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마지막 순간, 자부심의 허망함
항생제를 끊은 6월 첫 주부터 죽음이란 과정에 대해 가까이 묵상하고 있다.
결국 6월 내내 무겁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지내다 7월을 맞이했고 벌써 2주가 흘렀다.
오늘 어머니는 강직이 심하고 약간의 경련도 계속됐다. 최근 쇼크로 입술을 깊이 깨물어 입안에 피가 흥건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그때 바로 내게 전화하지 않은 건 돌아가실 만큼 위독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 손톱을 깎아드렸다. 어쩌면 마지막 손톱 정리가 될지 모르겠단 생각을 하면서 손톱 밑살을 더 조심히 정리했다. 하나하나 어머니와의 관계로 쌓아 올린 경험들이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마음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왜 죽음이란 과정에는 큰 고통이 따를까. 창세기의 에녹은 얼마나 행복한 마지막이었을까. 제발 큰 고통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큰 욕심이란 것을 잘 안다.
2004년 가을에 한 대형 교회의 병원봉사팀에 초대받아 강의한 적 있다. 기도회까지 마치고 담당 목사님과 식사도 함께했는데 그 자리에 아기를 안고 온 젊은 여자분이 합석했다. 아버지가 뇌질환으로 병원에 계신지 8개월쯤 됐고 한 달에 한 번 면회한다고 하며 자신의 고민을 내게 나누었다. 그분은 아버지가 왜 안 돌아가시는지 모르겠다며 갑자기 대성통곡했다. 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숙연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목사님이 개입하시며 "자매님, 일단 마음의 고통을 하나님이 잘 씻어주시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위로하셨다. 나는 속으로 이제 겨우 발병한 지 8개월이고, 고작 한 달에 한 번 들여다보면서 왜 그렇게 울며 힘들어할까, 생각했다.
그때 나는 아직 사회생활하기 전이었고 어머니를 집에서 8년 동안 간호하면서 자부심 비슷한 것도 있었다. 그 자부심이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내게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것을 끝이 보이지 않는 간병을 계속하면서 알아갔다. 자부심은 내 경험이 없는 사람을 판단하게 하고 이해보다는 나를 드러내게 하며 상대를 미천하게 바라보는 부작용이 따른다.
지금 나는 어머니 간병의 20년, 그 마지막 시간을 겪으면서 자부심 따위 다 사라졌다. 내가 안다는 것 잘한다는 것이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만 50세가 되기 전인 젊은 엄마의 갑작스러운 고통을 곁에서 덜어드리고 지켜오며 감당한 20년의 세월이 죄송하기만 하다. 후회는 하지 않지만 자부심 남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늘 낯설고 끊이지 않은 고통을 다루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이 낯선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혼돈 속을 걷고 있다. 광야에서 쫓기는 다윗도 되어 보고, 가족과 재산을 다 잃은 욥도 되어 보지만 내 피부에 와 닿는 것은 덥고 습하고 고독한 공기뿐이다.
2017.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