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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산다
by 황교진 May 04. 2018

라이크 크레이지 Like Crazy

사랑에 관한 공감과 질문,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2011년 영화인데 이렇게 설레고 다음 장면이 궁금하고 공감과 추억에 벅찬 로맨스라니! 왜 지금에서야 정식 개봉됐을까? 2018년 현실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83년생 남자감독 드레이크 도리머스 작품인데 섬세한 여자감독의 영화 이상이다. 내 기억에 남는 로맨스 영화라면 <비포선라이즈>, <사랑이 머무는 풍경> 등인데 이제 <라이크 크레이지>로 대체한다. 호불호가 있을 순 있어도 극호감을 느낀 나 같은 관객에겐 할 말이 많은, 현실 로맨스 영화다.


학생 시절 반하여 먼저 마음을 표현한 여자와 그 여자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편지의 추신에 웃음 지으며 데이트 신청을 받아준 남자. 요즘 말로 콩냥콩냥한 첫 만남이 어떤 로맨스의 시작보다 설레고 감정이입이 잘 된다. 죽었거나 숨어버린 연애세포가 갑자기 활성화되는 이유는 두 사람의 눈빛과 화면의 흔들림 때문이다. 대사보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이 모든 감정을 상대방에게 쏟아붓는 사랑을 풍성하게 표현해 냈다.




제이콥 역의 안톤 옐친,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에서 카일 리스를 맡은 연기 잘하는 미남 배우이다. 2016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자택에서 차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감상했다. 알았다면 이 현실 로맨스 영화에 안톤 옐친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몰입이 방해받았을 것이다. <라이크 크레이지>를 보고 난 뒤 그에 대한 팬심이 생겼다. 흔들리고 질투하고 완전히 소유하고 싶으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소심하고 착한 남자를 잘 표현했다. 무려 제니퍼 로렌스를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는 상대로 걸치는데도 한심하지 않고 착한 남자로 보이게 하는 힘을 가졌다. 영화는 제이콥의 내면과 갈등을 섬세하게 보여 준다. 사실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모든 젊은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 소심함과 열등감이 노출된다. 그 두 가지가 없는 남자는 유부남이거나 사기꾼이다. 여자는 소심하지 않고 당당한 남자 찾다가 속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랑에 미숙한 남자와의 연애는 힘들다. 여자는 이런 남자 때문에 힘들면서도 이를 인정해야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 남자는 결혼 후에야 집중해야 할 가정 때문에 적극적이 되고 자신감을 찾아가곤 한다.


제이콥의 삶에 불쑥 들어온 애나, 영화를 찍을 당시보다 지금 훨씬 많이 알려진 펠리시티 존스가 열연했다. <라이크 크레이지>의 제작진은 주조연 배우 선택에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 모두 지금 엄청난 스타들이다. 애나는 언론인을 꿈꾸며 도발적이고 당당하게 과제 발표를 해낸다. 자신과 달리 뒷자리에서 수업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노트에 뭔가를 그리는 제이콥을 눈여겨본다. 그에게 먼저 데쉬하는 편지에 이상한 여자로 비치지 않길 바란다는 추신을 넣어 전달한다. 영국에서 유학 와서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고 목표도 분명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애나의 세계를 존중하고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격려하는 제이콥(물론 잘 생겼다). 고전 영화 <러브 스토리>의 남자처럼 자상하다. 술을 마시지 않는 제이콥에게 위스키를 맛보게 하고 자신의 습작 노트도 보여주면서 제이콥의 마음을 흔들고 잇는다. 영국에서 딸의 생일 축하를 하러 온 애나의 아빠와 엄마도 제이콥이 마음에 들어 은근히 결혼을 부추긴다.



제이콥은 가구 디자이너다. 세계적인 건축가 중에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의자를 디자인한 사례가 있다. 프랑스의 르 꼬르뷔제, 독일의 미스 반 데르 로헤,  핀란드의 알바 알토 등 거장들은 건축물을 설계하면서 자신만의 구조적 감성으로 의자를 디자인했다. 의자는 가구 중에 개인적 성향이 가장 강하고 주인과 일체를 이루는 소품이다. 제이콥이 의자를 디자인해서 애나에게 선물하는 장면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의 교감 그 자체였다. 의자의 밑쪽을 보라는 제이콥의 말에 애나는 <Like Crazy>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제이콥은 미친 듯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그렇게 감성적으로 전달한다. 로맨스 영화 중에 이처럼 조용한 화면에 다이내믹한 표현은 처음이다. 화면은 뭔가 불안을 예고하는 듯 흔들리지만 순수한 감성과 미세한 떨림의 전달로 몰입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단, 이성적이기만 한 상남자들에게는 몹시 지루한 내용일 수 있다.


