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서의 사귐

내가 작아질수록 커지는 것이 있음을 알려 준 만남

by 황교진

1.
내가 군 복무 마치고 복학한 1995년, 명일동의 집에서 상도동의 학교까지 버스, 지하철, 다시 버스를 갈아타는 긴 통학 시간에 워크맨은 가장 좋은 친구였다. 그해에 가요는 전람회 1집을 CCM은 김명식 1집을 테이프 늘어지도록 즐겨 들었다.
건축 전공보다 더 열심히 했던 IVF 모임에서 헤어질 때면 <승리>의 가사를 떠올리며 "승리하세요"를, 집에 문제가 있을 때면 <믿음의 가정>을 읊조리며 행복한 가정을 그려보곤 했다. 2006년 봄 내 결혼식에서 우리 교회 바울청년회 축가로 <믿음의 가정>을 부탁했다.
김명식 님과 가까이 대면한 첫날에 이 얘기 나누며 식당에 운전해 가는데 "축가, 나를 부르지 그랬어?" 하시는데 감동이 밀려왔다.

2.
오래전 한국컨티넨탈싱어즈 10주년 기념 음악회로 얼핏 기억한다. 밀알학교(?)에서 뜨겁고 흥겨운 컨티넨탈 단원들의 찬양은 천국 잔치 분위기였다. 어머니 간호를 8년간 집에서 하다가 다시 병원으로 옮겨서 낯선 환경에 부대끼던 내겐 기쁨이 필요했다. 우리 교회 청년 중에 컨티넨탈 단원이 있어 초청돼 갔는데 힘든 시기를 보내던 내게 찬양의 기쁨이 가슴을 뛰게 했다.
춤추는 다윗과 같은 흥이 절정에 오르고 활기와 기쁨이 넘칠 때 김명식 단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무대 중앙에 나타났다. 감기에 걸려 솔로곡 한 곡도 부르지 못해 죄송하다는 인사로 축사를 시작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방금까지의 흥을 깨시는 게 아닌가.

"오늘 이 분위가 우리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중에는 우울증에 자살한 친구도 있고, 결혼하자마자 이혼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내 20대 중반을 울리고 힘을 준 CCM 명반 중 명반의 주인공이 그 시간에 찬물을 끼얹으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 장면이 기억에 박힌 것은 분위기가 아닌 중심에 대한 말씀 때문이다.

2-1.
어머니 간호하던 초기에 교제하던 자매와 헤어졌을 때 깊은 수렁의 슬픔에서 나를 위로하고 건져 올려 준 찬양이 명식 형의 아내인 송미애(Miae Song) 님과의 듀엣 앨범 <있는 모습 그대로> 안에 있는 <재채기하듯이>였다. 이 얘기는 지금 사랑하는 아내와 잘 살고 있어 생략.^^

3.
세월호 사건이 터지던 2014년 4월 초에 나는 투자 약속을 한 동료와 1인 출판사를 창업했다. 창업한 며칠 뒤 그런 큰 참사와 더불어 가게 된 출판은 초기 세팅부터 힘겨웠다. 한편으론 큰 슬픔을 겪는 이웃들을 위로할 기획물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 고심하던 중 김명식 형님(이때쯤 페북 상에서 호형호제하기로 했다)은 유가족들을 위한 음악을 발표했다. 난 명식 형님을 가까이서 뵙고 싶었지만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광화문에서 뵐 수도 있었는데...
<내 친구, 배형규>라는 책을 출간시키고 내 에세이와 함께 형님께 보내드렸다. 그때 명식 형님은 제주 영락교회 청년부 형이던 배형규 목사님과 함께한 빛바랜 사진을 여러 장 찾아 향수의 글로 올려주셨다. 편집자로서 고마운 마음을 넘어 제주도 소년이던 두 분의 우정과 추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4.
어머니 약을 끊기로 한 뒤 가장 괴로운 시즌을 보내고 있던 때에 명식 형님이 "우리 밥 한 번 먹자"는 댓글을 남겨 주셨다. 월요일에 퇴촌에서 만나기로 하고, 간증 일정이 아니면 50킬로미터 이상 거리를 운전해 간 적이 별로 없는 나는 귀한 사역자를 만나는 설렘으로 약속 시간보다 일찍 퇴촌에 도착했다.
캐주얼한 차림에 고운 갈색 머리인 명식 형님이 손을 흔드실 때 마치 대학시절 내내 친하게 교제한 형님 같은 친근감이 밀려왔다. 그의 음악을 3학년, 4학년 내내 듣고 사회생활에서 힘든 순간에 <기나긴 항해를 떠나며> <승리>의 멜로디와 가사를 묵상하곤 했으니 말이다.

