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같은 시간 선상에 동행한다는 것으로서 삶은 무거워지거나 두려워졌다. 내 시간이 충분히 쓰이지 못하고 부분 부분 떼어 버겁게 나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이곳에서 아주 먼 저곳으로 다른 시간에 닿길 바랬다. 보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치열하게 살 던 때였으니. 공간보다 시간을 나눠 쓰는 일에 조금 너그러 울 수 있었다. 확실히 내 것인데 그런 줄 모르고 살아서 그랬다. 불쑥 어디론가 멀리 떠나야 될 것 같다는 예감을 한 것도,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자주 입는 옷 몇 가지를 골라 채워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팽팽히 당겨 있는 시간을 조금 헐거웁게 늘려보고자 했던 참이었으며, 타지에 발을 들이기보다 먼 시간을 떼어놓으러 조금 긴 산책을 하고자 떠난 거였다.
나는 급하게 밟고 싶었다. 내가 어서 그곳에 닿으려 한다는 사실은 내 시간의 살을 만지고 싶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가장 절박한 것이기도 했으므로. 아무리 시간을 멀리 피신해 오더라도 이곳이 그곳과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이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면, 어딘가 모자랄 것 같았다. 입국심사를 위해 길게 늘어진 줄은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마음은 좀처럼 그러지 못해서 부풀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고개만 자주 어디론가 사정없이 튀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 갔다. 앞사람의 보폭은 도통 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끔씩 다리 뒤쪽으로 손을 뻗어 종아리를 주무르다가 자국이 선명히 남고서야 그만두길 되풀었다. 사정이 어떻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것은 공간에 술렁이는 설렘이나 기대감들이, 일제히 그 향기를 잃고 매스껍다는 느낌이 들 때였다. 너무 오랜 시간 흐르지 못하고 고여있어서 그 향내가 바랜 거였다. 어떻게든 벗어나야만 했다. 내 삶이 한참을 그랬던 것처럼, 막혀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자리에 발 끝만 살짝 얹은 다음, 잠시 몸 전체를 대열에서 쭉 뺐다.
한 연인이 사정하듯이, 두 손을 꼭 모은 모습이 희끗 보인다. 무슨 일일까. 직원은 두 여권을 손으로 넘기다가 무엇을 적고 덮고, 다시 이전의 행위를 되감으면서 심각한 폼을 잡았다. 짐작해보니, 여자가 제 차례에 남자의 여권을 보여주었는데 직원이 확인을 한 것은 남자가 그 반대로 여자의 여권을 건넸을 때였던 것 같았다. 여자가 맡은 여권이 서로 엇갈린 것이었다. 헷갈린 일은 분명 여자의 몫이겠으나, 그렇다고 직원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직원은 자주 눈을 감기도 하고, 손목을 주무를 정도로 피곤해 보였으니까. 여자는 자기 몸집만 한 캐리어를 끌지 않고 들고만 와서 지쳐 보였으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지 않으면서까지, 곤란하다는 식으로 우리의 편에 서는 일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는 주위 여행객들의 눈을 끊임없이 살피며, 그녀를 채근했다. 여권 하나도 구분하지 못하냐는 투였다. 그는 조바심이 났겠으나,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도 싶었다. 여자가 그런 남자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면밀히 새기는 모습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눈을 살피는 일은, 정말이지 마음을 한껏 차오르게 만든다. 벅찬 것이든 버거운 것이든, 무슨 감정이든 간에 가득 차오르게 만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게 남녀는 서로 다른 질감의 감정들을 차곡차곡 묻거나 쌓아두고 있을 터였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은 말처럼 말을 걸지 않았지만, 분명 말을 하고 있다. 