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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광 Jun 20. 2022

D-16. 벽이 아니라 문을 열어라

D.R.I.V.E

인생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막에는 길이 없습니다. 설령 길이 있다 하더라도 돌아보면 어느덧 모래바람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사막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하나 없는 그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존재가치와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당신이 기대어 있는 곳은 벽인가문인가?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재기발랄한 스토리 중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들 중 하나는 바로 벽이 문으로 바뀌는 장면이다. 주인공 해리포터가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런던 킹스크로스역 벽에 다가간다. 주저주저하다가 마침내 벽속으로 성큼 발을 내딛자, 굳게 닫혀 있던 단단한 벽이 커다란 문으로 변한다. 그 안에는 마법 학교로 가는 특급열차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승강장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해리포터』의 저자 조앤롤링은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전혀 다른 곳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얘기하고 있는 듯 했다.     


몇 해전,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박찬욱 감독이 <설국열차> 봉준호 감독을 대신하여 수상소감을 얘기한 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제가 설국열차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송강호씨가 옆을 가리키면서 ‘이게 너무 오랫동안 닫혀 있어서 벽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문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벽 없는 문이란 있을 수 없다. 사실 모든 벽은 문을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높은 벽을 쌓는 건 그 어딘가에 작은 문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문이 없는 벽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즉 가능한 일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벽이 보이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보면 결국 문이 보이는 것이다. 벽을 벽으로만 보면 문은 영원히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가지 장애물로 인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장애물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환경적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가진 장막일 때가 많다. 과거의 내가 할 수 없었다고 해서 현재의 자신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극복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뿐이다.

금광석 1t 속에 들어 있는 금의 양은 불과 몇 그램에서 많아야 수백 그램에 불과하다. 금을 캐는 사람이란, 그 1t의 바윗덩어리 속에 숨어 있는 그 작은 양의 금에 주목하는 사람을 말한다. 가능성을 보고 문을 열기 위해 벽을 두드리는 사람이다.     


‘파이크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있다. 물고기의 한 종인 파이크와 그 먹이가 되는 작은 물고기를 유리 벽으로 차단하여 수족관에 함께 넣어주는 실험을 했다. 파이크는 작은 물고기를 먹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공격하고 덤비지만 그래봐야 유리 벽에 부딪혀 상처만 입는다. 결국 나중에는 그 유리 벽을 치워도 먹이를 잡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먹잇감이 유유히 헤엄쳐 다녀도 절대 잡아먹지 않는다. 반복적으로 학습했던 실패와 고통 때문에 막상 그 장애물이 사라져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도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길들이기 위해 쓰는 방법도 이와 유사하다. 어릴 적부터 뒷다리를 말뚝에 사슬로 묶어놓는다. 안간힘을 써도 말뚝 주변을 벗어날 수 없는 코끼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말뚝 주변을 자신의 한계로 여기게 된다. 나중엔 말뚝을 빼도 평생을 그 주변에서 살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온갖 사슬로 묶어놓는다. 자신의 한계는 여기까지라는 두려움의 사슬, 남들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한다는 착각의 사슬, 더 갖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의 사슬로 꽁꽁 묶어놓곤 한다. 


사람은 현재를 살지만 많은 부분 기억으로 산다. 경험과 기억들이 만든 생각의 틀은 점점 우리의 신념과 믿음으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신념과 믿음은 우리의 감각과 감정을 장악하고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의존하는 그러한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게다가 오감으로 들어오는 정보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기존 기억과 연결되고 조정되어 해석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파이크 물고기’와 같은 한계 속에 갇히고 말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는 유리 벽이 단지 생각 속에서만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던 허망한 장막은 아니었을까?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미국 국가대표 짐 하인스는 9초 95의 기록으로 100m 육상 경기 역사상 최초로 10초의 장벽을 깼다. 전광판에 9초 95라는 기록이 뜨자 그는 두 팔을 벌리며 낮게 한마디를 읊조렸다. 그 순간의 모습이 전 세계에 중계되었지만, 당시 하인스는 마이크를 차고 있지 않아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전야 때, 기자 데이비드 팔은 올림픽 영상자료를 돌려보다가 기록을 깬 하인스가 중얼거리는 장면을 발견하고는 흥미를 느껴 그를 취재하러 나섰다. 당시 무슨 말을 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하인스는 이렇게 답했다.

“의학계에서는 인간의 근섬유가 견딜 수 있는 운동 한계점이 초당 10m를 넘을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20년 동안 육상계에서는 이 말이 진실로 굳어져 왔지요. 하지만 저는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피나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 10초 벽을 깼음을 확인한 순간 저도 모르게 얘기했습니다. ‘아, 10초는 벽이 아니라 문이었어’라고 말이지요.”     