5.
백종원 씨가 미디어에서 소개하여 대박을 터트리고 있는 쌀국수 집으로 운전해 가며 형님께 석장의 앨범과 함께한 나만의 추억들을 폭격하듯 쏟아냈다. 조수석에서 연신 "정말?!" 하며 추임새를 넣어 기뻐해 주셨다. 쌀국수를 먹으며 한국컨티넨털싱어즈 10주년 음악회에서의 인상적인 기억을 끄집어냈더니 껄껄 웃으신다.
"그게 김명식 방식이야. 난 메시지보다 분위기에 치중하려는 걸 싫어해."

6.
찻집으로 옮겨 대화를 이어갔다.
벼랑 끝에서 견디고 있는 내게 그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말씀과 경험들을 들려주셨다.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일하심은 기다림과 혼돈인 내게 벼랑 끝에 복이 있다는 고백은 큰 울림을 주었다. 푸른 초장이 아닌 벼랑 끝에서 CCM 사역자들이 함께 힘을 내어 사역할 수 있는 생태적 플랫폼을 고민하는 형님은 영적으로는 푸르지만 현실은 현재 진행의 고통이 있다. 그 점이 내게 진정한 멘토로 다가왔다. 안정적인 위치와 권위에서의 조언이라면 내게 깊은 통찰로 다가오진 않았을 것이다. '안정'과 '권위'를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 세상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콘텐츠를 가지고 있지만 거부하고 '나'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고민하는 형님의 이야기가 언젠가부터 꿈 없이 하루하루 견디는 내 중심을 흔들어 놓았다.

7.
대화가 계속 이어지면서 형님의 작업실로 옮겼다. 적은 월세로도 지낼 수 있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공간에서 우리는 기독교 문화, 일반 콘텐츠의 홍보 도구, 메시지 전달 방식 등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 작업실에서 "그 어떤 상처보다 깊은 예수의 사랑"에 대한 말씀과 비행기를 타고 먹구름을 지나는 동안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태양에 대한 비유, 다양한 빛깔의 꽃이 각각이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인정 비유가 깊이 꽂혀왔다.
끊임없이 영적 감성을 교류하다 보니 여섯 시간이나 흐른지도 몰랐다. 직접적인 접점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음악과 함께한 교류는 20년이 넘었으니까 음악의 힘은 얼마나 대단한가.

8.
"돈이 그렇게 중요한 지 이제 알았니?" 하는 사람들 속에서 "벼랑 끝에서 얻는 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하시는 김명식 형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영적인 단비를 맞으니 가물었던 내 영혼이 촉촉해졌다. 마침 단비가 내린 뒤의 서늘한 바람도 작업실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형님을 부근에 있는 댁에 모셔드리고 나는 일부러 차에서 내려 꼭 허깅했다. 내 차가 사라질 때까지 머무는 형님의 시선에서 예수의 마음으로 험한 파도를 견디고 잘 항해해 가라는 격려와 응원이 느껴졌다.

9.
"첫사랑에서 주께 하듯이, 늘 한결같이, 고마워. 그리 살아줘서!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말고, 잘 살아내길 바래!" 명식 형님이 전해주신 문자 메시지를 가슴에 새긴다.

10.
나는 형님의 귀한 마음이 꼭 성공(!) 했으면 좋겠다.
최고의 콘텐츠를 지니고 있지만 전면에 나서 활용하기보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고, 돈과 인기로 옷 입은 스타가 아닌 진정한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형님이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
이 성공은 조엘 오스틴의 성공, 시크릿의 성공이 아니다. 무시받는 예수의 십자가가 드러나는 일, 돈과 건강한 몸이라는 유사 복음이 아닌 진짜 복음이 전해지고, 외형보다는 영혼이 든든히 지어지게 하는 음악이 전파되는 일, 꿈이 있는 후배 찬양사역자들이 함께 서 가고 <영원한 사귐>과 같은 사귐의 음악이 계속 나올 수 있는 플랫폼이 건설되는 일.
갑자기 나도 성공해서 형님을 돕고 싶어질 만큼 다음 스텝의 내 삶의 본질과 방향을 부여받은 날이었다.

11.
그래서 예수이고 사랑이다.
"벼랑 끝에 선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산상수훈 메시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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