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숙적이어도 용서와 이해가 가능하다
브런치무비패스로 초청받은 네 번째 작품, <몬태나>.
원제는 <Hostiles>로 우리는 모두 적대자란 뜻이다. 한국에서는 크리스찬 베일이 이끄는 정예군대의 목적지인 몬태나를 제목으로 하면서 부제에 원제의 문장을 붙였다. 몬태나는 인디언들이 많이 사는 북서부의 주이며 로버트 레드포드,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가을의 전설>의 배경이다.
영화 도입부에 영국의 소설가 D. H. 로렌스(1885~1930)의 문장이 등장한다. “미국 영혼의 본질은 억세고 고독하며 초연하고 살의에 찼다. 그건 지금까지 그대로 뭉쳐 있다” 억셈, 살의, 여전히 뭉쳐 있다는 표현에서 미국 역사의 무겁고 어두운 겹이 암시된다.
미국 초창기 역사에 대한 감정이입은 토착민인 인디언들에게 향해 있을 수밖에 없다. 멀쩡히 잘 살고 있는 그들의 땅을 갑자기 침탈해 온 백인들은 증오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정중히 같이 살기를 요청하기보다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인디언의 땅을 총으로 빼앗고 군대로 짓밟기까지 한 잔혹한 욕망의 역사였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몰아넣고 분리하는 것 자체가 모욕이다.
서부극에서 인디언들은 조연 아니면 악역을 맡거나 백인 편에서 싸우곤 한다. 2016년 개봉한 <매그니피센트 7>처럼 덴젤 워싱턴과 이병헌을 넣어 흑인과 동양인을 세운 퓨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멋진 캐릭터는 백인들이 도맡았다. 테렌스 힐의 매력에 푹 빠져서 본 <내 이름은 튜니티> 시리즈나 <장고> 같은 총잡이 영화들에서 백인들은 뻔뻔하게 터를 잡고 자기네들끼리 싸운다. 이런 클리셰에 신선한 충격을 준 영화는 <늑대와 함께 춤을>(1990)이었다. 그 당시 캐빈 코스트너는 감성적이고 천재적인 클린맨이었지만, 그 이미지가 지속되지는 못했다. 웨스턴물로 <늑대와 함께 춤을>은 내가 본 최초의 백인 침략사에 대한 회개문이었다. 1992년 개봉한 <라스트 모히칸>도 인디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는 액션 활극일 뿐이었다.
<몬태나>는 증오와 연민 그리고 용서를 다룬 우직하고 숨 막히는 웨스턴 물이다. 미국 역사를 가져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면서 왜 증오하고 그 미움의 대상과 자신의 정의는 무엇을 향해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아메리카 대륙을 침탈한 가해자들의 반성문이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내 주변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일깨운다. 이처럼 이성적으로 역사를 다루고 예술적인 상상력을 덧입힌 영화는 드물지 않을까. 1000마일(대략 1,610킬로미터)을 이동하며 증오가 죄책감으로 그리고 연민으로 바뀌는 과정을 숨죽이고 지켜보게 만든다. 이야기 흐름은 매우 섬세하고 각각의 캐릭터들이 상징하는 의미는 뚜렷하여 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숨쉬기 어려울 만큼의 화해와 상실감의 이야기는 때론 나의 죄책감을 떠올리고 내려놓지 못한 분노와 트라우마에 대해 말을 건네기도 한다.
크리스찬 베일이 멋지게 돌아왔다. 몸무게를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하며 연기 천재인 그에게 전설적인 대위 조셉 블로커 역은 잘 어울렸다. 수많은 인디언들을 잔혹하게 죽인 인물이라지만 영화 장면에서 그는 신사적이고 정의로운 편이다. 극단적인 인디언들에게 가족을 잔혹하게 잃은 로잘리 퀘이트 부인(로자먼드 파이크 분)을 따뜻하게 배려하고 도울 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좌한 흑인 부하를 인간적으로 대우해 준다. 그에게 증오의 대상이자 원수인 옐로우 호크 추장을 포로가 아닌 가족으로 대접하고 그의 죽음과 명예를 지켜주기까지 한다. 블로커 대위와 호크 추장, 두 대척점의 인물이 실제로 잔혹하게 살상을 했는지는 대사로만 나온다. 둘다 품위가 있고, 공동의 적을 향해서는 헌신적으로 맞서 싸우고 희생과 상실 앞에서는 진심으로 애도한다.
