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세계를 향한 렌즈: 분쟁지역의 침묵 속 희망

고향을 등진 불가피한 선택: 바다를 건넌 난민들 (7)

by 해리

기다림의 끝


레스보스에 도착한 지 일주일여가 지난 9월 9일 아침, 미틸리니 항구 주변을 홀로 걷던 중 갑자기 사람들이 항구를 향해 일제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난 일주일간 섬을 떠나는 난민은 극소수였고, 미틸리니는 점점 혼잡해져만 갔다. 휴양지 섬에서 갇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모두 무기력함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바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 항구 근처가 난리야. 모두 항구 쪽으로 뛰어가고 있어."


"나도 방금 들었어. 시리아 여권 소지자들은 비자 또는 허가 없이도 페리에 탑승할 수 있다는데 확실하진 않아. 난민들을 섬에서 나가게 하기 위해 그리스 정부가 페리를 몇 대 더 레스보스로 보냈다는 소문도 있어. 우리도 지금 가는 중이야. 항구 입구에서 만나자."


일부 사실로 밝혀졌다. 넘쳐나는 난민들로 골머리를 앓던 레스보스 지방정부가 아테네 중앙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중앙정부는 추가 페리를 지원하면서 개인 신원조회 없이 여권만 있어도 허가서를 발급받을 수 있게 정책을 바꿨다.

후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유럽연합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레스보스 방문 계획을 알리자, 그리스는 난민 문제를 최선의 방법으로 관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쇼'를 준비한 것이다. 핵심은 거리의 난민들을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하여 모든 것이 통제 아래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레스보스에 거주하며 난민을 도왔던 그리스 정교회 신부에게서 들었다. 후에 교황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방문 때도 비슷한 조치가 취해져, 정책을 바꿀 권한을 가진 이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기만하는 방식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그러나 당시 난민들은 그런 큰 그림을 볼 여유가 없었다. 오랜 기다림에 지친 그들은 감옥 같은 섬을 벗어날 어떤 기회라도 잡으려 항구로 몰려갔다. 그간 모두가 배운 교훈이 있다면, 오늘의 정책이 내일까지 이어질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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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기는 사이, 바젤은 이미 내 티켓까지 구해 놓았고 우리는 선착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대한 페리를 향해 걸으며 체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듯했다. 레스보스로 향할 때와 비슷한 설렘이 나를 흥분시켰다. 난민 친구들의 기분이 어떨지 상상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바젤, 루나, 두 명의 무스타파가 환한 미소로 맞아주었고, 서로 포옹한 후 당당히 페리에 올랐다. 표 검사원이 나를 가로막았다. "허가서는 어디 있죠?" "저는 네덜란드 거주자라 솅겐 지역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요." "이 페리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건 난민만을 위해 아테네에서 특별히 파견된 페리예요. 당신은 탈 수 없습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난민, 현지인, 여행객이 모두 같은 페리를 이용하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규칙이 달라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고민할 시간이 없었고, 내가 원인이 되어 난민 친구들의 여정이 지체될 수는 없었다.


"한순간도 너희와 떨어지지 않겠다는 게 내 목표였지만 어쩔 수 없네. 내 걱정 말고 우선 아테네까지 안전하게 가. 나는 다른 페리나 비행 편을 즉시 알아볼게. 아테네 도착하면 바로 연락해. 너희가 이 지긋지긋한 레스보스를 드디어 떠난다는 것이 정말 기뻐. 대략 열 시간 후에 보자."


그 후로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아테네행 비행기표는 이미 매진된 후였다. 차선책으로 그리스 제2도시 세사로니키 행 비행기에 몇 좌석이 남아있음을 확인했다. 바젤 일행의 페리는 다음날 새벽 5-6시경 아테네 도착 예정이었고, 내가 세사로니키에 초저녁에 도착해 기차로 아테네까지 가면 얼추 그들이 도착할 시간을 맞출 수 있을 듯했다.

결과적으로 그들도 다음 목적지인 마케도니아로 가려면 세사로니키로 와야 했지만,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아테네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표를 구할 수 있었던 가장 이른 기차가 밤 11시 출발이라 그들이 도착하는 선착장에 미리 가 맞이하진 못했지만, 이번엔 그들이 나를 위해 기다려주었다. 아테네에 거의 도착할 무렵 바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아테네 기차역 바로 밖 공원에 있겠다고.


기차역은 생각보다 훨씬 한산했다. 천 명이 넘게 탔던 페리가 도착하자마자 모든 난민이 기차역으로 몰려 북적일 거라 예상했지만, 곳곳에서 선잠을 자는 몇몇 그룹 외에는 대체로 조용했다.


