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보다 돈이 더 중요한 폴 게티와 성과중심 한국 사회의 차이는?
개봉하는 날 저녁에 돈 쓸 곳 많은 중년 가장인 친구와 둘이서 <올 더 머니>를 봤다.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 영화라는 사실과 그의 주특기인 실화와의 조합, 무엇보다 돈에 관한 성찰이 담겨 있다는 것만으로 감상 욕구가 충만하던 터였다. 영화를 본 뒤 며칠 지나서야 평을 남기는 이유를 생각했다. 글래디에이터 같은 화려한 액션 없이도 시종일관 심장이 쫄깃하게 한 영화였다. 반전도 없고 지루하다는 젊은 관객 평이 많지만 돈을 벌어야 할 책무에 시달리는 가장의 입장에서는 몰입도 높은 영화였다. 흥행 공식이 뻔한 헐리웃 문법에서 벗어난 스타일과 작품성으로 감독의 세계관을 전하는 리들리 스콧의 이 영화에서 돈에 대한 철학은 뭘까?
사전 정보로 접한 몇 가지를 먼저 소개한다.
검찰과 문단에서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의 근원지인 미국 영화계에 케빈 스페이시가 성폭력 전력이 드러나 퇴출됐다. 중요한 역할인 폴 게티 역을 맡겨 촬영을 거의 마친 스콧 감독은 과감히 케빈 스페이시 카드를 버렸다. 노장 크리스토퍼 플러머에게 폴 게티 역을 맡겨 9일 만에 다시 찍었다고 한다. 클린턴 대통령도 성추문 후 부적절한 행위였다는 묘한 말로 인정하고 물러나지 않았는데, 대 배우인 케빈 스페이시를 이 영화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감독의 결단이 당연하면서도 어려웠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폴 케티라는 인물은 크리스토퍼 플러머에게 훨씬 제대로 맞았단 생각이 든다. 이 노장 배우는 1965년 명작 <사운드 오브 뮤직>의 근사한 아버지 게오르그 폰 트랩 대령이었다. 53년이 흘러 <올 더 머니>에서 돈에만 집착하는 실존 인물로 표정과 동작이 더 확실하게 어울렸다. 재촬영으로 다른 배우들도 고생했을 것이다. 유괴된 아들의 엄마 역인 미셸 윌리엄스는 일당 80달러의 형식적인 재촬영 출연료를 선택했고, 유괴범들을 쫓는 마크 월버그는 150만 달러의 재촬영비를 받았다고 한다. 마크 월버그는 문제가 되자 15억 전액을 성추행 여성 지원단체인 타임스 업에 기부했다. 두 배우의 출연료 차이가 성별 임금 격차와 불평등 문제로 떠오른 모양이다. 거장이 만든 돈 영화에 성추문 재촬영과 배우들의 출연료 문제로 시끄러웠다는 것은 미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도덕성, 돈 문제가 부글부글하다는 방증인 것 같다.
마크 월버그는 대한 소문은 좋지 않다. 십 대 시절 아시아인 폭행으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고 미국식 국뽕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고 돈을 밝힌다고 한다. 그도 나름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여러 일과 단계를 겪었을 것이다. 90년대 초 뉴키즈온더블록의 한국 공연 때 관객 압사 사고가 난 사건이 있었다. 마크 월버그는 그 뉴키즈온더블록의 초기 멤버였다. 1991년 랩 가수로 독립해 듀엣을 결성해 활동하면서 뉴키즈 멤버에서 빠졌지만, 그의 형 도니 월버그는 해체와 재결합까지 뉴키즈의 자리를 지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 안다.
마크 월버그는 배우이자 가수로 연예계 생활이 다채롭고 긴 인물이다. <올 더 머니>에서 유일하게 관객이 원하는 시원한 말을 하는 CIA 출신 보안요원으로 나온다. 그가 폴 게티의 영향력 아래 있다가 도덕과 양심적 일갈을 날리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그나마 인간이 숨 쉬는 장면이었다.
