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실력이 있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올레TV 모바일에서 무료로 오픈한 <의천도룡기 2019>를 보고 있다. 드라마 시리즈에 빠지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작년에 뒤늦게 <프리즌 브레이크>를 몰입해 보고 조심하려 했는데 김용 원작의 이 드라마 총 50부 중 25부를 정주행하고 말았다.
남자들은 한 번씩 접해 본 김용의 무협 소설에 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작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중국의 셰익스피어라고 일컫는 그를 이제야 드라마로 접한 것이 다행일까. 최근 심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진통제가 필요해 무심결에 1편을 보다가 50부 중 절반을 보았는데...
중국 문학의 스펙터클과 다양한 캐릭터의 군상을 김용 원작의 <의천도룡기>에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능가함을 보게 된다. 게다가 여러 번 재탕한 이 원작 드라마의 2019년 버전은 영상미와 음향 효과,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여 1편을 보면 순식간에 이어서 집중할 수밖에 없다.
원명 교체기 당시 강호에는 “도룡도와 의천검을 얻는 자, 천하를 호령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며 도룡도와 의천검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일어난다. 무림에는 무당파와 소림사 등의 정파와 여러 무림 고수가 군림하는 명교의 사파가 있었다. 명교는 소림사처럼 역사가 깊다. 비밀 종교 조직으로 그 근원은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 등이다. 당나라 측천무후 때 중원 땅으로 전파되었고, 이후 마니교(摩尼敎)라고 불렸다. 주원장이 나라를 세우면서 명나라로 칭한 까닭과 연결돼 있다. 불교에 정통성을 둔 중국에서는 사이비라고 폄하했지만 명교에는 무림의 고수들이 즐비하다. 정파든 사파든 서로 악을 타파하고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절대 반지처럼 절대적인 힘을 얻어 우위를 차지하려 하는 데는 인정사정없다.
이 가운데 무당파의 시조인 장삼풍의 다섯 번째 제자 장취산과 명교에 뿌리를 둔 백미응왕 은천정의 딸 소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난다. 이 아이가 주인공 장무기인데 어렸을 때 눈앞에서 강호의 의리를 지키려는 아버지가 자결로 모든 원한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죽음을 선택하고, 엄마도 로미오와 쥴리엣처럼 남편을 따라 자결하고 만다. 그 모습을 눈앞에서 고스란히 목격한 장무기가 무림에 살생과 원한을 그치게 하고 화해시키는 절대 고수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다.
나무위키에 김용 작품에 나오는 무예와 고수, 등장인물에 얽힌 다양한 설명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왜 서로 원한을 지게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에 대해 흥미롭게 해설이 돼 있어 링크를 타고 이것만 이어서 읽어도 원작을 이해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중국 드라마는 주인공이 초반에 등장하지 않는다. 50부의 3분의 1일이 지났을 때쯤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여주고 거의 절반에 왔을 때 고수로 수장이 된다. 장무기는 선하고 여리고 잘 속고 좀 맹한 곳이 있는데 운이 좋아 죽기 직전마다 고수가 되는 내공과 무술을 쌓고, 심지어 허준처럼 의술도 단번에 익힌다. 해리포터처럼 친근하고 평범해 보이는 가운데 심성이 선하고 굉장한 무공을 갖추었지만 자만하지 않는다. 귀족보다는 하인처럼 행세하는 게 친숙해 보일 정도로 중국 문학의 주인공 치고는 좀 독특하다.
아직 다 보지 못했지만 김용의 <의천도룡기>가 말하는 의미는 무림의 고수인 능력자이어도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장무기는 실력은 높지만 권력의 심장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절대 무공을 가졌어도 세상의 복잡함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해 간다. 계속 일은 틀어지고 평화보다는 분쟁이 이어진다. 혼자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책 제목처럼 <하마터면 열정적으로 살 뻔했다>가 떠올랐다. 부모의 죽음에 놓인 인생을 시작하자마자 현명신장(玄冥神掌)을 맞고 단명할 운명에서 우연히 화타 같은 의원을 만나 구제되고 구양신공을 익혀 자신의 병을 물리치지만, 명교의 임시 교주가 되었어도 열정만으로는 세상을 구제하지는 못한다. 고수인 그에게도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한 사람의 뛰어난 실력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 사람이 사라지면 사분오열이 되고 중요한 이상과 가치는 서로의 욕심과 자존심으로 엉망이 된다. 열정적으로 살기보다 나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사는지 돌아보는 게, 의천도룡기를 보며 떠오른 결론이다.
신필이라 불리는 김용의 상상력이 부럽다. 타이베이국제도서전에 갔을 때 김용의 전시 부스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의 자필 원고를 본 적이 있다. 왜 그를 신봉하는지 의천도룡기 한 작품만 드라마로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은 상상력이 출중한 사회일까? 좌와 우로 세대와 세대로 나뉘어 극심하게 반목하고 충돌하는 현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