닫혀 있는 문을 여는 데에는 한계를 뛰어넘는 하인스와 같은 용기와 믿음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용기와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벽을 더 이상 벽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될 때 그것은 출구가 없는 벽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의 문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관점을 바꾸는 일   

  

네덜란드 판화가인 모르츠 코르넬리스 에셔는 그림 속에 놀라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는 철저히 수학적으로 계산된 기하학적인 공간 구성과 초현실적인 묘사를 통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작품의 맨 위에서는 새였던 것이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어느새 물고기로 변해 있다. 그 물고기는 하늘에서 땅으로, 또 어느새 바닷속으로 옮겨 다닌다. 

에셔는 높은 곳과 낮은 곳, 가까운 대상과 멀리 있는 대상을 연결시키고 우리의 관점을 현혹한다. 보이는 것과 인지하는 것 사이의 경계를 보란 듯이 허문 그의 그림은 모든 것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세상을 무한히 넓은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일깨워준다.                                                  

        

<에셔, Verbum>


우리는 때로 시련과 고통이 찾아오면 그 시련이 감당할 수 없는 경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무언가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수록 거기에 담긴 보다 깊은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시련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삶을 좀 더 커다란 새로운 틀 안에서 바라볼 수 있게 이끈다는 점이다. 마치 역설적이고 기묘한 변형을 담고 있는 에셔의 그림을 볼 때처럼 시련과 고통 또한 그 경계가 절대적이지 않으며, 그 시간을 통해 오히려 진정한 행복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나는 한동안 과거의 시련과 고통을 애써 외면하려 들었다. 심지어 내게 그런 시간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 시간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면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상황을 인식할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실 실패했거나 실패할 수 있다는 점보다 실패에 대한 우리의 생각 자체가 삶을 더욱 힘들게 한다. 실패는 곧 패배이고 끝이라는 인식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실패에 대한 입장과 해석을 바꾸지 않고서는 결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명확한 기준은 실패에 대한 견해이다. 실패는 무언가를 성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공기의 저항이 없으면 비행기는 날 수 없고 물의 저항이 없으면 배는 뜰 수 없다. 양력과 부력은 모두 저항에서 비롯된 힘이다. 성공도 실패의 저항 없이는 제대로 일어날 수 없다.      


2018년 미국 심리학회는 승무원 중 흡연자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5시간 미만의 단거리 비행과 8시간 이상의 장거리 비행을 하는 승무원들의 흡연 욕구를 비교하였다. 결과는 우리의 예상과 달랐다. 흡연을 참아야 하는 시간과 흡연 욕구는 비례하지 않았다. 대신 단거리 비행이든 장거리 비행이든 비행거리와 상관없이 흡연 욕구는 비행기가 착륙하기 직전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중요한 건 비행이 끝나가고 있고 곧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무의식 속에서의 욕구였다. 이 실험에서 알 수 있는 건, 욕구와 마찬가지로 사고나 행동도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실패나 두려움에 관한 생각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자전거를 탈 때도 넘어지지 않으려면 넘어지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넘어지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두려움 그 자체이다. 미래의 불행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면 이미 불행해지는 것인데도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미리 상상함으로써 스스로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오늘 걱정하는 일은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시련이 내게 말하고 싶어하는 걸 알아챌 수 있도록 관점을 바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시각과 틀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어제의 고통과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다.      


러시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솔제니친은 어느 날 무심코 모닥불에 통나무를 던져 넣었다가 그 안에 개미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른 꺼내 개미들을 살려놓았다. 그런데 개미들은 통나무를 향해 다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그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일까? 불타오르는 통나무를 붙잡고 바둥거리면서 그대로 죽어가게 만드는 것일까?’하고 의문을 던졌다.

나중에 그는 개미가 공동체의 생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개미에게 두려움이 두려움으로 여겨지지 않는 까닭은 자신이 불타 죽게 된다는 생각 자체가 결여돼 있기에 그러한 행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에 도전하는 행위는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두렵고 힘들지만 희망을 안고 나아가는 건 오직 인간만이 가능한 일이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능력이다.

그러기에 소나기가 퍼부어도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 아름다운 무지개는 비가 그쳐야 뜨는 법이며, 비가 오지 않았던 하늘에는 결코 무지개가 뜰 수 없다. 시련과 두려움이라는 소나기가 지나가야 비로소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힘든 순간에 축복의 손길은 그렇게 찾아온다.

“벽을 내려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그 벽이 문으로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하라” 

온갖 관습에 도전하여 마침내 세계 패션 역사에 환 획을 그은 코코 샤넬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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