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시도할 나의 미래의 취미생활이다. 엄밀히 따지면 나에게 일본어는 취미의 정의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내가 일본어 공부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사실 일본어는 즐긴다기보다 언젠가 반드시 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내 취미생활 리스트에 넣었다.
나는 대학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했다. 이렇게 말하면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 취미가 있거나 일본 문화나 문학을 좋아한다는 이유가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일본어를 배워 본 적도 없고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음악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었다면 만화책 쪽인데, 초등학교 때는 '드래곤볼', '소년탐정 김전일', ‘닥터 슬럼프’, '슬램덩크' 등 장르에 상관없이 섭렵했고, 중고등학교 때에는 ‘꽃보다 남자’, ‘베르사유의 장미’, ‘올훼스의 창’ 같은 순정만화를 주로 봤다. 어쨌든 내가 접한 일본 문화라면 만화책이 다였다.
오히려 나는 고등학교 때 건축학도를 꿈꿨던 이과 여학생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때에는 여자 이과반이 6반 중에 딱 한 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신에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남자 이과반이 5반 있었는데 왜 공학에서 내신을 남녀 따로 산출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흔들림 없이 모의고사 때마다 지망학과에 건축학과를 써넣곤 했다.
그런데 재수를 하면서 급선회하여 일문과를 지망하게 되었으니 입시에 있어서 참 비효율적인 행보였다.
내가 일문과를 지망한 건 일본어교육과에 재학 중이던 언니와 때마침 시작된 일본 문화 개방의 조류와 함께 나의 충동적인 성향, 이 세 가지 콜라보의 산물이었다.
나와 두 살 차이인 언니는 은근슬쩍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1998년에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면서 우리 집에도 언니가 일본 드라마와 영화, 애니메이션, J-Pop을 들여왔다. 지금이야 K-pop, K 드라마가 대세지만 그때는 갑자기 밀어닥친 일본 대중문화가 대히트를 쳤던 시기였다.
결국 기무라 타쿠야의 '롱 베이케이션', 영화 '러브레터',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 X Japan의 'Endless Rain' 등이 나의 전공을 결정해 준 셈이다.
내가 이런 이유로 갑자기 건축학과에서 일어일문학과로 노선을 확 변경했다고 하면 대부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나는 원래 다소 충동적이고 단순한 편이다. 사실 건축학도가 되고 싶었던 이유도 김진애 작가가 쓴 '나의 테마는 사람 나의 프로젝트는 세계'라는 책 한 권 때문이었다.
그 책에서 건축학과라는 곳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은 이공계에 여자들이 별로 없던 시절에 건축학과를 다니고 남자들이 대부분이던 건축업계에서 유리천장을 깨 나간 김진애라는 사람의 스토리가 더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금방 빠져들었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헤어 나와서 다른 데 빠져들곤 하니 어떤 면에선 매우 한결같은 사람이다(자조적인 뉘앙스는 아니고 그냥 나라는 사람이 그렇다는 거다).
원하던 대로 일어일문학과에 진학을 하긴 했는데, 솔직히 나는 공부와는 담을 쌓은 소위 '먹구대학생'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없이 낙천적이고 철이 없었던 나는 '대학에 왔으니 실컷 놀고,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 봐야지.' 하고 마음먹었었다.
그래도 졸업을 하면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밑도 끝도 없이 믿었던 20대의 철없던 나를 생각하면 살짝 어처구니가 없긴 하다. 20 대란 원래 무모하고 순수한 존재라며 애써 포장해 본다.
졸업할 때쯤 나의 일본어 실력은 어디 가서 일문과라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솔직히 내가 졸업할 때만 해도 학부 졸업 요건이 딱히 없었는데, 내가 졸업한 후에 일본어 능력시험 1급을 따야 졸업이 가능해졌다.
1~2년 늦게 졸업하려고 했으면 아예 졸업을 못 했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아찔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내가 운이 좋았구나 싶다.
졸업 이후에는 더더욱 일본어 쓸 일이 없었으므로 부끄럽지만, 현재 나의 일본어 실력은 히라가나도 헷갈리는 수준이다. 지금까지도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른다. 학부제로 들어가서 2학년이 되어서 전공을 선택했는데, 그때 국문과를 선택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국문과였으면 적어도 전공 지식 없는 게 들통날 일도 별로 없지 않았을까?
몇 년 전에 시댁 식구들과 후쿠오카로 여행을 갔다. 시부모님이나 아가씨한테 구구절절 내가 대학교 때 공부를 안 해서 어쩌고 할 수도 없으니, 시댁 식구들은 호텔이나 음식점에 갈 때마다 나를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호텔 프런트에 가서 떠듬떠듬 일본어로 말을 해 봤지만, 내가 겨우 할 말을 마치면 뭐 하나 상대방 말을 알아듣기가 힘든걸. 식당에 가서 메뉴를 시키려고 해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나는 의혹에 찬 가족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진을 짚어 가면서 음식을 주문하곤 했다. 그래도 한 마디도 안 할 순 없어서 딱 한 마디만 덧붙였다.
“오네가이시마스(부탁합니다).”
정말 그 여행 내내 내 등에는 식은땀이 마를 날이 없었다. 나중에는 호텔 투숙 전에 혼자 미친 듯이 프런트로 달려들어 가서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짧은 영어로 잽싸게 의사소통을 마치곤 했다.
생각보다 일본 호텔의 직원들은 영어를 잘하지 않아서 쉬운 영어로 피차 잘 통하는 편이다. 그땐 정말 여행이 '여행이 아니라 수련' 같은 느낌이었다. 일본어 공부를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와서 일본어 공부를 한다고 내가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요즘 들어 일본 작가들의 소설을 많이 보긴 하지만, 번역이 잘 되어 있어 굳이 원서를 보고 싶다는 마음도 전혀 없다.
그런데도 새로운 취미생활을 고민할라치면 일본어는 언젠가는 해야 할 것만 같다. 왜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명쾌한 답은 없다. 전공인데도 일본어를 전혀 못 하는 게 부끄러워서, 조금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좀 더 떳떳할 것 같아서, 일본 여행 갔을 때 써먹으면 편리할 테니까…….
이런 구구절절한 이유들이 떠오르긴 하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조만간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고, 그게 일은 아니니까 취미생활이라 우겨 본다.
그렇지만 학원에 가든, 문화센터에 가든 내가 일본어 전공이라는 말은 반드시 함구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