애나는 적극적인 만큼 말로 표현하지 않는 표정에 사려 깊은 멈춤의 언어도 담겨 있다. 제이콥을 어느 정도 거리에 두어야 할지 고심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남자의 소심함과 예민함의 수용성은 처음에는 따뜻한 배려로 보이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마음을 더 읽어주고 알아주고 때론 조금 둔감해 주길 바라게 된다. 남자는 여자의 이런 복잡하고 다면적인 마음을 알기 어렵다. 애나의 비자 문제가 갈등의 시초였다. 미치도록 사랑하여 곁에 머물기로 선택한 것이 학생 비자 만료를 지키지 못하게 했고, 영국과 미국의 거리감이 둘의 감정선을 파도처럼 흔들었다. 눈앞의 연인이 멀리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감으로 일상이 공유되지 못할 때 그 미친 사랑을 어떻게 이어갈지 난감하다.





제이콥은 결코 애나에게 먼저 표현하지 않는다. 그의 직장에서 가까이 마주치는 제니퍼 로렌스를 만나면서 애나와의 거리감을 채우지만 선뜻 애나가 말해주기 전에는 달려가지 않는다. 애나가 미국에 입국하기 어려운 장애물이 있는데도 그녀가 "자신에게 당장 오라"는 말을 해주기까지는 영국은 그가 미친 듯이 사랑해서 달려가기 어려운 심리적 장소다. 애나에게서는 의자를 디자인해 준 그 사랑으로 좀더 적극적인 데쉬가 아쉬웠을 텐데, 처음 만남처럼 당돌하게 말해야 하는 역할은 그녀의 몫이다. 그렇다고 제이콥이 애나를 지루해하는 것은 아니다. 소심하고 감성적인 남자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결혼도 결혼생활도 쉽지 않다. 게다가 영국과 미국에서 사랑을 이어간다는 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이 영화를 현실 로맨스로 부른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된다는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애나이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다. 내 의자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으면 불편하고, 의미가 있는 내 의자를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치운다면 더 불편하다. 이 영화가 신선한 까닭은 영국녀, 미국남의 사랑이 꼭 한국의 있을 법한 연인이자, 내 기억 어딘가 묻어둔 첫사랑의 이야기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장거리 연애의 모든 갈등, 절절함, 환희와 고통의 요소가 절묘하게 갖춰져 있다.





'이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발견은 다른 환경이 불쑥 찾아왔을 때다. 자신의 감정이 진실과 거짓의 테스트가 아니라 나를 흔든 사람에 대한 확신을 얻는 여정임을 발견할 때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각자의 삶에서 서로를 정리해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미친 듯이 하는 사랑 또한 이제는 비현실적임을 생각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러다 가슴속에 숨겨두어야 할 그 미친 사랑이 자꾸 고개를 내밀 때 둘 중에 한 사람은 위선을 깨뜨려야 하는 절실함으로 다가서야 한다. 영화에서 애나는 자신이 처음 데이트를 신청하려고 편지를 내민 것처럼 마지막에도 제이콥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낸다. 처음처럼 설레고 눈빛만으로도 넘치는 사랑의 교감으로 환희에 벅찬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은은하게 마주한다.


대사는 별로 없다. 화면은 계속 미세하게 흔들린다. 표정과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숨죽이며 감상하는 내게 이런 질문을 건네온다.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기억 속에 있는 그 누군가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질문이 떠오를 때 영화가 끝나 버린다. 그야말로 끝나 버렸다. 관객들은 이게 뭐야, 할 수 있는 결말이지만 나는 이 결말이 그 어느 영화의 결말보다 의미 있게 말을 걸어 주어 감탄했다. 끝내 주는 결말이 아니라 말을 걸어 주는 결말의 여운에서 조용히 박수를 쳤다. 섬세하고 가슴 떨리고 현실적인 로맨스의 독특한 결말이다.

<라이크 크레이지> 후기를 쓰며 안톤 옐친을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 펠리시티 존스의 아름다움에 푹 빠질 수 있을 뿐더러, <헝거게임>을 찍기 전의 제니퍼 로렌스를 조연으로 감상한 것에 대한 호강에 고마웠다. 히어로 무비의 비현실적 CG로 피곤했다면, 영국과 미국을 여행하며 로맨스를 감상할 수 있는 <라이크 크레이지>의 현실적 감성을 누리길 권해 본다. 내겐 그 어느 영화보다 다이내믹했다. 공감과 설렘과 추억 소환이 곁들여진 풍성한 액션 멜로였다.





제니퍼 로렌스의 이 미소를 받는 남자라니! 크레이지하게 흔들리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제니퍼 로렌스의 샘 역을 설명하면 스포일러가 되기에 절제한다. 제이콥이 샘을 안고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만큼 애나에게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말했어야 했다. 남자가 공감하는 영역이면서 여자들이 한심하게 보는 영역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안톤 옐친의 추모 기사에 의하면 그를 기억할 역대급 작품 5선 중 하나로 <라이크 크레이지>를 꼽았고, 이 영화를 통해 이국적인 외모와 독특한 분위기로 관객의 시선을 강탈했다고 평한다. 미국 USA TODAY 영화 평론가 클라우디아 푸이그는 안톤 옐친의 연기에 대해 “매우 훌륭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의 드레이크 도리머스 감독은 안톤 옐친의 영상을 공유하며 “사랑한다. A”라는 글로 그를 추모했다고.


*브런치무비패스로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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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소풍 중>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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