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으로 발견되는 사랑의 의미
<레이디 버드> 브런치무비패스로 3월 23일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감상했다.
사전 정보 없이 시사회에 달려갔다. 나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지 않고 맨 뇌로 부딪쳐 감상하는 편이다. 친한 영화평론가 최은의 페북에서 "보이후드의 레이디 버전"이라고 표현한 부분만 기억하고, 십 대 여자의 성장기쯤으로 생각했다. 유머와 드라마를 기대했고, 그 부분은 기대 이상이었다. 시사회에는 젊은 여성 관객이 대부분이었다. 남자 작가들의 신청이 적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다른 영화에 비해 관객의 리엑션이 상당히 친절했다. 영화가 끝날 때 박수를 치는 여성들도 꽤 있었다. 간간이 터지는 유머 코드에 대박 웃음을 날려 주는 마음씨 좋은 관객들이다. 그 마음씨는 취향 저격이자 자신의 기억에 대한 공감대였단 생각이 든다.
영화는 억지로 웃기려 하지 않았다. 왜 장르가 코미디인지 모르겠다. 관객 자신이 십 대 시절 엄마와 벌인 사랑과 전쟁을 자연스럽게 재현해 빨려 들게 하는 매력에 웃음이 곳곳에 배치돼 있긴 했다. 그러나 와서 웃고 가라는 영화가 결코 아니다. 마지막에 엄마를 이해하고 자신이 지긋지긋하게 떠나고 싶던 고향 새크라멘토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는 장면은 한국 영화 특유의 신파와는 차원이 다른 감동을 일으켰다. 엄마와 딸의 삶을 살지 않아 그 감정의 영역을 느끼기에 한계가 있었어도, 내 존재 가치를 발견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지점에서 느낀 모성애와 고향의 그리움 때문에 뭉클했다.
돈 벌고 십 대 아이 키우느라 힘든 두 중년 남자가 보기에 난감한 영화이긴 하다. 초반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둘 다 몹시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맞은 불금이라 감상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바로 잠들 태세를 갖추고 시사회에 들어갔다. 그런데 초반에 눈을 감고 있던 친구와 달리 나는 집중해서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내용에 대한 이해는 잠시 졸던 친구가 더 속속들이 하고 있었다. 미국 출장이 잦은 친구에게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 뉴욕 등의 지리적 경험은 레이디 버드의 선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레이디 버드가 합격한 대학의 수준과 위치, 엄마가 왜 딸이 뉴욕이 아닌 새크라멘토의 학비 저렴한 UC데이비스(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에 진학하길 원하는지, 딸은 왜 엄마의 뜻을 무시하고 멀리 대기자 번호에 든 뉴욕 콜롬비아대학에 가려 하는지 등.
자, 70년생 중년 남자 둘이 83년생 그레타 거윅이 배우 생활을 하다가 감독 겸업해 데뷔작으로 내놓은 여자여자한 성장기 영화에 얼마나 공감했을까? 주연인 시얼샤 로넌에 대한 매력도 모른 채 도대체 무슨 영화인지 한번 겪어 보자고 피곤한 몸을 던졌는데...
영화 시작과 동시에 엄마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17세 딸은 엄마의 잔소리에 저항한다. 조수석에서 쉬지 않고 말다툼을 하면서 상대방의 얘기는 듣지 않고 자기 얘기만 하는데도 서로 콕콕 찌르는 말들을 다 듣고 있다. 같은 레퍼토리로 계속 싸웠을 테지만, 그렇게 말하기와 듣기가 멀티로 된다는 게 신기했다. 잔소리는 한국 엄마와 다를 게 없다는 걸 체득하며 좀 따분한 기분이 들 때 갑자기 딸이 차에서 뛰어내려 버린다. 얼마나 엄마 잔소리가 싫으면 달리는 차에서 문 열고 뛰어내릴까! 이름도 부모가 붙여준 대로 쓰지 않고 레이디 버드라고 자신이 붙여서 이걸로 불러달란다. 이 딸의 성질머리 보통이 아니다.
이후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의 거짓말, 질투, 유유상종, 멸시, 분노, 절망, 탈출, 자기 위장, 독립 욕구가 펼쳐진다. 규칙이 많은 천주교 고등학교, 듣보잡인 시골 새크라멘토의 철길 옆 후진 동네에 사는 가난, 우울증에다 실업자인 아빠, 인종이 다른 입양 오빠, 그 오빠의 여자 친구... 그녀에겐 빨리 성인이 되어 집을 탈출하고 싶은 동기가 충분하다. 이 모든 상황에서 생활고를 해결하며 딸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하는 자책에 잔소리쟁이가 된 엄마에게도 동화가 된다.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인 할머니에게 자라서 딸에게만큼은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딸의 소원은 '오직 떠남'이다. 이 영화는 떠남을 준비하고 완성했다가 그토록 싫어한 자기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과정으로 끝맺는다. 대학에 가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새크라멘토 출신임을 속이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다고 말하는 그녀의 정서에 그리움이 충돌할 때도 절절하게 동화된다.
<레이디 버드>는 10대 소녀의 성장기이자 탈출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불완전한 인물들이 촘촘하게 압박하고 묘하게 어우러지는 공간에서 내가 취하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첫 관계의 순결주의, 자기 정체성 부인, 진정한 친구의 의미, 인종 차별, 가족의 구성, 911 테러 이후의 불안, 딸에게 보낸 러브레터, 떠남의 정서 등이 공감과 유머로 다가오다가 제자리로 돌아감에 대한 향수로 맺는다. 성적을 조작하고, 선생님을 모욕하고, 남자에게 꽂히고 상처 입으면서, 18세가 되자마자 성인에게 열려 있는 행위로 직행한다. 엄마의 마음과 반대로 행동하면서도 엄마와 소원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 사랑의 온도는 떠나고서야 제대로 느끼게 된다.
자신과 주변 환경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레이디 버드는 원한 대로 뉴욕에 가서야 부모가 붙여준 이름 크리스틴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거부했던 이름도 엄마도 새크라멘토라는 시골도 소중한 의미임을 발견한 것이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말 안 듣고 싸우고 투정하고 죽고 싶고 미워하고 다시 돌아오는 십 대의 이야기가 세계 공통의 일상임을 세밀하게 묘사해 주었다. 사랑의 깊이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 계속되고 있었고, 성장해야만 재발견할 수 있는 사실 또한 은근한 감동으로 전달해 주었다. 이 독특한 십 대 여자의 성장기에 다른 영화와는 결이 다른 웃음을 터뜨리고 박수를 칠 만한 장치가 곳곳에 스며 있다.
떠남으로 존재의 가치를 얻으려는 크리스틴의 소원은, 사회적 지위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남자들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십 대 여자가 스스로의 삶을 불행하게 여기는 것과 이 땅의 남자들이 불쌍해지는 건 존재 확인 방식 때문이다. '탈출하는 것'과 '사회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것'은 존재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것들로 자신을 확인하다가는 실패와 후회가 남는다. 나를 확인해야 하는 그 대상이 쉽게 사라지는 것에 매여 있다면 그 자체는 불행이다. 내가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고, 그저 탈출하고 사회적 위치를 얻고 살아가려는 우리들에게 무엇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 것이 <레이디 버드>를 본 뒤의 상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