새벽 5시경, 어둠이 남아있는 기차역을 나오며 생각했다. 관광지로 유명한 아테네를 처음 방문한 내가 기차역 밖으로 나와 발만 찍고선 일행과 다시 기차에 올라타 떠나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그리 싫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많은걸 함께 겪으며 이제는 이 친구들의 심정과 동기화되는 느낌이었고 그 순간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루빨리 목적지 국가에 도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젤이 말한 기차역 앞 작은 공원에 도착하니, 무스타파는 벤치에 누워있고 루나는 바젤의 품에 안겨 깊이 잠들어 있었다.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다가갔지만 무스타파는 인기척에 일어나 나와 포옹했고, 바젤은 루나가 깨지 않도록 눈인사로 환영했다. 그들은 세사로니키 행 다음 기차가 7시경 있다고 알려주었다. 내 카메라 셔터 소리에 루나가 깨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침. 다시 만나네."

"근데 배에 탔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모두 기차역으로 몰려 표 구하기 힘들까 걱정했는데."

"뿔뿔이 흩어졌어. 어떤 이들은 선착장에서부터 다른 교통편으로 마케도니아 국경으로 직행했고, 다른 이들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거나 잠시 쉬었다 가려는 것 같아. 여하튼 우리 그룹은 다시 모였으니 계속 전진하자. 얄라(가자)."

그렇게 아테네에서의 짧은 방문을 뒤로하고 세사로니키 행 기차에 올라탔다.


이도메니(Idomeni) - 첫 번째 국경선


6시간 동안 기차에서 몇몇 난민들과 대화하거나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은 밤새 페리에서 제대로 자지 못해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아프간 하자라로 보이는 한 어린아이가 유독 여정 내내 잠자지 않고 창밖을 응시하거나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떠나야 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부모의 손에 이끌려 그 험난한 길을 걸어온 그 아이의 시각으로는 이 새로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하며 부모의 허락을 받고 조금씩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기차에서 내려 부모의 손을 잡고 걷는 그의 모습을 촬영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접근해 불쾌하다는 듯 소리를 지르며 카메라 앞에 서서 촬영을 방해하고 심지어 우산으로 내리치려 했다. 겨우 피한 후 그를 바라보니 여전히 화가 난 채 계속 소리쳤다. 내가 아이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고 설명하려는데 바젤이 말했다. "난민이 아니야. 터키인인데 우리 배에 탔던 밀수업자들과 연관된 것 같아. 자신이 사진에 찍혀 나중에 처벌받을까 봐 저렇게 화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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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에서부터는 이런 자칭 브로커들의 접근이 더러 있었다. "내가 여기서부터 어떻게 가는지 도와줄 수 있어. 곳곳에 경찰이 검문하고 있으니 그냥 갔다간 잡혀서 터키로 송환될 거야." 그는 불안한 난민들의 심리를 이용해 몇몇을 모아놓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탄불 이후로 처음으로 난민들이 스스로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광경을 목격했다. 함께 뭉쳐 그 브로커를 뒤로하고 당당히 걸어갔고, 따라오는 그에게 단호히 말했다. "고맙지만 당신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이제부턴 우리 스스로 가겠습니다."


자신들의 나라를 떠나 온 이래, 난민이라는 신분으로 감내해야 했던 위축됨과 굴욕을 잠시라도 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았던 시절처럼 자신의 존엄성은 스스로 지키겠다는듯한 태도와 당당함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는 세사로니키 버스 터미널에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국경 지역의 작은 마을 이도메니행 버스표를 구입했다. 한산했던 기차역과 달리 버스터미널은 그 사이 다시 모여든 난민들로 북적였다. 버스가 출발하자 우리는 다시 긴장했다. 최종 목적 국가까지 거쳐가야 할 많은 나라들 중 최초로 육로로 국경을 넘는 곳이었다. 그저 무수한 소문만이 있었을 뿐, 국경 통과 시 어떤 과정을 겪을지 또는 통과는 시켜줄지조차 불명확했다.


세사로니키를 출발한 버스가 약 한 시간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밖을 보니 철길 옆에 약 400-500명의 난민이 대기 중이었다. 아테네 기차역에서처럼 다시 한번, 마케도니아로 가기 위한 유일한 통로인 이곳에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 않음에 조금 놀랐지만 한 유엔직원이 내게 하루 중에도 대기하는 그 숫자가 계속 변동된다고 귀띔해줬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에게 날씨마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새삼 비가 왔을 때의 레스보스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도 받아주질 않아 비를 피할 데가 없어 버스정거장 또는 트럭 밑에 숨듯 비를 피해야 했던 그 서러움을. 그 해 가을 이후로 한동안은, 비가 올 때마다 거리에서 추위에 떨며 어딘가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려야 했던 난민들의 처지가 눈에 그려져 가슴이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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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통과의 패턴을 배우게 되었다. 국경까지의 이동은 해당 정부가 난민들을 한시라도 자신의 국가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 마련해 준 교통편을 이용하거나 난민들이 비용을 지불하고 스스로 교통편을 마련하건 늘 변동됐지만, 국경을 통과하는 순간만큼은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 난민의 숫자가 많건 적건 변하지 않는 규칙이었다.

이도메니에는 와인용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50명씩 나눠 이동하기 시작했고 뚜렷한 국경선 표시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마케도니아에 도착해 있었다.


