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구두도 사람이 들지 않으면 고장 나고 허물어진다
2012년 하반기에 다닌 출판사는 정장을 고수하는 회사였다.
당시 대학 시절 졸업사진 찍을 때 샀던 16년 된 구두 한 켤레로 출퇴근하다가 하나를 더 장만했다.
에나맬 소재로 광택이 좋은 구두였지만, 발볼러인 내게는 맞지 않아 늘 새끼발가락 통증을 안겨주었다. 몇 달 신어도 구두가 내 발에 맞게 늘어나지 않아 강연 때만 신어 왔다. 내가 스타 강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 구두 하나로 충분했고, 작년에는 그나마 세 군데 강연밖에 하지 않았기에 신발장에서 자리만 차지한 구두였다.
주일날 교회에서 맡은 게 있어서 강연 코디로 입고 이 구두를 꺼내 신었는데 이상하게 왼쪽이 뒤틀리는 느낌이 있었다. 신경 쓰지 않고 주일의 모든 순서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 순간 왼발 구두가 푹 내려앉는 느낌에 살펴보니 뒤축이 완전히 상해 있었다. 오른쪽 구두도 뒤축 접합 부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도 모르고 신고 있었다니..
어제 AS를 맡겨보려고 매장을 찾아갔다.
안양역 L백화점이 타사 쇼핑몰로 바뀌고 이 구두 매장이 사라져 다른 아웃렛 매장에 갔는데 사람들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코로나 19가 쇼핑몰을 완전히 시들어가게 하고 있는 현실이 느껴졌다.
매장 주인은 의자에 앉아 무거운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그래도 손님이라고 내가 들어서자 신기한 얼굴로 반긴다(물론 서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AS 때문에 왔다고 구두 상태를 보여드리니 바닥을 모두 교체하는 식의 수선이 가능하다고, 구둣방에 가지 않고 잘 가져왔다고 말해 주셨다. 수선은 유료이고 5만 원이라고 한다.
순간 5만 원을 주고 밑창을 갈아 계속 신을까, 아니면 다른 정장 구두 하나가 있으니 굳이 발 아픈 이 에나멜 구두를 5만 원이나(!) 주고 수선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수선을 포기했다.
언제 형편이 좋아질지 모르지만 내 발에 맞는 새 구두를 사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
집에 들고 오며 두 가지 생각이 오갔다.
코로나 19가 장기화되면 정말 타격이 크겠구나, 어쩌면 IMF 상황의 반복일지 모르겠다는 우려가 들었다. 임대료 지불하며 장사하는 가게 주인들의 하루하루가 걱정이다.
또 하나는 신발은 오랫동안 안 쓰면 멀쩡했던 밑창이 저절로 상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자주 움직이고 사용해야 하는 몸과 생각을 그대로 보관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사람과 소통해야 하는 부분, 용서를 구해야 하는 부분, 자제해야 하는 부분, 그리고 열심히 움직여야 하는 몸의 근육, 생각의 근육들. 그대로 어딘가 보관만 해두어 다시 꺼내 써야 할 때 쓸모를 이미 상실한 상태가 되는 거 아닌지.
일단 신발장에 보관했다가 생각이 바뀌면 수선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구두를 버렸다.
버려야 할 생각도 버리고 싶다. 혼자서 떠올리며 나를 갉아먹는 안 좋은 기억들,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데 혼자서 분노하고 있는 과거의 어떤 상황들, 나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낮은 자아상의 찌꺼기들 모두.
오늘도 집에서 꼼짝하지 않고 일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사람을 편하게 만나서 수다를 떨고 싶다.
사람을 편하게 만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현실인가.
집도 구두도 사람이 들지 않으면 고장 나고 허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