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우리 아빠는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우리 삼 남매를, 지금은 무너지고 없는 ○○ 백화점 안 서점에 데리고 가셨다. 아무 책이나 한 권씩 고르라고 하고 우리를 서점에 풀어놓으면 우리는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 한 권씩 책을 골라 집에 오곤 했다.
지금도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인가 내가 서점에서 골라왔던 책 한 권이 기억난다. 웨인 다이어의 ‘어떻게 살 것인가 한 번뿐인 내 인생’.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딱 하나였다. 어른들이 “너는 벌써 이런 책을 읽니?” 하는 그 말이 듣기 좋아서……. 지금은 생각만 해도 낯 뜨겁지만, 그때 나는 독서에 관한 한 허세 가득한 초등학생이었다.
특별한 일 없는 주말마다 서점에 데려가고, 언니랑 같이 쓰던 우리 방에 책장 가득 책을 채워 주신 엄마·아빠 덕분에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책을 많이 읽는 아이였다.
중고등학교 때는 시험 때 엄마 몰래 문제집 아래 책을 놓고 읽다 혼나기도 하고, 엄마가 자라고 할까 봐 불을 끄고 책상 밑에서 스탠드를 켜 놓고 책을 읽기도 했다.
이때는 정말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었는데, 고전문학, 한국문학, 창작소설, 자서전, 과학 도서, 철학책, 만화책 등 그야말로 잡식성으로 읽었던 것 같다.
그중에 만화책 다음으로 흥미진진했던 게 추리소설이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이때 추리소설이라고는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 애거서 크리스티의 ‘포와로 시리즈’,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가 다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한참 후까지도 세상에 추리소설은 이게 전부인 줄로만 알았다.
회사 생활을 관두고 애들이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집 앞 도서관에 자주 갔었다.
그때는 어린이실에서 동화책을 몇 권씩 쌓아 놓고 애들한테 읽어 줘 가며 우리 애들이 책도 많이 읽고 장차 공부도 잘할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무지갯빛 꿈을 꿨었다.
도서관에 자주 가다 보니 내가 읽을 책도 찾아보게 되고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였다. 제일 처음에 읽었던 책이 아마 ‘아들 도키오’였던 것 같은데, 그 책을 읽고 ‘비밀’, ‘방과 후’, ‘동급생’, '무지개를 연주하는 소년',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등등 2~3년 동안은 줄곧 히가시노 게이고 책만 읽은 것 같다.
결국 거의 매년 나오는 신간을 제외하고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은 빠짐없이 다 읽었다(지금도 신간을 놓칠세라 주기적으로 교보문고 사이트를 뒤져가며 빼놓지 않고 읽는다).
이전까지 내가 읽었던 추리소설은 탐정이 사건을 의뢰받고 증거를 수집하고 추리해서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이 기본 틀이었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시기별로 특징이 다르긴 하지만), 범죄의 동기와 인간의 심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때로는 범인이 사건을 일으키는 동기가 아주 먼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되기도 하는데, 범인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흉포한 범죄를 저지르는 동기도 이해되는 면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사회의 단면을 자주 드러내는 작가이기도 한데, 고령화 사회, 가정 폭력, 입시 경쟁, 범죄자 가족에 대한 차별 등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갈수록 심각해지는 사회 문제들을 작품 속에서 여실히 드러낸다.
게다가 작품의 소재가 얼마나 다양한지, 자연 현상, 물리학이나 화학 관련 트릭, 초능력이나 초자연 현상, 작가가 좋아하는 스포츠인 스키 등등 한 작가가 쓰는 게 맞나 싶게 정말 가지가지다. 혹시나 자료 조사할 문하생이 필요하다면 내가 기꺼이 손들고 싶은데 말이다.
문체가 읽기 쉽고 군더더기 없는 것도 딱 내 취향인데, 이건 최근에 읽고 있는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극명하다.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가 재미있어서 연달아 읽고는 있는데, 서사가 정말 장황해서 정독하기는 좀 힘들다. 대신에 책 두께가 두꺼워서 베고 자기 딱 좋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일어일문학을 전공하고도 전공을 숨겨야 할 정도로 일본어를 못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를 대학교 때만 알았어도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쯤 일본 문학 번역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학교 교수님 중 한 명이 나름 저명한 일본 문학 번역가였는데, 하필 나는 그 과목은 유독 일찍 포기했었다. 이래서 모든 건 타이밍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시작으로 나는 몇 년간 계속 추리소설만 주야장천 읽어대고 있다. 너무 치우친 감이 있어 다른 장르도 읽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집중도 안 되고 별 재미도 없어서 다시 추리소설을 집게 된다.
최근에는 도진기, 제인도, 요 네스뵈의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데, 지독한 편독이지만 앞으로도 나의 취향은 그다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중장년이 되면 가장 좋은 점은 이게 아닌가 싶다. 내가 뭘 하든 나한테 관심이 많은 사람도 별로 없을뿐더러, 바짝 참견하고 잔소리할 사람도 없다는 점.
아, 참견은 아니지만, 한 번은 남편이 내가 읽는 책의 표지를 보고 한 마디 한 적은 있다.
“무섭다, 정말.”
그때 책 제목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마도 ‘남편이 죽었다’, ‘남편을 죽였다’ 이런 느낌의 제목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