 검은색으로 바랜 사람도 있었다. 아침마다 긴 명단에 각자의 이름을 적어야 했는데, 검정펜으로 한 자 한 자 적다 보면 가끔씩 누군가는 붉은 펜으로 한 줄 긋고 사라졌다. 많이 아프다는 뜻이었다. 그런 사람은 보통 돌아오지 않았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근사한 요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얼른 기대하라는 식으로 아이마냥 들떠있었다. 내놓은 요리는 새 요리라고 했다. 평소에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내가 알아볼 수 없는 형체의 음식이므로 그냥 새라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새라고 치자, 그러면 닭이었을까. 아니라고 했다. 진짜 새라고. 걷지 않는 날 수 있는 새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이제껏 날 수 있는 새를 먹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체한 것처럼 가슴팍이 매었다. 당신이 훌륭한 요리를 차려놓았다는 말로도 충분히 아픈 일이겠으나, 기껏해야 먹은 새라고 겨우 날지 못하는 새였구나란 사실도 슬프고 슬펐다. 밤마다 부은 무릎을 핥거나 날개를 몇 번쯤 털기도 했을 그 새는 비린 냄새였고, 오래 묵은 쉰 냄새였다. 음식을 입에 대기 전부터 강한 거부반응이 튀어나올 정도로, 그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이미 배가 부른 사람처럼 입 맛을 잃을 정도로. 몇 번 입을 거들다가, 당신이 양껏 먹도록 두었다.
음식을 비우면 당신은 분명 끔찍하게 징그러운 공포영화를 볼 거였다. 입으로 으깨고 씹던 일을 마치고 하는 것이라곤 그만큼 흉측한 것을 보는 일. 뜨거운 국물을 들이켰고, 그만큼의 땀이 이마를 더럽혔다. 물론 에어컨은 켜지 않았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한 번, 입가의 지저분한 얼룩들을 서너 번 치웠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꼭 들여다보던 액자를 다른 날보다 조금 이르시간에 꺼내 든 것은 그만 일찍 잠에 들고 싶다는 뜻일까, 아니면 너무 보고 싶어 못 참겠다는 뜻일까. 이곳에 온 지 2년이 지났다고 했다. 그의 말에선 약간의 비린내가 묻어 나왔다. 지나온 세월을 말하기엔 무릇 2년이란 말은 너무 부실하고 모자라므로 '서툰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꼬박 2년 동안 적어보았다거나, 마음을 좀 헐어 본 일이 어느덧 2년이나 지났다.' 정도로 알아들었다.
"제가 없는 날에는 주로 무얼 했어요?" 사람은 살면서 꼭 누군가를 만나야만 하고, 한참을 그러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신의 과분한 친절함도 그 못된 시간이 그리하라고 부추긴 것은 아니었을까 하여 물어본 말이었다. 그가 깊숙이, 거의 잠기다시피 한참을 골몰하다 말을 꺼냈다. "하루 종일 영화만 봤지." 참 시시하다. 기대를 잔뜩 품고 건넨 말이었으나, 가장 평범하고 적당한 대답을 받았다. 아무래도 그 영화란 끔찍한 공포영화일 테고, 무엇보다 나 같은 골릴 사람도 없이 또 무슨 재미로 보나 싶었다.
"공포영화가 그렇게 재밌어요? 매일 보면 질릴 법도 한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줄 알았으나 틀렸다는 뜻이었다. 로맨스나 코미디 영화를 주로 보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끔찍한 공포영화는 누군가와 함께 본단 것이고, 나를 그렇게 골렸다는 말이지. 심술이 났다. 억울한 마음을 들이붓고 싶어 안달이 나다가도 그의 시린 눈만 들여다보면 금세 허물어져 큰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사금파리 같은 생채기가 유독 많던 눈이라 어쩔 수 없었다. 이유라도 좀 듣다 보면 억울한 마음이 좀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에 그 이유를 물었다. 이번에도 간명한 대답이 돌아왔으나 결코 시시하진 않았다. "공포영화는 혼자 볼 수 없잖아." 아, 혼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을 영화. 함께 보면 좋았을 영화가 아니라 혼자여서는 안 되는 영화. 누군가와 함께 나눌수록 좋다는 말은 넘치고 넘친다는 뜻이겠지만, 혼자여서는 안된다는 말은 오히려 덜고 싶다는 쪽에 가까운 말이지 않는가. 살만 하다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다는 것이니까.
한 동안 공포영화 한 번 보자고 건넨 몇 말들이 마음에 두둑히 얹혀 도무지 내려가질 않았다. 도망치다시피 나온 그곳에서 제일 잘한 일을 꼽으라면, 공포영화를 함께 본 일이라고 말할 것도 같다. 그러니까 만약 누군가와 설익은 감정을 포개놓고 있다면 그리고 그 감정들을 조금 지긋이 누르고 서로에게 묻히고 싶다면, 로맨스나 멜로가 아니라 공포영화 표 두 장을 서로 나눠 갖으면 된다는 이야기다. 그게 더 간절할테고 또 진심일꺼란 생각을 한다. 당신이 내게 한참을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