세르비아 남단 국경


마케도니아에 들어서 포도밭의 반대편으로 걸어 나오자 강변에 다리 옆으로 많은 차량이 대기 중인 것이 보였다. 대부분 버스와 택시였다. 마케도니아 철도 노조 파업으로 기차 운행이 중단되어 마케도니아 북쪽 국경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차량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이미 운전사들과 협상 중이던 다른 시리아 난민이 설명했다. 타인의 불행이 누군가에겐 행운이라는 듯, 택시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난민들에게 교통편을 제공하고 이익을 챙기는 임시적 비즈니스가 호황이었다. 그들끼리 입을 맞춘 듯 차량 한 대에 300유로라는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요구하며, 타지 않으면 앞에 버스가 몇 대 있지만 타려고 대기하는 이들이 워낙 많아 오늘 안에 버스 타기는 힘들 것이라며 조롱하듯 얘기했다.


바젤과 루나, 두 무스타파는 이 점에 이견이 없었다. "가격이 터무니없지만 지금 난민은 최고의 착취 대상이야.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는데 방법 가리지 않고 빨리 가는 게 중요해. 이 택시 기사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바젤이 제안하고 모두 동의했다.

비 내리는 마케도니아를 세 시간 만에 남쪽 국경에서 북쪽 국경까지 횡단해 슬라니시테라는 마케도니아 최북단 기차역 마을에 도착했다.


어둠이 서서히 오는 가운데 여전히 비가 내렸고, 평소에는 한적했을 이 기차역 주변으로 차량이 너무 많이 몰려 더 이상 접근하기 어려워 나머지 몇백 미터는 걷기로 하고 택시를 보냈다.

비 속에서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거나 업은 채 걷는 많은 난민이 보였고, 모두 기찻길을 따라 걸으며 이미 형성된 행렬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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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사진을 찍기로 하고 내 그룹에게 먼저 가라고 했다. 약 30분 동안 기차역 주변에서 끊임없이 도착하는 난민들을 촬영하다가 해가 진 후 서둘러 행렬을 따라 세르비아 국경 쪽으로 걸어갔다. 지도상으로는 약 1km 떨어진 곳에 국경이 있었지만,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처럼 뚜렷한 표시가 없어 걸으면서도 세르비아로 이미 넘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멀리서 보이는 밝은 불빛과 길게 늘어선 인파로 그곳이 세르비아 검문소임을 알았고, 또다시 국경선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이미 세르비아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검문소를 한 사람씩 차례대로 통과해야 했기에 기다리는 줄이 수백 미터에 달해 쉽게 내 일행을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줄을 건너뛰고 계속해서 앞쪽으로 나아갔지만 결국 검문대 도달할 때까지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카메라를 메고 있는 것을 보고 내가 허가받은 저널리스트라 생각했는지, 세르비아 경찰은 별다른 말 없이 나를 먼저 통과시켰다. 나는 난민들이 걸어가는 쪽으로 어둠 속을 한동안 홀로 걸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았는데 바젤과 일행이 이미 검문을 통과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그들을 찾기 위해 서둘러 걸었다.


달빛에 의존해 걷고 있을 때, 멀리 보이던 모스크에서 이맘(무슬림 종교 지도자)의 저녁 기도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기도는 주로 코란 암송이지만, 걷는 난민들의 애절함을 담은 듯 고요한 밤을 은은하게 채웠다.

프레셰보는 정교회가 주류인 세르비아에서 드물게 무슬림이 다수인 작은 도시로, 유고슬라비아 내전 시기에 세르비아군에 맞서 싸우다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다. 알바니아계와 인근 코소보 출신 난민이 많이 살고 있어, 이곳을 지나가고 있던 난민들의 처지를 더 공감할 수 있을 도시였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세르비아에서 모스크를 보고 기도 소리를 듣는 것은 꽤 낯설었다. 유고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이 보스니아나 코소보에서 무슬림을 잔혹하게 학살했던 역사, 그 피로 물든 사건들이 불과 10-20년 전 내가 서 있는 이 땅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무슬림이 대부분이었을 이곳을 걷고 있던 내 주위의 난민들이 그런 근역사를 차라리 알지 못한 채 통과하기를 바랐다.


검문소에서 난민 등록소가 있는 프레셰보까지는 약 10km 떨어져 있다고 들었다. 그 거리를 모두 걸어야 하는지 궁금해하던 찰나, 앞에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걷는 노부부가 보였다. 매우 힘들어하는 모습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은 크게 한숨을 쉬고 묵묵히 배낭을 앞으로 멘 후 부인을 업으려 했지만, 이미 자신을 지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던 그 역시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함께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신음을 냈다. 그때 어디선가 젊은 청년 셋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없이 노부부를 등에 업고 그들의 짐을 나눠드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지막이 노래를 흥얼거렸고, 노부부는 업힌 채 계속해서 "슈크란(고맙습니다)"을 반복했다.


