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04년, 그해 여름

식물인간 어머니 돌본 청년의 이야기

by 황교진

2004년 여름은 유독 더웠다. 그 더위는 내게 설렘과 고단함을 함께 안겨 주었다.

5월 초에 김영사 출판사와 책 출간 계약을 했고 두 달 만에 첫 책 《어머니는 소풍 중》이 나와 서점에 깔리고 있었다. 어머니 간호하며 매일 홈페이지에 쓴 글이 문학 에세이 분야로 엮여 나오던 그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집 부근 프라임서점에 가서 슬쩍슬쩍 바라보았다. 누가 내 책 표지를 만져 주기라도 할까. 사는 사람이 있을까. 멀찌감치 서서 한참을 관찰했다. 유명 출판사에서 편집했지만 출간 전 편집부로부터 대박보다는 공익적 차원의 책이라는 암시를 받았기에 상업적인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그저 신기하고 감사했다.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고 포기한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와서 지난 8년 동안 24시간 철저하고 절실하게 간호한 어머니와의 사랑 이야기가 독자들과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다.


초여름 한낮의 조용한 서점 매대를 빙빙 돌았다. 표지에 있는 내 사진을 누가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겸연쩍었고, 짝사랑하는 대상을 몰래 훔쳐보는 심정으로 슬쩍 이글거리는 눈길을 내 책의 표지에 두다가 집에 돌아왔다. 책이 나와도 어머니의 호흡과 생명을 돌봐온 내 24시간은 똑같았다. 안방을 병실로 꾸며놓고 의사, 간호사, 재활치료사 역할을 하다가 장소만 요양시설로 바뀌었을 뿐 난 온종일 어머니의 안전과 평안을 걱정하며 간호 물품들을 챙겨 어머니 곁에 다녀올 계획을 짜고 숨 고르기를 했다. 2004년 초까지 집에서 간호하던 어머니를, 집을 내놓게 되면서 화곡동의 요양시설에 모셔두고 매일 내가 달려가 씻기고 치료하고 상태가 안정적이 되도록 도왔다. 내 인생은 대학 졸업 순간부터 여전히 마음대로 계획할 수 없었고 집에서 간호하던 때보다 더 마음이 복잡하고 괴로웠다. 요양시설의 케어 수준이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어머니 케어에 대한 내 눈높이를 만족시키는 장기재활병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할 수 없는 것, 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직접 해결해야 했다. 긴 한숨은 마음을 긴장시키고 차분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긴 한숨을 뱉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MBC 화제집중, 일밤 러브하우스, KBS 피플 세상 속으로, 인간극장에서 차례로 출연 요청 연락이 오더니 조선일보에서도 취재 요청이 왔다. 방금 전 외출해서 본 조용한 서점에서의 분위기와 달리 전화기에 불이 났다. 방송 작가에게 어떻게 나를 아시는지 물었다. 지금 연합뉴스 메인화면에 내가 떠 있다고 했다. 컴퓨터를 켜고 들어가 보았더니 큼지막한 배너로 <식물인간 어머니 7년간 돌본 청년의 이야기>가 떠 있었다. 곧 주요 포털사이트 메인 페이지에도 소개되었다.





직업과 연애도 포기한 채 식물인간 상태에 놓인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황교진 씨가 펴낸 사랑의 일기 《어머니는 소풍 중》


<식물인간 어머니 7년간 돌본 청년의 이야기>


(서울=연합뉴스) 이봉석 기자 = 효(孝)가 점점 사라져 가는 요즘, 건축가를 꿈꾸고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던 평범한 20대 청년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그의 인생을 '비범'하게 바꿔놓은 사건이 일어난다. 동대문시장에서 도매상을 하던 어머니가 가게에서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것. 어머니는 병원을 세 번이나 옮긴 끝에 가까스로 수술을 받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식 없이 병상에만 누워 있다.


《어머니는 소풍 중》(김영사刊)은 직업과 연애도 포기한 채 식물인간 상태에 놓인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아들의 사랑일기다.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그의 이름은 황교진(34).


