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곤과 파레르곤
여행을 갈 수 없는 팬데믹 시국이 길어지다 보니 지금만큼 여행에 대한 욕구가 높은 적이 있었나 싶다. 답답함, 우울함이 치밀어 오를 때 한국을 잠시 떠나 맛보는 이국적인 분위기만큼 위로가 되는 게 없다는 것을 늦깎이 여행자로 겪어 보았다. 급기야 어젯밤 구글 포토에 자동 저장된 여행 사진들을 열어보며 대리만족을 구하기까지 했다.
사진을 열어보다가 인상 깊은 기억이 떠오른다. 2017년 12월에 떠난 첫 해외 여행지인 도쿄에서의 첫날, 도쿄도미술관에서 열린 ‘빈센트 반 고흐와 재팬’ 전시회를 관람했다. 고흐의 작품을 보다가 어느 순간 내 시선은 회화의 액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림도 훌륭했지만, 고흐의 그림을 돋보이게 해주는 액자 또한 아름답고 숭고한 작품으로 보였다.
마찬가지로 2019년 10월 첫 유럽 여행지인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생가에 방문했을 때 전시된 여러 그림을 보다가도 내 시선은 액자를 주목하곤 했다. 그림과 함께 유심히 액자의 색감과 화려한 양각 장식을 살펴보았다. 그림마다 다른 액자의 고풍스러움을 보는 맛 또한 깊고 새로웠다.
미학 이론에 에르곤과 파레르곤이 있다.
그림이 에르곤이라면 액자는 파레르곤이다. 칸트는 에르곤을 본질적인 주(主)로 파레르곤을 부수적인 주변으로 말했지만, 근대 이후에는 데리다에 의해 파레르곤이 강조되었다. 에르곤이 내용 자체라면 파레르곤은 여백과 테두리라고 할 수 있다. 경계선쯤으로 설명되는 파레르곤이 중요해졌다는 데서 많은 생각이 든다.
문화를 소비할 때 감독과 배우의 사생활과 상관없이 좋은 연기와 작품으로만 보는 것이 에르곤적 시각이다. 하지만 감독과 배우의 문란하고 무책임한 사생활과 함께 소비하는 것이 파레르곤적 시각이다. 나는 양쪽을 오가면서 보는 편이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작품은 관심이 없고, 이병헌의 연기는 계속 보고 있다. 문화 소비 측면에서는 정답을 규정할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싱어게인 30호 가수가 이재철 목사의 셋째 아들임을 교계에서 유독 열심히 언급했다. 월요일 저녁 본방에서 30호 가수가 이슈가 된 뒤 그 주의 주일날 많은 설교에서 30호 가수가 예화로 언급됐다. 훌륭한 아버지가 잘 키운 아들이라는 파레르곤적 평가가 쏟아졌다. 이재철 목사의 자녀 교육 관련 책이 댓글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30호 가수를 그런 파레르곤 관점에서 보는 게 불편했다. 교회에 여전히 “아버지 뭐 하시노”의 시각이 강하다는 것과 이슈와 성과에 따라 집안까지 높게 평가하는 건 번영신학의 하찮은 틀과 다르지 않다. 잘나 보이면 모든 게 좋아 보이고 지나치게 영웅적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30호 가수에 대해 내가 갖는 파레르곤 관점은 다르다. 30호 가수는 에르곤 관점에서만 그의 노래를 응원할 대상이지, 설교 예화까지 올려 언급할 메디치 가문스러운 대상이 아니다.
정신과 소양을 다루는 콘텐츠는 유의해야 한다. 방송에 종종 나오고 영웅적 작가로 평가받는 모 작가를 나는 그의 문학작품으로 존경해 왔다. 하지만 문학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그의 평소 생활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알게 됐다. 출판인을 자기 글에 빌붙어 살아가는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자신의 요구는 뭐든 들어줘야 하는 낮은 계급에 두며 왕처럼 군림하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이다. 글이 책이 되기까지 협력과 공존이 아닌 하인과 유희의 대상쯤으로 여기는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대 작가는 대왕이라는 권력 공식을 느끼고는 나는 파레르곤 관점에서 그를 한심하게 보게 됐지만 실명을 들어 저격하는 짓은 삼갔다. 어느 해에 서울국제도서전 대형 출판사 부스에서 사인회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파레르곤 관점에서 좋은 인간으로 평가하지 않는 나는 그 출판사까지 사람 보는 눈이 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인회에 길게 늘어선 줄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파레르곤 관점에서 그는 지금도 쓰레기로 자리하고 있다.
파레르곤 관점이 특히 중요한 곳이 기독교다.
신앙이라는 에르곤에 삶이라는 파레르곤이 받쳐주지 않으면 위선적인 농도만큼 쓰레기로 취급받는다. 고흐의 그림이 똥 덩어리 틀에 걸려 있다면 냄새가 나서 관람할 수 없을 것이다. 혹 냄새가 나지 않더라도 누가 위대한 그림으로 보겠는가. 정신적인 영역에서 파레르곤은 경계선이나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을 입증해 주는 실재이다. 한국 교회의 파레르곤이 점점 더 망해가면서 에르곤도 희미해졌다. 사회의 비난을 받으면 이제 사회가 무지하거나 교회가 하는 좋은 일을 못 봐서 그런다고 핑계를 댄다. 교회가 문화 소비만도 못하게 된 것이다.
그 안에서 일하는 기독교 직장으로서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열정페이를 당연하게 제시하고 배우자까지 교회 일에 무급으로 활용하면서도 내보낼 때는 퇴직금도 안 주려 한다. 코로나19 중에 얼마나 많은 부교역자가 갑자기 해고됐는지 종종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교회에 일반 직장보다 나은 파레르곤이 보이지 않는다.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콘텐츠(에르곤)를 어떤 삶의 틀(파레르곤)로 함께 가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특히 기독교 직장의 이름으로 서 있는 집단은 이 어려운 때에 직원 한 명 한 명의 삶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성의를 가지고 소통해야 한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가장 겁나는 것이 나 자신이다. 가족 안에서 내 파레르곤은 눈물만 흐른다. 고흐의 그림을 주셨어도 나는 내걸 수가 없다. 도교도미술관과 괴테 생가에서 본 그림에서 액자를 더 유심히 본 나는 내 삶이라는 파레르곤에 부끄러움뿐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