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해 내고 있다는 자존감
7월 중순이 이렇게 더웠던가.
병실 에어컨이 고장 나 선풍기 바람으로 땀을 식히기엔 역부족이다. 거의 열대의 습도와 공기다.
어머니를 보자 한눈에 더워서 고생하시는 표정이 감지돼 탈의시키고 미지근한 물에 수건을 적셔 전신을 닦아가며 피부를 시원하게 해드렸다. 체온은 바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손발톱을 정리해 드리는데 손톱 밑에 불룩하게 올라와 있는 살(손을 조금도 쓰지 못하는 환자의 손톱을 깎을 때 이 살을 베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손발톱 정리는 눈이 침침하신 간병사께 내가 맡기지 못하는 것들 중 하나다)을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조심하는 동안 내 시력도 많이 저하된 걸 알았다. 네일 아트 수준으로 둥글고 가지런히 깎던 실력이 모두 달아났다.
간호용으로 준비해 간 셔츠가 완전히 젖을 만큼 힘을 썼다. 얼굴, 손, 발의 각질도 제거하고 설사를 계속하고 계셔서 약해진 엉덩이 피부도 맑게 하며 침상 케어를 하는 동안 체력이 바닥났다. 허나 아기 얼굴로 주무시는 표정이 돌아오니 내 얼굴에도 아빠미소가 번진다.
이런 끝없는 반복적 고통, 힘들다.
단 10분도 곁을 벗어나지 않고 주야로 간호하며 보낸 8년의 내 청춘기는 돌아보면 쉬웠다. 희생이 아닌 인생의 발견이었고, 고통보다는 내가 감당해 내고 있다는 자족감, 자존감의 향연이었다.
20년째가 되니 간호하는 시간에 힘을 쏟고 기도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주께 의존하며 견디는 것에 자족감, 자존감을 누리는 게 쉽지 않다. 식물인간이라도 살아만 계신다면 좋겠다는 사람들 얘기를 종종 듣는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단선적인 생각임으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만큼 마음 공간이 넉넉해졌지만, 내가 견디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이 시간과 공간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그 얘기를 듣는 당사자인 나는 끔찍하게 들린다.
그렇게 많은 세월, 여러 일을 겪으며 참아왔어도 마음의 고통은 숙달되거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마라톤을 완주한 것 같은 힘을 쏟아낸 간호를 마치고 나오면서 어머닌 얼마나 힘드실까, 무거운 생각이 줄지 않는다. 식을 수 없는 사랑이 이런 가족의 책임감으로 내 이성과 감성에 각인돼 있다.
내가 기쁨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견디는 비결이다. 무거운 채로 가볍게 일어설 수 있는 힘! 나는 믿음의 본질인 의존성에서 그 일체의 비결을 배운다. 끝도 없는 병원비, 체력 부담, 가족 부양, 그리고 내가 없는 병실에서 어머니를 돌보는 의료진과 간병사를 신뢰하는 것 모두 의존력에 달려 있다. 주께 의존하고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일상으로 돌아간다.
2016.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