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인생을 시작한 날을 돌아보다
내 생일보다 더 기억나는 날짜가 오늘 11월 27일이다.
그날로부터 23년이 흘렀다.
1997년 11월 27일은 IMF가 터진 지 닷새 정도 흘렀을 때다. 대학 4학년 말이었던 나는 졸업작품과 졸업논문 통과되고 마지막 시험만 앞두고 있었다. 며칠 전 대학원 입학 면접도 마쳐서 진로도 결정해 놓고 연구실에 내 자리도 정해졌다. 졸업시험을 두어 개 치렀을 때였던 것 같다.
금요일이던 그날 밤 동대문 광장시장에 일하러 가신 어머니(당시 엄마의 출근시간은 밤 10시였다)가 갑자기 머리가 심하게 아파서 백병원에 가신 뒤 응급실에서 의식을 잃으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큰일 아니기를 바라며 택시 타고 달려간 뒤부터 엄청난 고통에 휘말렸다. 백병원 응급실 상황은 아주 엉망이었고, 나타나지 않는 의사를 한참 기다리다 이미 골든타임이 무너진 채로 한양대병원으로, 다시 혜민병원으로 옮겨 다니며 간신히 수술한 뒤 엄마는 식물상태의 중환자가 되셨다.
이듬해 대학원 입학은 했지만 바로 휴학하고 엄마를 경희대병원으로 옮겨 6개월여 병간호하다가 의학적으로는 사망과 다름없는 판정을 받고 서울대병원 신경외과에서도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선고를 받은 뒤 집으로 모시고 와서 중환자 간호를 직접 공부해서 하루하루 돌보기 시작했다.
8년이 지나 내가 간호해 간 일기를 모은 책이 나왔고 언론에서는 식물상태의 중환자 엄마를 돌보는 청년으로 화제가 되어 여기저기 출연 섭외를 받았다. 그때 거절한 프로그램이 적당히 수락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이런 일로 유명해지고 싶지도 방송 출연하며 시달리고 싶지도 않았다. 당시 인간극장 외주사가 3개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세 군데서 따로따로 계속 섭외 전화가 왔다.
2004년 7월, 내 책과 같은 출판사에서 거의 동시에 나온 책이 같이 화제가 됐다. 민사고 졸업하고 하버드대에 진학한 젊은 저자의 공부법 책이다. 매체 인터뷰를 하고 나면 꼭 나와 앞뒤 지면에 실리곤 했다. 그 책은 단숨에 50쇄를 넘기며 공부의 신과 같은 책들이 범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내심 내 책에 대한 기대도 했지만, 내가 마케팅에 소극적이기도 했고 그런 소구력 높은 내용도 아니었기에 <어머니는 소풍 중>은 3쇄까지 올라가다가 멈췄다(후에 8쇄 정도까지 달리다가 내가 출판사 창업하며 절판시켰다).
내가 쓴 책으로는 돈을 벌지 못했지만, 책을 읽어준 대기업 CEO의 눈에 띄어 취직을 해서 홍보팀에 특채되었다. 그 회사에서의 5년 근무가, 집에서 24시간을 병간호에 매달리며 청춘의 시기를 보낸 나를 사회인으로 성장시켜 주었다. 대기업 특유의 독특한 문화 때문에 당혹스러운 경험도 있었지만, 5년 근무 후 여러 회사를 겪어보니 첫 직장이 가장 괜찮은 곳에 속했다. 근무와 병간호를 병행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월급도 가장 괜찮았다.
1997년 11월 27일 후 23년이 흘렀다. 3년 전 가을에 어머니 소천하시기까지 고통스럽기도 아름답기도 했다. 어떻게 견뎌냈는지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병간호하고 병원비 마련하면서 살아냈는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고단하고 고립감도 컸다. 병간호를 안 한 지 3년이 흘렀어도 종종 어색하다. 아직도 이번 달 병원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하는 기분에 빠진다. 지난 3년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계속 힘들었지만, 일하고 가정 꾸리고 병원 오가며 간호할 때보다는 편했다.
나는 인기 강사도 아니고 스타 저자도 아니다. 그래도 근근이 버티면서 최저점의 고통까지는 내려가지 않았다. 요즘처럼 코로나로 어려울 때 내가 자주 강단에 초청받던 강사가 아니고, 지난 3년간 아주 적은 수입으로도 살아온 경험이 오히려 코로나 블루의 정신적 백신이 됐다. 적은 수입으로 많은 지출을 견디며 산 것이 내 인생의 선물이고 감사다.
청년기 때부터 독특한 고통과 함께 살며 큰 성공이 없다 보니, 좌절과 낙심이 계속 밀려와도 산책 한 번 하고 푸샵 몇 개 하면 견딜 힘이 생긴다. 강사 페이는 원래 어쩌다 한두 번 들어오는 것이고, 사회적기업 창업하면서 2년 가까이 말도 안 되는 수입으로도 버텨냈기에 불안한 내일이 두려워도 오늘 하루 행복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에 도달한다. 그래서 결과론적으로 성공이 없어서 불행하지 않다는 논리도 가능해진다.
내 인생을 전환시킨 두 번째 생일과 같은 오늘을 맞을 때마다 생각나는 두 친구가 있다. 집에서 어머니 간호하던 그 오랜 시기에 필요한 약과 영양제를 무한 공급해 준 약사 김대현의 결혼기념일이 오늘이다. 그리고 매달 어머니 처방전을 끊어주며 열 감기와 폐렴으로 몇 번 위독하셨을 때 우리 집에 찾아와 어머니께 직접 수액을 놔주던 닥터 윤선정의 생일이 오늘이다. 그래서 매년 오늘이 오면 두 친구에게 축하를 전한다.
청년기 때부터 만나온 소중한 두 친구의 기념일을 축하하며, 오늘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덤덤하게 재택근무하며 보내고 있다. 아니, 더 열심히 일해서 정신을 쏙 빼놓고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