여자의 눈짓이 그랬다. 서로 주시하지 않아도 우리는 들을 수 있었고, 그녀가 자주 눈을 감아도 말들은 더해졌다. 눈을 감는 일이 말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들을 수 있는 만큼만 들리는 말. 그것이 눈의 말이다. 무어라 거는 말들을, 어떻게든 들어보겠다고 애를 써야 했다. 몇십 분이 꼬박 지나갔다. 남자의 눈에도, 여자의 눈에도 내가 읽어낼 수 있는 말들이 더 이상 비추지 않을 무렵, 문제가 해결됐다. 여자는 바퀴가 고장 난 캐리어를 양손으로 힘겨이 들고 갔다. 바퀴는 언제부터 망가졌을까. 남자는 그런 여자를 언제부터 거들지 않게 되었을까. 어쩌면 자기 짐이니까, 자신이 들겠다는 말을 해놓았을까. 그럼 그 말은 도대체 얼마나 긴 슬픔을 이고 온 것일까. 구르지 못하는 바퀴가 바닥에 뜨다가 닿다가를 번갈았다. 무언가에 몇 번 걸리기도 했다. 그녀는 딱 한 번 캐리어 바닥에 쿵하고 거칠게 놓았다. 그러자 입을 열고 토하듯, 드라이기며 꾹꾹 채워 넣은 옷가지들이 우르르 홀가분하게 쏠려나왔다.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표정들이 남자의 얼굴에 그려졌다. 그것이 자신들의 여행에 대한. 아니, 관계에 대한 일종의 불편한 암시였다는 것을 남자만 모르는 것 같았다. 암시가 꼭 그런 모습으로 위장한 채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기쁜 일 엔 암시가 필요 없기 때문일까.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넣다, 여자가 말했다. 여권을 잘 챙겨 놓겠다며, 내게 맡겨 놓으라고 했다. 그래야 제 마음의 쓴 맛이 좀 가실 것 같다고도 말했던 것 같다. 남자는 그러라고 여권을 캐리어 속으로 던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남자는 몇 번 여자를 달랠 수 있을지 언정, 절대 같이 울어주지는 못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 연인을, 두 남녀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그 날 저녁이었다. 비가 좀 내렸고, 그 물내를 맡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높은 층 수의 전망대까지 오르던 날이었다. 좀 더 짙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두 남녀는 테이블에서 서로의 손을 꼭 움켜줬다. 그러니까 연인 옆에는 실내 흡연실이 있었고, 비가 막 그친 때라 공기 중엔 물비린내가 조금 섞여 든 참이었다. 흡연실의 입구가 열릴 때마다 매캐한 향이 불쾌하게 달려들었으나, 그 둘은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보다 더 쓴 냄새에 이미 깊게 취해있는 사람들 같았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손을 덮듯이, 쥐고 있는 모습에선 아, 결국 터졌구나. 달래는 중이었겠구나, 싶은 생각에 입가를 약간 구겼다. 이상한 말이지만, 솔직히 나는 놀란 쪽에 가까웠다. 남자의 눈에서 고운 물기가 떨어지는 모습은, 도저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젖은 물내를 맡으러 왔다가, 무언가에 흠뻑 잠긴 사람처럼 그곳에 오래 허우적거렸다. 우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낮에 본 그의 모습이라면 충분히 그렇다. 울지 않던 사람이 우는 일에는 필시 지독한 어지러움을 동반하는 것이어서, 많이 아프고 앓는다. 그는 이제 막 그러려던 차였다. 그가, 그 날 하루 동안 대체 무슨 일을 겪었을까 궁금해하다 결국 그 질문은 여자에게 더욱 어울릴 것이란 생각에 그만두어야 했다. 단지, 남자는 그 날 비가 유독 퀴퀴했다던가, 밤이 깊어 그녀의 눈이 좀 부셨다든가 해서. 모든 우연이 공모하여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우연은 여자가 그토록 바랬던 하나의 필연이라, 시큰거리고 아찔한 감정들이 물감처럼 한 껏 풀어지는 일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비가 와도 한 동안 밖을 나서지 않았지만, 비가 오지 않더라도 괜찮은 날들이 계속이었다. 너무 진탕 마시거나 맡아버려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