82세의 리들리 스콧 감독과 88세의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이런 부자로 사는 게 어때 보이냐고 질문하는 <올 더 머니>. 돈과 탐욕에 관한 영화이면서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들의 영화이기도 하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손자를 살리기보다 손에 넣기 어려운 명화를 자기 아이로 생각하며 구입하는 폴 게티에게 인간의 냄새는 없다. 보기 싫은 사람들 속에 있어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인생이다. 콜로세움이라도 사버릴 것 같은 돈을 가졌어도 구두쇠 황제의 삶은 추악하기만 했다. 세상은 그와 같은 부자가 되는 법을 원하지만, 그는 자기만의 부자로 사는 법을 가지고 있다. 주변의 재무 전문가들은 폴 게티의 욕심에만 맞춘다. 도덕성, 양심, 인간으로서의 태도는 안중에 없다. 위험한 집단에 갇혀 하루라도 빨리 구하지 않으면 죽는 3세에 대해 감정 이입하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다. 언론도 선정적이고 시아버지가 보낸 플래처도 한통속인 것만 같다. 손자의 생명보다 명화를 더 사랑하고 주변을 모두 자기 돈 뜯어먹는 벌레 취급하는 억만장자에게 염증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그의 돈을 사랑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뿐이다. 지독하게 인간미 없는 그가 불쌍하다고 하면서 우린 모두 그의 돈을 부러워한다. 가족을 잘 돌보기 위해서, 여행 한번 잘 다녀오기 위해서, 쉬기 위해서... 왜 우린 돈을 사랑할까.
실업자이지만 평범한 가장이던 폴 게티 2세는 아버지 폴 게티의 그늘밖에 있다가 안에 들어오자 마약중독에 폐인이 된다. 이혼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가 뒤늦게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돈을 빌린다. 다 빌리지도 못한다. 빌려주는 아버지나 아이 엄마에게 문제를 맡긴 아들이나, 가련한 사람들이다.
10대 때 납치된 실제 폴 게티 3세도 마약 남용과 트라우마 속에 2011년 54의 나이로 불행한 생을 마감했다. 폴 게티 왕조는 석유 재벌로 쌓은 건축물은 남겼지만 불행에 대한 교훈도 남겼다. 세상의 모든 돈을 가진 왕조의 후대는 관광지로 남을 뿐이다.
이 땅의 재벌들은 후대에 무얼 남겨줄까? 대한민국을 주무르는 힘? 갑질? 빵 한 조각 라면 한 그릇 훔쳐서 형을 받는 사람들과 다르게 큰 죄를 짓고도 받는 무혐의 처분? 아무도 곁에서 제대로 된 길은 조언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돈만 생각하는 사람들만 남겨둔다면 그 자체가 불행이란 걸 인식이라도 할까?
자본주의에서 살면서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잘 벌고, 충분히 벌어서 행복한 느낌을 많이 소유하는 것 중요하다. 명품백이나 명차를 갖는 것이 아닌, 사소한 소비로 행복을 얻는 탕진잼을 향유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하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알프스에서 잠시 쉬기 위해 돈을 개같이 벌어야 할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전부일까. 돈을 아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그레잇과 스튜핏으로 나눈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는 <올 더 머니>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반전 없는 영화일 뿐이다. 그러나 <올 더 머니>의 반전은 세상의 모든 돈을 가진 사람과 그 가문의 실제를 보는 관객의 가치관 변화에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어떤 액션물보다 더한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스펙터클을 느낄 수 있다. 돈에 대한 이유와 그 가치를 변화시키는 액션만큼 거대한 액션이 또 있을까.
생활비 해결이 어려운 사회적기업을 만드는 시점에서 내게 많은 질운을 던져주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이 영화를 보며 시종일관 숨이 막혔다. 단순히 로또 1등들이 당첨 전보다 불행해진다는 그런 식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인 집단에서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철저하게 맞추는 주변 사람들에게 더 눈이 갔다. 폴 게티의 세무 전문가, 그의 결정을 수행하는 무표정한 돈 로봇들...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가치와 결단을 말하면 잘릴 수밖에 없는 돈 왕조에서 올곧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영화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인생 후반작들은 철학과 세계관이 담겨 있어서 좋다. 재미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헐리웃 문법의 재미도 이제 좀 식상하다.
별 다섯 중 네 개
부자로 살고픈 이유를 질문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