짧은 기간에 반복적으로 맞닥뜨리는 이런 가슴 먹먹해지는 장면을 또다시 목격하며 문득 이 여정을 따라나서기를 한 나 자신의 결정에 감사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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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셰보(Presevo) & 베오그라드(Belgrade), 세르비아


한참을 걸은 후 도착한 세르비아 국경 지역 첫 마을에는 수많은 난민이 모여 있었다. 여전히 프레세보 중심부까지는 수 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는데, 모스크 앞 버스 정류장에서 수백 명의 난민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일행을 다시 찾을지 고민하며 우선 동네 가게에서 세르비아 심카드를 구입해서 바젤에게 메시지를 남기려던 순간에 택시 안 바젤이 나를 불렀다. 알고 보니 국경을 건너자마자 검문소에서 줄을 서 있을 때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서, 오히려 내가 먼저 세르비아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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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도착한 프레셰보는 생지옥과 다름없었다. 밤중에 긴 거리를 걷느라 지친 난민들이 비를 피하거나 몸을 녹일 곳도 없이 차갑고 질퍽한 거리 곳곳에 앉아 있거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십 대의 버스에서 나오는 헤드라이트 빛이 오가는 이들의 그림자 만들어내며 더욱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굉장히 어수선한 가운데 허가서를 발급하는 임시캠프는 무장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긴 줄에서 추위에 떨며 더딘 속도로 전진하는 난민들로 가득했다. 세르비아도 레스보스와 비슷한 정책을 시행 중이었다. 이곳에서 세르비아 내 여행허가서를 받아야만 세르비아 내 이동이 가능했다. 대부분의 버스는 허가서를 가진 난민들을 수도 베오그라드로 데려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우리는 다시 팀을 나눠 무스타파는 허가서를 받기 위한 줄에 합류하고 바젤과 루나는 다른 방법이 없을지 알아본다고 했다. 주변을 촬영하며 끝없이 긴 줄을 바라보는데 이번에도 수완 좋은 바젤이 해결책을 찾아서 돌아왔다.


"누군가 대화를 엿듣고 따라가 봤더니 허가서를 위조해서 두 시간 후에 버스에 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 한 사람당 70유로가 그들이 원하는 가격이야. 캠프 안에 들어가려면 밤새도록 기다려야 하고, 캠프 안쪽의 상황은 더 지옥 같다고 들었어. 나는 차라리 이 돈을 내고 오늘 밤 중에 이 지옥을 빠져나가는 걸 택하겠어. 어떻게 할래?"

"다시 말하지만 내 의견은 묻지 마. 난 너희가 가면 같이 가고, 막히면 같이 머물 거야. 이게 너희가 원하는 거면 이번도 마찬가지로 난 따를 거고. 다만 이제 와서 다시 느낀 건데, 내가 따라나설 난민 그룹을 잘못 골랐나 싶네. 이미 우리 다섯 중에 내가 제일 가난한듯한데 이 여정 마치면 나는 빈털터리가 될 거야."

친구들이 웃으며 어깨를 툭 치고 "얄라 아샤밥(얘들아 가자)"하며 뒷골목으로 향했다.


깊은 밤, 프레세보를 빠져나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의 여정은 계속되었다. 도시 외곽의 검문소에서 두 명의 경찰이 승객 명단과 각자의 허가서를 검사했다. 우리가 받은 허가서는 부실해 보여 긴장했지만, 다행히 통과했다. 긴 하루를 보낸 우리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하나둘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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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베오그라드 중앙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있었다. 새벽 6시였음에도 밤새 도착한 난민들로 북적거렸고, 바깥쪽 공원은 마치 레스보스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텐트들로 가득했다. 계속된 강행군으로 바젤은 몸살로 쓰러질 지경이었고, 나머지도 피곤이 쌓여 있었다. 여기서 하룻밤 쉬고 몸을 추스른 후 계속하기로 했다.


이 휴식은 내게도 적절했다. 레스보스에 있을 때 내셔널지오그래픽과 한겨레 신문사에서 이 여정의 내 사진과 글을 실기로 결정했는데, 끊임없던 이동으로 정리할 시간이 부족했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헝가리 국경을 건너기 전 조금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헝가리는 유럽에서 유독 난민에 대한 반감을 국가적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표현해 왔고, 우리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난민의 불법 유입을 막기 위해 세르비아와의 국경에 펜스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베오그라드: 편견과 온기 사이


여전히 비가 내리고 쌀쌀한 베오그라드에서 며칠 전부터 기침을 심하게 하던 바젤을 젖은 공원 텐트에 두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것 같았다. 제대로 된 숙소를 찾기로 했지만, 이곳의 호텔들도 다른 고객들의 눈을 의식해 난민들을 꺼려했다. 호텔에 직접 나타나 방을 잡기보다는 온라인으로 예약하고 돈까지 미리 지불하자고 제안했다. 이미 돈까지 받았으면 뒤늦게 쫓아내지는 못할 거라는 믿음에.


호텔 리셉션 직원은 리셉션에 나타난 누추한 우리의 모습에 예상대로 놀라 했지만 우선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내 여권은 문제없이 처리됐지만, 다른 방은 바젤의 여행 허가서를 제출했다. 직원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타나 얘기했다.


