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세계를 향한 렌즈: 분쟁지역의 침묵 속 희망

고향을 등진 불가피한 선택: 바다를 건넌 난민들 (8)

by 해리


비엔나에서 독일까지: 희망과 좌절 사이의 여정


9월 14일 아침, 부다페스트 역은 전날 밤의 적막감과는 대조적으로 수천 명의 난민들로 북적였다. 다들 피로가 짙은 표정들이었지만, 기나긴 여정의 종착점이 가까워졌다는 기대감에 눈빛만은 살아있었고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몇 시간의 기다림 끝에 우리는 헝가리 정부가 마련한 오스트리아 국경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친구들도 비로소 안도한 듯 긴장의 끈을 조금 풀기 시작하고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바젤이 독일의 한 지인으로부터 받은 소셜미디어 메시지가 이 달콤한 희망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독일 임시 국경 폐쇄"


주위의 다른 난민들도 각자의 지인으로부터 비슷한 메시지를 받기 시작했고 그토록 갈망하던 독일의 문턱에서 날아온 비보에 기차 안이 술렁거렸다. 현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했던 이들의 한숨과 함께 무거운 침묵으로 기차 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던 그들의 눈빛에서 깊은 허탈감이 묻어났다.

메르켈의 '열린 문' 정책 이후 독일은 하루에 천 명, 많을 때는 이천 명의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반이민 세력의 거센 비판과 급증하는 입국자를 감당할 수용 시설의 부족으로 독일은 결국 국경문을 닫기로 결정한 것이다. "임시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그간 수차례 지켜지지 않던 약속을 이미 경험한 난민들은 그 단어가 언제든 "영원히"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나는 정책 발표와 집행 사이의 간극을 기대하며 아직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말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위로조차 공허하게 들렸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독일의 문은 이미 닫혔다는 것을.

사기가 바닥을 친 채로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하차했다. 여느 국경처럼 걸어서 오스트리아에 입국하였는데 한 가지 다행스러운 변화가 있었다. 헝가리에서의 강압적이고 범죄자 취급하며 난민들을 몰아치던 군경과 달리, 이곳에서 난민들을 안내하던 오스트리아 경찰들은 꽤나 정중하고 배려심 있는 행동으로 도착하는 난민들을 대한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난민들이 고국을 떠난 후 처음으로 받는 “인간다운” 대우였을 것이다. 그간 늘 벌레 취급받으며, 마치 잠재적 사회악 존재인 듯 경멸이 담긴 시선을 받아가며 지내온 이들에게는 분명 위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 여유는 없었다. 혹시라도 국경 폐쇄가 집행되기 전일지 모를 거라는 희망에 한시라도 빨리 기차역에 닿아야 했고, 우리는 난민들을 위해 준비한 버스를 포기하고 택시를 잡았다.

비엔나 역에서 뮌헨행 표를 사려던 우리의 마지막 희망마저 매표소 직원의 한마디가 꺾어버렸다.


"난민들에게는 국경이 이미 폐쇄됐어요. 표를 사더라도 결국 국경에서 내리게 할 텐데, 실망시키는 것보다 지금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기차역을 나서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독일까지 불과 몇 시간. 하지만 우리는 또다시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다.

일단 시내 호텔에 방을 잡았다. 이곳은 난민을 차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직원들은 심지어 진심 어린 연민을 보였다. 오히려 자국 정부의 소극적 태도에 대한 아쉬움까지 표현하며 우리를 뭉클하게 했다. 그들의 따뜻함은 잠시나마 긴장의 끈을 풀어줬지만, 우리는 그다음이 뭘지 알지 못한 채, 일단 각자의 방에 들어가 몇 시간 동안 휴식을 취했다.


그날 밤, 여정 내내 막다른 길에서도 기어이 돌파구를 찾아내던 바젤이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일지 모를 희망적인 소식을 가져왔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 것 같아.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옛 친구가 연락해 왔어. 다마스쿠스 시절 친했던,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선 정착한 친구야. 독일로 이주한 이후로 자주 연락하진 못했는데... 내 트위터를 보고 자신이 도움을 주고 싶다고. 일단 여기로 오겠다고. 곧 출발한다고 했으니 8시간 정도 운전해서 내일 새벽쯤 도착할 거야."