전역을 앞두었고 인디언들과 더 이상의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은 블로커 대위에게 임무가 떨어진다. 자신에게는 증오의 대상인 호크 추장과 그의 가족을 고향으로 데려다 주라는 명령이다. 그는 왜 원수인 추장을 부하들을 인솔해 1000마일의 위험한 길을 경호하며 가야 하는지 동의할 수 없지만,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 온몸에 암이 퍼져 죽음을 앞둔 호크 추장을 초반에는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지만, 점차 서로가 겪은 살상과 상처, 상실감의 공통분모를 안고 위기를 극복하며 손을 잡는다. 그 과정에서 극단적인 인디언 게릴라들에게 온 가족을 잃은 로잘리 퀘이드 부인을 만나고 그녀의 상실감을 위로하면서 양쪽 모두 무엇 때문에 증오하고 있는지를 대상화하고 대면해 간다.
블로커 대위, 호크 추장, 퀘이드 부인 모두 뚜렷한 특징을 가진 인물이며 훌륭한 연기력으로 최고의 몰임감을 선사한다. 모두가 고단함과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 상처는 상처를 연결하여 마음을 이어주고 아픔을 보듬으면서 몬태나까지 1000마일의 위험지역을 통과해 간다. 완충 역할은 극도의 고통을 겪은 퀘이드 부인과 추장의 가족이 한다. 그들은 불가항력의 상실과 아픔을 지니고 이동해 가면서 보호를 받고 있다. 거친 총격에 하나 둘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것이 증오의 꺼져감이기도 하다. 블로커 대위가 적대자로 삼은 인디언은 1000마일의 위험지역에서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모피 사냥꾼과 몬태나의 땅 주인을 자처한 백인들이 더 위협적인 적으로 등장한다. 그 무법자 백인들로부터 부하와 추장 가족을 지켜야 하는 모순에 빠진 블로커 대위는 이 지긋지긋한 침략 전쟁에서 증오는 사라지고 죄책감만 남는 인물로 변해 간다. 그 변화는 욕망의 도구에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모피 사냥꾼들에게 납치 당한 퀘이드 부인과 추장 가족을 구출한 뒤 블로커 대위의 오랜 친구인 상사는 전쟁으로 쌓인 우울증에 자살을 암시하기 전에 뜻밖의 행동을 한다. 자신이 가진 소중한 담배 한 개비를 추장의 천막 앞에 놓으며 우리가 당신들 땅을 침탈해서 미안하다고 우리 죄가 크다고 사과한다. 이성적이면서 정직한 고백을 한 그를 통해 감독은 백인들이 사죄해야 할 당위성을 부여한다. 이 장면은 뭉클하고 여운이 짙다. 그는 일찍부터 살인이 익숙한 자였다. 비인간적인 행동의 연속은 정신장애를 일으키고 그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정직한 회개밖에 없다. 셀프용서가 아닌 피해자에게 찾아가 구하는 용서 말이다.
로자먼드 파이크는 니콜 키드먼의 젊었을 때 모습과 흡사한 순수 매력을 지녔다. 극 초반에 남편과 자식 셋을 자기 손으로 묻는 상실감의 모성애를 애절하게 표현했다. 마지막에 떠나는 블로커 대위를 향해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전해 줄 때 상처 입은 치유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인디언 추장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를 자신의 딸로 입양한 모습에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의미를 암시해 주었는데 그 마지막 장면은 숨을 쉬기 어려웠다. 용서와 화해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를 전해주면서 크리스찬 베일의 표정과 마지막 행동이 압권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중 최고를 꼽으라면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몬태나>를 뛰어넘을 작품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좌와 우가, 젋은이와 노인이, 기득권과 비기득권이, 그리고 남과 여가 예민하게 대립하고 각자의 확고한 사고로 소통은 단절돼 가는 한국 사회에 <몬태나>가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하고 예리하다. 가슴이 답답해지지만, 그 답답함은 영화가 던져 준 미국 역사에 대한 울림이기보다 여전히 화해할 수 없는 미움을 그저 묻어두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자기 인식 때문이다. 조롱과 수치, 두려움을 껴안고 살아가는 자아와 인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