"죄송하지만 지배인께 물어보니 난민 허가서로는 저희 호텔에 지낼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미 돈도 지불하고 해서 약간의 편법으로 오늘은 지낼 수 있게 해 드릴 테지만 내일은 체크아웃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오히려 고마웠다. "어차피 오래 지낼 생각 아니었어요. 내일 일찍 나갈게요. 친구들 앞에서 얘기하지 않아서 고마워요."


"처지를 알면서도 더 도와드리지 못해 미안해요. 그들이 무사히 원하는 곳에 도착하길 바랄게요. 저희도 전쟁을 겪어봐서 원치 않게 집을 떠나야 하는 심정을 이해한답니다."


친구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원고를 정리하다 늦은 오후쯤 베오그라드의 거리로 나섰다. 발칸 반도, 특히 세르비아는 역사적으로 무슬림을 향한 잔혹한 학살이 자행된 곳이었다. 내게 세르비아는 인류의 가장 어두웠던 측면을 대표하는 우울하고 소름 끼치는 장소였다. 그리고 학살이 벌어진 그 시기가 굉장히 동시대적이었다는 그래서 아직도 그 당시의 전쟁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나로 하여금 조금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왠지 전쟁 당시 이유 없이 죽음을 맞이했던 그 수많은 영혼들이 여전히 베오그라데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나에게 어떤 음울한 기운을 전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쌓아왔던 그 편견은 다행히도 난민들이 밀집했던 한 공원 광장에서 만난 자원봉사자들과의 만남으로,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내 안의 무거움을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꿔놓았다. 광장 한쪽에는 따뜻한 차와 샌드위치를 나눠주고 세르비아 내에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임시사무소가 있었다. 난민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환영하고 포옹하는 이들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알렉산드라라는 봉사자와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녀는 이후에도 내가 세르비아에 돌아올 때나 세르비아에서의 난민 관련 상황을 알고 싶을 때 늘 내게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우리 정부가 행동하길 기다리다간 이 난민들은 아무 도움도 못 받을 거예요. 누군가 소셜미디어에 자원봉사자 페이지를 열었더니 많은 이들이 모였어요. 대부분 젊은이들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인들도 많아요. 지금은 차와 샌드위치 정도지만, 곧 터미널 뒤 공터에 제대로 된 쉼터를 만들 계획이에요. 정말 흥분되는 나날이죠. 내 도시에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매일 몇 시간이라도 나와서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난민들의 미소를 보면 전에 못 느꼈던 삶의 의미를 찾는 것 같아요."


그녀와 대화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봉사자들을 보면서, 세르비아에 대한 무거운 인상이 걷히는 듯했다. 늘 생각하는 것이 누군가 어느 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의 우연적인 만남이 어떻게 그 국가의 인상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지에 대한 놀라움에 관한 것이다. 분명 그 작은 개인이 한 나라의 전체성을 대변할 수는 없을 텐데도,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한 개인을 통한 일반화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리고 표본이 너무나 작은 그런 일상에서의 소소한 인연으로 그 전체를 바라보는 일종의 오류임을 알면서도 그 함정에 쉽게 빠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합리화라면 받아들이며 살겠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그 개인에서 국가로의 이미지의 확장이 어떤 긍정적인 이미지에 관련된 일반화라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에너지로 그 국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오그라데에서의 이 자원봉사자들은 내게는 그 어떤 홍보자원보다도 세르비아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 놓는 요소로 느껴졌다.

베오그라데에서의 잠깐의 멈춤은 그런 긍정적인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적적하고 필요했던 휴식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분위기와 대조적인 헝가리가 우리의 다음 목적지였기에. 또 한 번 나의 편견이 무참히 깨지길 바랐지만, 뉴스를 통해 접하던 헝가리에서의 난민들에 대한 처우는 입국을 눈앞에 두고 있던 우리에게는 그다지 희망찬 것은 아니었다.


유럽연합 내에서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된 솅겐 지역에 속한 첫 국가인 헝가리. 이곳에 입국하면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 독일, 스웨덴과 같은 나라로 가는 데 어떤 장벽도 없다는 의미였다. 물론 많은 난민을 통제하기 위해 임시검문소를 설치했지만, 유럽연합에 도착했다는 상징적 의미는 컸다.

그러나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점에 헝가리는 유럽연합 중 난민에 대한 반감을 공식 입장으로 표명한 첫 나라였다. 이미 세르비아와의 국경 전역에 펜스를 세웠고, 광고를 통해 난민의 부정적 측면을 끊임없이 방영하며 위화감을 조성했다.