계획은 위험했다. 그의 친구가 우리를 한적한 독일 국경 근처까지 데려다주면, 숲을 통해 밀입국한 후 국경 너머에서 다시 픽업해 난민 수용소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밀입국이 최선의 방법인지 고민했다. 만약 잡히면 오히려 공식적인 입국 기회마저 잃을 수 있었다. 친구로서 재고를 권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문턱까지 와서 자신들의 운명을 타인에게 맡기고 싶지 않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저 여태까지 그랬듯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행운을 빌어줄 수밖에 없었다.


독일


9월 15일 새벽 5시 30분. 바젤이 방문을 두드렸다. "친구가 도착했어. 가자."

텅 빈 비엔나 거리에서 아하메드와 인사를 나눴다. 일반 중형 세단 크기의 차량을 보고선 한 차량에 모두 타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그가 말했다.


"해리는 안 타는 게 좋을 것 같아. 되도록 눈에 안 띄어야 하는데 너무 많이 타면 국경 근처에서 의심받을 거야."


이성적으로 이해는 됐지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들이 독일 땅을 밟는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고 그때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긴 포옹을 나누며 그간 고생한 그들을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나만큼이나 친구들의 표정에서도 아쉬움이 느껴졌다.

루나는 "어차피 걸린다면 네 명이든 다섯 명이든 마찬가지 아니냐"라며 고집을 부렸지만, 그제야 조금 이성을 찾은 내가 말렸다.


"아냐, 아하메드 말이 맞아. 내가 너희가 독일행을 가로막는 원인이 되고 싶지 않아. 첫 발자국을 함께하고 싶지만, 독일에서 너희와 재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울 거야."


그들을 차에 태우고 문을 닫아주었다. 어두운 골목길로 멀어져 가던 차 뒷창문으로 손을 흔드는 그들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홀로 남겨진 비엔나 거리가 왠지 쓸쓸했다. 하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그들의 여정이 무사히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나는 짐을 챙겨 들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아하메드가 독일 쪽에서 친구들을 픽업하고선 우선 뮌헨 쪽으로 향하겠다고 말했었다. 국경을 건너고 다시 접선해서 픽업하는 과정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내가 뮌헨에 먼저 도착해 심지어 국경 근처로 이동해 이른 합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했지만, 뮌헨행 모든 기차표가 매진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차선책으로 뉘른베르그행 기차표를 끊었다. 2차 대전 후 독일 전범 재판이 열렸던 이 아름다운 중세 도시를 이런 식으로 다시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이스탄불을 떠난 지 2주. 늘 이 친구들과 함께였다. 레스보스에서 에테네로 가는 배를 같이 못 탔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24시간을 함께하며 같이 웃고 울고 좌절하고 희망했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보내다 보니 정이 들대로 들었다. 기차 안에서 그간의 시간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졌다. 혼자 피식 웃다가 가슴이 먹먹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들이 독일 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을 상상하며. 그들과 다시 재회하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 길게 느껴졌다.


이 여정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려 노력했다. 여정 중에는 약한 모습을 보일 여유조차 없었다. 쿠르디의 차가운 시신이 해변에 떠밀려 왔을 때조차 연민을 느낄 겨를이 없었고, 원하는 국가에 도착하고 나서 그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고 계획할 틈은 더더구나 없었다. 그저 오늘 하루를 어떻게든 목적지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집중해야 했고 눈앞의 상황에 대처하기에도 벅차게 하루하루를 꽉 차게 보낸 시간들이었다.


그들이 아는 유일했던 것은, 자신과 자녀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목숨을 걸고 유럽에 왔다는 것, 그리고 이제 돌아갈 곳은 없다는 것뿐이었다.

오후 4시경.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지가 도착했다.


"무사히 독일에 도착했어."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환호했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할게. 지금 파사우(Passau)에 있는데, 아하메드가 바로 난민센터로 가지 말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네. 원하는 독일에 왔으니 며칠 늦춘다고 안될 건 없을듯해. 다름슈타트(Darmstadt)로 올 수 있겠니?"


"지금 바로 출발할게."