친구들이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는 동안 어느새 30대 중반으로 접어든 저자가 한 일은 오직 어머니 간호였다. 어머니의 유일한 의사이자 간호사인 저자는 어머니에게 드릴 음식의 영양과 열량을 꼼꼼히 따지는 영양사가 되기도 하고, 매일 어머니의 관절과 근육을 풀어주는 물리치료사가 되기도 한다. 두 달에 한 번은 어머니 전속 미용사로도 변한다.


저자의 간호 덕분에 어머니는 의사도 놀랄 정도로 건강한 혈색을 유지하고 있고, 7년 넘게 누워 있는 동안 한 번도 욕창에 걸린 적이 없다.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는데 사고 이후 한동안 끊겼던 생리도 다시 시작했다.

저자는 어머니를 간호하려면 체력이 좋아야 한다며 어머니 곁에서 틈틈이 운동을 했고 지금은 팔 굽혀 펴기 200번도 거뜬히 해낸다. 저자가 다니고 있는 교회 사람들이 그를 '울트라맨'이라고 부를 정도.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휴식도 없이 어머니를 돌볼 수 있느냐"라고 물으면 저자는 짧게 대답한다. "사랑하니까"라고. “어머니가 어린 시절 나를 먹이고 입혔듯이 지금은 반대로 내가 어머니를 돌보는 것뿐”이라고.

올해 초 집이 경매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어려운 상황을 맞으면서 저자는 힘든 결정 끝에 어머니를 한 요양원에 맡겼고, 요즘도 어머니를 돌볼 도구를 배낭에 가득 담은 채 지하철로 왕복 3시간이 걸리는 요양원에 매일 찾아가 어머니를 간호한다. ‘소풍’ 간 어머니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기대하면서.


저자는 책이 나온 뒤에도 자신의 홈페이지(http://ultrakyojin.net)를 통해 일기 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anfour@yna.co.kr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711860



만 34세였던 나는 미디어에 알려진 청년이 되었다. 연합뉴스 메인화면의 내 기사는 무려 나흘 이상 걸려 있었다. 나는 그때 원소스 기사를 생산하는 연합뉴스의 파워를 처음 실감했다. 온라인 뉴스는 모드 연합뉴스의 이 가시를 가져가 소개했다. 주간지, 월간지 기자들도 쉴 새 없이 전화를 했다. 세상의 스폿라이트를 받는 자리는 위험하고 두렵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책임지고 간호한 일이 뭐 그리 큰 일이라고 특종 잡듯이 달려드는지 경황이 없었다. 사실 당시에 대한민국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은 흉흉한 연쇄살인 뉴스가 언론을 도배 중이었다. 아마도 끔찍한 세상이 된 현실에서 그에 반하는 따뜻한 미담을 찾고 있던 중에 김영사에서 릴리스한 내 책의 보도자료가 화제가 된 것 같다. 기독교 신앙으로 견딘 삶이었지만 의식이 없는 식물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청춘의 낭만과 여유를 접고 식사와 수면을 포기하고 몰두해 왔다는 사실이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지인으로부터 내 이름이 포털 검색어 1위에 오래 머물렀다는 얘기도 들었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떨리고 괴로웠다. 조용히 어머니를 간호하며 직업도 연애도 쉼도 갖지 못한 진흙 속 삶이었다가 나를 궁금해하며 이야기해 달라는 카메라와 기자 수첩이 달려드는 북새통이 당황스러웠다. 내게 지난 8년의 일상은 어머니 간호에 최적화하여 잔잔한 물결이었지만, 사람들은 큰 파도로 느끼고 있었다.


가장 처음 연락이 온 MBC <화제집중>에 이틀간 촬영을 허락했다. 정작 본 방송에서는 유쾌하고 다이내믹하게 살아온 우리 모자의 일상이 무겁고 힘겨운 모습으로 나간 데 실망했다. 시청률 높은 KBS <인간극장>과 MBC 예능 <러브하우스>는 세 번을 고사하며 출연에 응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어머니를 돌봐드리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고, '그저 사랑하며 사는' 메시지는 방송이 아닌 삶으로 이어가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생방송 하나 정도는 적합하겠다고 생각한 날, KBS <아침마당> 작가에게 연락이 와서 응했다. 아침 시간에 25분 정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어 떨리기보다는 기대가 되었다.