난민들도 이를 알고 있었고, 레스보스 때부터 헝가리 국경을 가장 큰 난관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국경 상황은 매시간 바뀌며 소셜미디어를 통해 엇갈린 정보가 퍼져 혼란을 주었다. 우리는 만일을 대비해 펜스를 자를 도구를 구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호르고슈로 향하는 버스에 탈 때 우리 모두 확연히 긴장했고, 모두 조용히 창밖만 바라봤다. 이스탄불에서 만났던 야멘이란 시리아인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국경이 수시로 열리고 닫히니 꼭 밤중에 건너가. 국경을 넘자마자 왼편의 초록색 불빛을 찾으려 해. 보이면 그쪽을 향해 옥수수 밭으로 들어가. 눈에 띄지 않게 빨리 이동해. 행운을 빌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베오그라데에서 출발한 버스는 세 시간 후 국경 마을에 도착하였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기다린 후, 기차 철로를 따라나섰다. 철로 주변 자갈 밟는 소리와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 누군가 말을 꺼내면 다들 조용히 하라고 다급히 쉬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걷는데 멀리 앞에서 환한 스포트라이트가 우리 쪽으로 직접 비추고 있었다. 모두 긴장했지만, 앞서가는 이들이 계속 걸어가는 것을 보고 우리도 진행했다.

그 빛은 헝가리 경찰이 국경 펜스 한쪽에 설치하고 넘어오는 난민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열 명가량의 경찰이 펜스 주변에 서서 아무 말없이 걷는 난민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의 무전기를 통해 계속 들려오던 헝가리어의 교신이 그 적막한 밤의 고요를 깨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긴 펜스에 철로 부분만 약 4미터가 끊어져 있었고, 이 시점에서 대열을 벗어나는 것은 의심만 살뿐이었다. 우리는 계속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국경을 막 넘으려는데 경찰들이 갑자기 나를 막아섰다. 어깨에 둘러매고 있던 카메라를 본 것이었다. "저널리스트인가요? 그럼 여기로 못 지나가요."


한편으로는 난민들 틈에 끼여 계속 다니다 보니 순간순간 나 자신이 그들의 일부라고 착각을 할 정도였는데, 중요한 순간에 안일하게 대처한 자신을 원망했다. 또 한 번 나의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분리되어야 했다.


"너희는 계속 가. 나는 방법을 찾아볼게. 서로를 못 찾으면 부다페스트에서 만나자. 너희도 오스트리아 가기 전에 부다페스트를 거칠 테니 거기서 연락하면 찾아갈게. 행운을 빌어. 기억해, 초록색 불빛 쪽으로 가는 거야."

스포트라이트 뒤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얼마나 빨리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불안했다. 어쩔 수 없이 연어처럼 모든 이들이 진행하던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 걸었다.


몇몇 다른 저널리스트들이 한쪽에서 사진을 찍거나 방송하는 모습이 보였다. 머릿속에는 어떻게 내 그룹을 다시 찾을지만 생각하려 했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다. 헝가리 군인들이 보이지 않던 국경에서 50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되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를 가방에 넣은 후, 누군가 남긴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난민 대열에 합류했다. 그저 방금 나를 막아선 이들이 나를 알아채지 않기만을 바라며. 다행히 국경 수비대는 눈치채지 못했고, 그렇게 헝가리 국경을 넘어섰다.


주변을 살피며 야멘이 말한 초록색 불빛을 찾았다. 그의 말대로 철로 왼편 약 열 시 방향에 작은 초록색 점이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난민들이 걸어가고 있던 방향인 철로 전방에서 아주 환한 빛과 함께 난민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혼란스러웠다. 그 소리에 이끌려 나의 친구들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색 불빛을 따르는 대신 환호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계속 진행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대부분의 난민들처럼 철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빛이 방송사의 장비와 스포트라이트라는 것을 알게 됐다. 뢰스케라는 이 작은 마을 옆 들판에는 수천 명의 난민, 군경찰, NGO와 미디어 종사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체온증 환자를 위한 임시 의료소가 있었고, 자원봉사자들은 부지런히 옷과 차를 나눠주고 있었다.


내 그룹이 이곳에 왔더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 속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엔난민기구 직원에게 물었다.

"이들은 정부 버스를 타고 인근 임시 캠프로 이동할 거예요. 그곳에서 헝가리 도착 지문을 찍게 되겠죠.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더블린 협약대로 헝가리에서 난민 신청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독일이나 스웨덴으로 갈 수 있을지는. 그 협약은 이 시점에 당장 없애야 할 실용성 없는 것이에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더블린 협약은 1990년에 만들어진 EU 회원국들 간 망명 신청자의 책임을 분배하는 법적 체계였는데, 그 기본은 난민들이 유럽연합 내 입국한 첫 국가가 그들의 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곧 등록과 동시에 난민들은 그 등록이 된 국가에서만 망명 신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시스템은 2015년과 같이 대규모 이주 흐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유럽 관문에 속해 자연스레 난민들의 첫 입국국이 될 수밖에 없던 이탈리아, 그리스, 헝가리 같은 국가들이 난민 문제 관련된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며 수정을 요구했다. 난민들은 그들 나름대로 난민을 수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전혀 구축되지 않은 유럽 내 가난하고 복지가 열악한 남부나 동부 유럽에 정착하길 꺼려했고, 이 나라들에서 등록되지 않도록 피해 다녔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던 국가의 정부 또한 유럽 전체의 부담을 떠안는 현실을 불평하며 수정을 요구했다.