뉘른베르크에서 다름슈타트로 가는 조용한 기차 안에서 나 혼자만 실실 웃고 있었다. 다른 승객들은 아마도 내가 실성했나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저녁 9시, 다름슈타트 역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는 그들을 보았다. 시리아와 이라크를 떠난 순간부터의 모든 고통과 좌절이 그 순간만큼은 증발해 버린 듯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한참을 하이파이브와 포옹을 나누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해냈어! 너희가 해냈다고! 아, 지난 열 시간 정말 피가 마르는 줄 알았어.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국경 근처 마을에 도착해서 아하메드가 우리를 내려줬어. 인근 숲으로 들어가 국경을 따라 몇 시간을 걸었지. 너무 조용해서 긴장했지만, 계속 걷다 보니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더라. 작은 강들을 건너다가 방향을 틀고, 미리 다운로드한 구글맵도 숲 안의 길을 보여주는 건 아니라 그저 독일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만 확인하며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국경을 건넌 걸로 표시되더라고.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밀입국을 해버렸어. 파사우까지 걸어가서 기다리고 있던 아하메드가 픽업해 여기로 온 거야. 한 8시간 걸린듯한데 그간의 긴장이 풀렸는지 오는 내내 잠만 잤어. 아하메드에게 좀 미안하게."


여정의 끝, 그리고 또 다른 시작


그들의 여정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 끝은 단지 더 길고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또 다른 여정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프랑크푸르트 역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바젤과 루나는 아하메드의 집에서 며칠 쉬며 난민 신청 절차를 조만간 시작하기로 했고, 두 무스타파는 원래 가려했던 벨기에가 이라크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소문(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을 듣고 목적지를 네덜란드로 변경해 나와 하루를 더 보내기로 했다. 바젤과 루나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와 작별 인사를 나눴고, 우리 셋은 기차역 플랫폼에서 이번 여정의 마지막 노숙을 했다. 지나가며 살짝 흘겨보는 이들에게조차 미소를 보이는 여유를 가질 정도로 벅찬 가슴으로 오래간만에 심적으로 가장 편안한 잠자리였다. 밤새 내내 꺼지지 않던 환한 기차역의 등과 이른 새벽부터 분주해지기 시작하던 기차역의 일상에 몇 시간 못 자고 깨어나니 문득 이제는 이들과 함께이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이 내 머릿속을 스치며 조금 감상적이 되었다.


집을 떠난 지 고작 2주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한 후 네덜란드에 돌아왔다. 돌아올 집이 있다는 그 안도감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진 동시에 고향을 떠나 낯선 환경에서 새 삶을 개척해야 할 수만 명의 난민들을 떠올리며 느낀 착잡함이 교차했다. 아하메드와 마찬가지로 나도 무스타파를 헤이그 집에 초대해 따뜻하고 편안한 하룻밤을 보내라고 제안했다. 하룻밤 보낸 후 보내기 못내 아쉬워 며칠 더 지내라고 했지만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난민 신청 절차를 시작하고 싶어 했고 바로 난민센터로 가 등록을 하겠다고 하여 그렇게 우리의 동행은 마무리를 하였다. 진한 포옹을 하고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그들이 불확실의 세계로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2015년 그 해의 나머지 가을과 겨울, 난민들의 경로를 따라 유럽 내의 여러 곳을 다시 방문했다. 헝가리 국경이 닫힌 후 심해진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의 병목 현상, 슬로베니아로 향하는 난민들, 레스보스 섬에 도착하는 사람들... 날씨가 추워지면 유동인구가 확연히 줄던 예년과 다르게 그 해는 한겨울에도 난민의 물결이 줄어들지 않았다. 추위와 매서운 바람이 그들의 여정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비가 올 때마다 어딘가에서 추위에 떨며 울고 있는 아이들과 그들을 달래는 부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8월과 9월의 혼돈의 시간이 지난 후, 난민들의 유럽으로 넘어오는 그 과정이 조금은 체계를 잡았다는 것이었다. 유럽뿐 아니라 멀리 미국이나 호주 등에서도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어 난민들이 여정을 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물품들을 병목현상이 벌어지는 여러 국경지대에서 공급했고, 발칸 국가들이 보다 난민들만을 위한 이동 수단을 마련했으며, 정부 개입으로 브로커와 현지인들의 불법적 착취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 유럽에 오려고 대기하던 모든 난민은 유럽의 난민 수용도 곧 한계에 이를 것이고 곧 문이 닫힐 것이라는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에 더 늦기 전에 하루라도 서둘러 목적지로 향하려 했다. 터키 브로커들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 간다"며 난민들을 위기감을 부추겼고, 보트가 침몰하는 위험에 더해서 거친 겨울바다를 건너며 저체온증의 부담에도 지중해를 건너려는 난민들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난민들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2016년 3월, 터키와 유럽은 난민 문제에 관한,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협약을 맺었다. 터키에 약 7조 원의 자금을 지원하고 터키 국민의 유럽으로의 무비자 여행과 유럽연합 회원국이 되기를 희망했던 터키의 바람을 진중히 검토하는 대가로, 터키는 난민들의 유럽 이동을 적극적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3월 20일 이후 그리스 섬에 도착하는 난민들은 원칙적으로 터키로 송환될 수 있다는 명확한 메시지였다.