내가 긴장하지 않도록 다정하고 편안하게 진행해 주신 이금희 아나운서가 어머님이 쓰러지시기 보름 전에 처음 찍은 가족사진이 화면에 나올 때 "저 가족사진 보며 매일 많이 울었겠어요."하셨다. 나는 이 땅에서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마주하지 못할지라도 천국에서 저보다 더 환한 미소로 함께할 어머니를 소망할 수 있는 가족사진을 남겨 주신 것이 보석 같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 이른 아침에 방청객들 모두 많이 우셨고, 나는 유쾌한 일들을 떠올려가며 즐겁게 25분을 채웠다. 눈물은 8년 전에 충분히 흘렸다. 내게 아픈 일상은 보통의 일상이었고 그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별한 눈물을 흘리게끔 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손범수 아나운서가 대본에 없는 질문도 몇 차례 하셨는데 신기하게 어떤 질문을 하실지 예상이라도 한 듯이 적절한 표현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생방송의 기억은 위로와 즐거움이 가득했고, 방송 후 격려도 많이 받았다. 손범수 아나운서는 자신도 크리스천이라며 오늘 방송 아주 잘해 주었다고 악수하셨고, 이금희 아나운서는 방송 작가 통해 내 계좌를 알아내 후원금을 보내주시고 내가 보낸 감사 메일에 일일이 답장해 주실 만큼 따뜻한 인연을 선물하셨다. 지금도 라디오에서 이금희 아나운서 음성이 나오면 삶에 시달리던 피로가 달아난다. 사랑은 그렇게 표현하고 움직이는 데 연속성과 힘이 있다.


꼭 5년 뒤 여름, 나는 아내와 함께 <아침마당>에 토론 패널로 다시 출연했다. 객석에 있던 아내와 함께 이금희 아나운서의 환영을 받았다. 존엄사 관련 토론 끝에 갑자기 이금희 아나운서가 일어나셔서 객석에 있던 아내에게 다가갔다.

"교진 씨가 예전에 총각 때 우리 방송에 나왔는데 이제 결혼을 했다고 해요. 아, 천사가 이렇게 생겼군요. 아내 분은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셨어요?"

마이크를 받은 아내는 당황한 기색을 잠시 보였지만 환하게 웃었다. 사전에 미리 질문이 있을 것을 알았다면 방송국에 같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대본에 없던 생방송에서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만나서 시어머니를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를 얘기했다. 즉흥적인 대답이어서 더 빛이 났다.


2004년 여름은 내 인생에서 슬로슬로가 퀵퀵으로 바뀐 날이다. 책과 함께 대중에게 소개되며 식물인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중환자가 된 사랑하는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리고 생명을 보존하는 데 청춘을 보내고 있는 동시대 인물로 화제가 되었다. 대학원도 연애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 응답이고 선물이었다. 나는 우리 모자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로 중견기업 홍보팀에 특채되어 취직도 했고, 내 인터뷰와 책을 통해 어머니 간호를 돕겠다는 연인을 만나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의 아빠가 되었다. 지난 20년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두 번째 책이면서 그날의 시작과 오늘까지 모든 이야기를 써 보려 한다. 많이 아팠던 그날을 끄집어내기가 몹시 어려웠다. 다시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 6개월 전이다. 마치 태중의 아이를 돌보듯 예민했고 힘겨웠다. 작가가 글을 출산하는 듯한 고통을 체감하며 이 원고를 시작한다. 다음 이야기에 1997년 겨울의 그날,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춥고 끔찍했던 시작을 회고하며 내게 갑자기 다가온 고통과 내 힘만으로는 견딜 수 없던 시간들을 서술하려 한다. 그날을 이야기하기가 너무 어렵다. 하지만 새로움과 감동의 미래를 얻기 위해서는 아팠던 날을 다시 기술할 필요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이 아픔이 광야의 나침반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고통의 껍질을 간신히 깨고 시작한다.




keyword
이전 02화낫지 않아도 기적의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