다행히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8월 말에 많은 이를 감동시킨 "난민을 위한 개방 정책"을 선언했다. 그녀는 다른 정상들과 달리 목숨을 걸고 전쟁 지역을 탈출해 독일로 오려는 시리아 난민에 한해서, 설사 그리스나 헝가리에서 등록됐더라도 그들이 원했던 최종 목적지가 독일이었다면 그들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어쩌면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건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다. 독일 내 극우단체였던 AfD(독일을 위한 대안) 위시한 일부는 그 선언이 오히려 난민들을 더 빠른 속도로 독일로 오게 만드는 요인을 제공한다며 비판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으로 끊임없이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자 했던 다수의 성숙된 독일인은 이 정책을 찬성하며 전역에 난민들을 환영하는 단체와 움직임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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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나는 방향을 다시 틀어 처음부터 우리가 향했어야 할 초록빛이 흐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친구들이 굳이 헝가리 난민캠프에 자진해서 들어가 등록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 야멘이 얘기한 그 초록 불빛은 다름 아닌 국경 인근 고속도로 주유소에서 나온 것이었다. 헝가리에서 등록되기를 원치 않았던 난민들이 이를 우회하기 위해 이곳에서 부다페스트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오스트리아로 가기 위해 집결하는 곳이었다.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주변을 비추는 가운데, 국경과 주유소 사이 옥수수밭으로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주유소 근처 수풀에선 난민들을 노리는 자들—돈벌이에 혈안이 된 브로커와 현지인들—이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난민을 체포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단지 고속도로 입구를 차단하는 데만 주력하는 것인 듯했다.. 난민들은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수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고, 브로커들은 이런 틈을 놓치지 않고 접근해 그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 공포심을 조장했다.

"저쪽으로 가면 경찰에게 체포돼. 나를 따라오면 부다페스트행 교통편을 마련해 줄게."

헝가리 내 등록을 필사적으로 피하려는 난민들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뒤편 임시 캠프로 돌아가 헝가리 정부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수용소로 갈 것인가, 아니면 불법이지만 여기서 곧장 부다페스트로 향해 오스트리아행 길을 찾을 것인가.


한 브로커가 내게도 접근했다.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난민인 척 수풀에서 머뭇거리자 예상대로 누군가 다가와 똑같은 말을 건넸다.

"부다페스트까진 얼마죠?" 내가 물었다.

"인당 200유로."

"150으로 합시다."

"지금 시세가 이거요. 마음에 안 들면 저 뒤 헝가리 캠프행 무리에 합류하시든가. 행운을 빌게요."

냉소적인 그의 태도를 파악할 겸 관심 없는 척 뒤돌아 섰지만 그는 나 말고도 얼마든지 수요가 있다는 자신감에 전혀 개의치 않고 다른 난민으로 향했다. 국경에서 부다페스트까지 한 시간여 거리를 노후된 소형차에 난민 다섯 명씩 구겨 넣고 달려 받는 대가가 1,000유로. 하루에 여러 번 왕복할 수 있었을 테니 그 수입은 꽤 컸을 테다.

수요와 공급의 논리라기보단 약육강식의 냉혹함이 지배하는 시장이었다. 내 일행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들도 이런 착취에 서러워하면서도 난민이란 처지 때문에 백기를 들고 브로커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진 않을까 상상해 보았다.


주유소로 향하기 위해 수풀을 빠져나오니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백여 대에 달하는 택시와 차량들이 주유소뿐 아니라 인근 갓길까지 점령한 채 난민들과 흥정하거나 대기 중이었다. 헝가리 군경이 이곳을 단속하지 않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차들은 끊임없이 주유소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 역시 부다페스트로 가야 했기에 교통편을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기로 하고 고속도로 입구로 향했다. 한 차가 내 옆에 멈춰 섰고 그 안의 운전사가 내게 물었다.


"부다페스트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


지금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돈을 받지 않고 차를 얻어 탈 수 있을지 기대치 않았기에 그 작은 기적 같은 행운에 앞쪽 표지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 가려고 하는 방향이 맞아. 나도 부다페스트 가는 중인데, 혹시 태워주실 수 있을까?"


그는 난처한 듯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난민이야? 여기선 난민에게 교통편 제공하는 게 불법이라 괜히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아, 그런 경우라면 걱정 안 해도 돼. 난민을 취재 중인 포토저널리스트이고 이미 유럽에 거주하고 있으니."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길에 그와 나눈 대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자동차 번호판이 스웨덴으로 되어있던데 여기 살아?”

"아니. 좀 긴 얘기인데, 사실 난 ISIS 때문에 시리아로 가던 중이었어."

"뭐라고?!" 그가 ISIS에 합류하러 간다는 말로 들렸다. 하지만 그런 계획을 이렇게 솔직하게 유럽이라는 장소에서 공유할리가 없을 거라 생각하던 중, 그가 부연 설명을 해줬다.


