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대잔치에서 KBL까지, 농구

by 한량

2025년에 내가 프로야구에 입문했다면 농구에 입문한 건 나름대로 유서가 깊다.

내가 처음 농구에 눈을 뜬 건 대구에 사는 동갑내기 사촌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인가 방학을 맞아 사촌이 우리 집에 놀러 왔었다. 사촌은 그때 한참 농구에 빠져 있었는데, 특히나 연세대 농구선수 이상민을 좋아했었다.

불행하게도 이상민은 우리 집 옆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지금도 MBTI가 I인 내가 그때는 극도로 내향형이었으니 사촌의 강요에 못 이겨 이상민 선수의 집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슬로 모션일 수밖에.


나와는 달리 매우 외향적인 내 사촌은 남의 집 초인종을 잘도 눌러댔고, 집에 아무도 없었으면 했던 내 기도가 무색하게도 이상민 선수의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어 주셨다.

“지금 이상민 선수가 집에 없어요.” 하며 우리를 돌려보내려는 찰나, 그분이 아마 사촌의 "어떡하지?" 하는 말을 들으셨나 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사촌의 경상도 억양을 들으시고 우리가 오로지 이상민 선수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상경한 걸로 착각하신 게 아닌가 싶다. 측은했는지 갑자기 이성민 선수 방이라도 보라며 들어오라고 하셨으니 말이다.


결국 우리는 그날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가 팬들이 보낸 인형이며 쿠션, 머그컵, 종이학이 가득 담긴 병이 한쪽 벽면을 빼곡히 차지한 이상민 선수의 방을 구경하고 나왔다.

그때 사촌이 얼마나 감격스러워하던지, 아직도 그때의 그 환희에 찬 표정이 눈에 선하다. 좋아죽는 사촌과 달리 나는 방구석이 얼른 무너지기만 빌었던 것 같지만…….


그날은 정말 땅으로 꺼지고 싶게 부끄러웠는데, 희한하게도 그날 이후 사촌과 함께 농구대잔치를 다니며 나도 농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 연세대 농구부에는 문경은, 우지원, 이상민 등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게 인기 절정인 선수들이 많아서 농구장에 가면 소위 오빠 부대가 한가득이었다.


나는 사실 특별히 좋아하는 선수가 없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때 처음 응원에 맛을 들인 게 아닌가 싶다. 오빠 부대 사이에서 "꺄~" 하며 소리를 지르던 나를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오지만, 그래도 뭐 누구나 학창 시절 흑역사 5만 개 정도는 있는 거니까.


고등학교 때는 사촌이 서울에 오는 일이 드물어서 그랬는지 나도 농구장을 갈 일이 별로 없어졌다. 그러다 보니 농구에 대한 내 열정도 잠시 시들해졌다가, 대학교 때부터 다시 친구들이랑 농구장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대학생이 되던 그쯤 농구대잔치는 없어지고 KBL(Korean Basketball League)이 출범했다. 그리고 지금껏 10개 구단이 해마다 정규리그를 거쳐 플레이오프와 챔피언 결정전이 치러진다. 나는 그때부터 시작해서 삼성 썬더스를 응원하고 있는데, 응원하면서 광분하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스트레스 해소법인지도 모르겠다.

당시에 내가 열심히 응원하던 선수는 지금은 고려대 농구부 감독이 된, 삼성의 주희정 선수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슬슬 뜸해지다 애들을 키우면서 뚝 끊겨버린 것들이 참 많지만, 농구 관람도 그중 하나다. 그러다 재작년부터인가 초등학생 아들이 농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다시 농구장에 가기 시작했다.

사실 농구 응원은 야구처럼 전체가 하나 되는 떼 응원(?)은 아니어서 응원하는 재미는 덜하지만, 경기 자체는 야구에 비해 짧고 속도감이 있어서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게다가 야구는 내가 룰을 잘 몰라서 아들놈한테 타박받기 일쑤지만, 농구는 그럭저럭 아는 척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왜 농구장에 가면 꼭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아련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농구선수들이 오빠는커녕 아들에 더 가깝지만, 나에게는 잠실실내체육관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진하게 스며 있는 공간인가 보다.


야구장은 표 구하기가 힘들지만, 농구장은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도 매우 큰 장점이다.

물론 야구든 농구든 시즌이 진행될수록 표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건 비슷하지만, 올해 야구장 티켓 구하느라 알람 맞춰 가며 난리 쳤던 거에 비하면(한국시리즈 때에는 티켓 오픈 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클릭해도 대기가 5만 번 대였다) 농구장 표 구하는 건 제법 할 만하다.


야구 관람이 좀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한 나들이라면, 농구는 산책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다. 야구는 기본 4시간 이상이지만, 농구는 길어야 한 시간 반이면 끝. 게다가 실내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파가 몰아치나 상관없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야구의 시즌, 그리고 겨울은 단연 농구의 계절이다. 2025-2026 KBL도 열심히 보러 가야지. 단지 삼성 썬더스가 최근 몇 년간 계속 성적이 좋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올해는 잘하자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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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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