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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광 Jul 18. 2022

D-22. 사막에 흐르는 시간

D.R.I.V.E.

인생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막에는 길이 없습니다. 설령 길이 있다 하더라도 돌아보면 어느덧 모래바람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사막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하나 없는 그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존재가치와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예전 런던을 방문했을 때 잠시 여유가 생겨 근처에 있는 테이튼 브리튼 미술관을 가본 적이 있었다. 수많은 걸작들 중 유독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19세기 영국 화가 조지 프레드릭 왓츠의 그림이었다.     


지구를 상징하는 작은 구 위에는 눈에 붕대를 감은 소녀 하나가 맨발로 앉아 있다. 별 하나만 외로이 빛나는 어두운 하늘아래, 소녀는 하프를 부여잡고 무언가 연주를 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줄은 모두 끊어져 있고 한 줄만 남아있다. 조심스럽게 드러나 있는 왼발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오른쪽 종아리를 감아올리고 있다.      


조지 프레드릭 왓츠 <희망>


이 그림의 제목이 <희망(Hope)>이라고 한다면 믿기는가? 사실 이 그림은 왓츠가 사랑하는 딸을 잃은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그린 것이다. 왓츠는 절망 가운데 가슴 저린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뜻대로 되지 않는 외로운 ‘사막의 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모든 상황이 절망스럽고 모든 사람이 떠나간다.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철저하게 혼자라는 사실에 먹먹해진다.     

나에게도 예외없이 그런 시간이 찾아왔다. 파도가 밀려왔다. 집어삼킬 듯한 파도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파도라는 것이 밀려왔다가도 다시 물러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파도가 사라지고 나서다. 물기가 모래사장으로 스며들고 난 후다. 슬픔과 절망의 남은 껍질 같은 것들이 온몸을 감싸면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서지 못하게 된다.

그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 끊어지지 않은 남은 한 줄을 찾는 일이다. 그 줄을 부여잡고 사막의 시간을 오롯이 버텨내야 한다.    

  

그리스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카이로스(καιρός)와 크로노스(χρόνος)의 2가지가 있다. 크로노스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사람들마다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주관적 시간이다.

사막에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흐른다. 사막이라는 공간에서는 누구나 ‘특별한 시간’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뜨거운 태양아래 그늘 하나 없는 사막, 모래바람에 눈조차 뜰 수 없는 사막,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사막, 그곳은 외롭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한편으로 ‘특별한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자신을 만나고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외면하고 싶은 고통의 시간이지만, 피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을 뜨게 만들어 준다. 때로는 그 시간을 통해 수동적이고 진부한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종교학자 헨리 나우웬은 『두려움에서 사랑으로』에서 ‘소명’은 고통을 철저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상처 부위가 낯선 것으로 남아있는 한 고통은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힐 것이기에 고통을 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한다. 어둠을 멀리한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이후 문명은 놀랄 정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밤을 빼앗겼다. 밤에도 환하게 빛나는 네온사인과 흔들거리는 불빛으로 사람들은 지치고 피곤해하며 우울증이 늘었다. 

빛이 필요하듯이 반드시 어둠도 필요하다. 밤이 없으면 휴식할 수 없으며, 고통이 없으면 새롭게 성장할 수가 없다. 세상의 불빛이 꺼지고 영혼의 밤이 올 때 영혼은 성숙되며,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고통 가운데 거하는 것은 결코 저주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무지개가 뜨기를 바라지 비가 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먼저 비가 와야 무지개가 뜨는 법이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결코 아름다운 무지개는 뜨지 않는다. 

장미는 언뜻 아름다운 꽃에 아무런 필요 없는 가시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래 가시 많은 나무에 아름다운 꽃을 맺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한밤중에 장미를 채취한다. 가장 향기로운 향을 뿜어내는 시간이 자정부터 새벽 2시 사이이기 때문이다. 춥고, 어둡고, 참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에 가장 아름다운 향이 뿜어지는 것이다.      


오래 전 러시아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허름하고 좁은 골목이었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실제 배경이 되었던 여관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개인적으로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내면의 심리와 본질을 꿰뚫는 글도 글이지만, 무엇보다 그가 고통의 시간을 통해 진정한 기쁨을 경험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849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감옥에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사형이 집행되는 날, 그는 광장으로 끌려 나왔다. 이미 총살형을 집행할 군인들은 정렬해 있었고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는 생각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바로 그 순간, 전령이 급하게 말을 타고 달려왔다. 전령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황제가 사형선고를 거둔다는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날만큼 행복했던 때가 없었다. 나는 계속 방을 걷고 또 걸었고 계속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생명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는 이어서 얘기한다.

“지금처럼 풍성하고 건강한 삶을 느꼈던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삶은 선물이다. 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우리 모두 고통을 겪고 싶지 않지만, 놀라운 사실은 고통의 시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삶과 생명을 느끼게 된다. 시련을 통해 충족감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듯이, 왓츠가 그랬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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