"스웨덴에서 왔어. 가족은 이라크 출신이고.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스웨덴으로 난민 신청하고 이주해서 그곳에서 자랐지. 사담 후세인의 박해를 피해서. 별문제 없이 스웨덴에서 잘 적응해서 평화로이 살고 있었어. 그런데 ISIS가 등장하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테러를 일으키면서 내 주변의 무슬림들이 불안에 떨기 시작했어. 그 광신도들이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넌 무슬림이 아니라 이해하기 힘들 거야. 그 소수의 망나니 같은 자들 때문에 유럽 내 전체 무슬림이 원치 않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사람들이 전에 없던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리낌 없이 보내기 시작했고. 그래서 ISIS를 증오해. 단 한 명의 ISIS 대원이라도 제거할 수 있다면, 이생에 여한이 없을 거라 다짐했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친구들과 함께 약 한 달 전 스웨덴을 출발했어. 시리아나 이라크에 가서 ISIS에 대항하는 민병대에 조인하려 했지. 부모님과 아내는 울며 말렸지. 그런 어리석은 집단 때문에 목숨을 그리 쉽게 저버릴 거냐고. 한데 우리 안의 분노와 그걸 억제 못하는 감정이 모든 이성적인 판단을 막았고 우린 개의치 않고 운전해서 남쪽을 향했고. 하지만 부다페스트 기차역에서 수많은 난민들, 특히 그들의 어린아이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약해지더라. 나에겐 다섯 살배기 아들이 있거든. 난민들을 보니 내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홀로 자라날 아이가 떠올라 더는 나아갈 수 없었어."


"함께 떠난 친구들에게 여기서 멈추겠다고 했지. 말하지 않아서 그랬지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더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ISIS 같은 세력이 이슬람의 본질을 흐려놓는 것을 묵인하면 오히려 후손들이 부끄러워할 거라는 신념으로 나와 또다른 한 친구를 빼고는 다들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했어. 우린 그들의 가족을 끝까지 돌보겠다 약속하고 작별했어. 다시 못 볼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자랑스러워."


"부다페스트에서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남은 우리는 대신 혼돈의 부다페스트 기차역에서 난민들을 돕기로 했어. 기본적인 통역을 도와주기도 하고, 그들에게 앞으로 계속 가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하기도 하면서 3주간 쉬지 않고 일했어. 최근 상황이 조금은 체계가 잡히고 경찰이 직접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할 일이 줄어들어 국경 지역은 어떤지 살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어."


예상을 완벽히 깬 이 우연한 만남에 숙연해졌다. 문득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지나치게 쉽게 일반화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대개는 정보 부족이나 더 크게는 무관심에서 비롯된 편견 탓인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단지 무슬림이란 이유로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았다는 수많은 친구들의 사연이 겹쳐졌다.


"자녀를 위해 여기서 멈춘 네 결정이 다행이야. 너 같은 친구들이 스웨덴에 돌아가 더 중요한 싸움—편견을 극복하는 싸움—에 나서야 해. 하지만 지금은 여기 있는 난민들이 너 같은 친구들의 존재가 너무나 고마울 거야. 조금만 더 힘내."


오래간만에 돌아온 부다페스트의 밤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친구들이 어디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더디게 지나갔다. 기차역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다 일단 시내 호스텔에 체크인했다. 사진과 영상을 정리하며 초조하게 기다리다 새벽 2시경 ;0 무스타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해리, 지금 부다페스트 기차역이야. 어디 있어?"

기차역에서 만난 그들은 억지로 미소 지었지만, 지난 몇 시간의 피로감이 그들의 표정과 몸짓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네가 국경에서 막혀 되돌려 보내진 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30분가량 더 기다렸어. 그러다 옥수수밭으로 들어가 한참을 걸었지. 어둠 속에서 자꾸 넘어지고, 비 온 뒤라 질척이는 땅을 걷기도 힘들었어. 주유소에선 한참 흥정하다 결국 200유로를 내고 온 거야."


"그래. 고생했어. 하지만 좋은 소식은 너희가 드디어 솅겐 유럽에 도착했어. 이제 다 끝난 거라고. 이제는 국경 검문 같은 게 없을 거라고. 원하는 독일이든 오스트리아와 독일로 가는 건 문제없을 거야. 일단 내가 묵는 호스텔로 가자. 같은 방에 침대가 몇 개 남아 있었어. 몇 시간이라도 쉬어야지. 아니, 무사히 도착한 기념으로 이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에서 하루 쉬었다 가는 건 어때?"


"해리, 희망 있는 얘기 해줘서 고맙지만 계속 가는 게 좋겠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난 정말 독일에 도착해야지만 안심하고 쉴 수 있을 것 같아. 더욱이 난민을 멸시하는 정부가 있는 헝가리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고."

바젤의 걱정은 또 한 번 옳은 것으로 곧 드러났다.


“It ain’t over till it is over(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은 마치 이들을 염두에 두고 나온 듯했다. 우리는 다음 날, 청천벽력 같은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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