이 협약은 여러 인권 단체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유럽연합의 결정은 쉽게 통과되고 적용되었다. 그 결과 터키에 여전히 머물고 있던 300만 시리아 난민들은 보호장치 없이 다가오는 몇 년을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터키는 유엔 난민 협약을 부분적으로만 따르며 난민들을 시리아로 되돌려 보내거나 취업 허가를 내주지 않는 등의 방식으로 그들을 불법적 저임금 노동 시장으로 내몰았다. 유럽연합은 책임을 터키에 전가하는 임시방편을 마련했을 뿐, 근본적 해결책을 찾는 노력을 사실상 멈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인구 이동이라 알려진 이 역사적인 이벤트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유럽에 정착한 난민들에게는 적응과 융화라는 또 다른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나와 함께 여정을 했던 네 명의 친구들은 일 년 가까운 시간을 난민 캠프에서 생활을 한 후에야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그 대기 기간 동안 네덜란드 남부와 독일 서부 쪽에서 여러 차례 거주지를 옮기던 그들을 몇 번 방문했지만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었던 그들을 목격하고선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길었던 그 인고의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내게 난민 절차가 승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줬을 때야 비로소 그들에게 가장 희망적인 열매가 주어진 듯하여 깊은 미소를 지었다. 그 시점으로부터 몇 달 후, 터키에서 친척들과 지내며 엄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루나의 미성년자이던 두 자식들 또한 가족 초청비자로 안전하게 비행기로 유럽에 올 수 있었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의 그 감격적인 재회의 순간을 위해 오랜만에 이 시리아 가족과 만나 포옹을 나누었을 때 나는 그들이 더 이상은 불안해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독일에서의 정착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결과적으로는 부분적인 해피엔딩이었다.

원하던 대로 두 자녀를 유럽으로 독일까지 데리고 온 루나와 바젤의 목적은 이루어졌지만 새로운 환경으로의 적응이라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 적응의 기간은 한 가족 내에서도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음이 틀림없었다. 몇 년 후 유럽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한 후, 마지막으로 그 가족을 방문하였는데 바젤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정착기는 예상보다도 길고 힘겨운 것이었고 그 와중에 루나의 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시도를 하기도 했고 바젤 또한 알 수 없는 이유로 공황장애를 심하게 겪으며 커다란 부침을 겪었다고 내게 뒤늦게 고백하였다. 조금 더 친구들의 안위를 신경 써서 챙기지 못한 나를 탓했지만, 바젤은 그 또한 이해해 주는 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다행히 아들 오베이다는 뜻하지 않게 다가온 도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 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이미 독일어를 꽤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본인의 뿌리를 잊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기회를 준 독일 사회의 일원으로 빠르게 적응하며 상대적으로 언어 습득이 늦었던 루나와 바젤의 적응까지도 돕는 성숙함을 보였다. 나이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없었던 두 명의 무스타파는 조금은 더 수월하게 적응한 듯했다. 나 같이 게으른 이민자는 6년 지내도록 제대로 배울 의지조차 없었던 네덜란드어를 난민 신청이 승인된 지 불과 일 년여의 시간에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익혔고 새로운 네덜란드라는 자신들의 모국의 사회구성원으로 정착하고 기여할 준비를 한 단계씩 밟아나가고 있었다.


난민의 숫자가 늘어나며 동시에 목소리가 커지던 난민의 유입을 반대하던 유럽 내의 극우주의자들이 늘 주장하는 것이 이들 난민들이 유럽을 이슬람 화하고 유럽의 전통가치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극적이고 불안감을 유발하는 포퓰리즘적 주장을 곧이곧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있는 사람이라면 실질적 현실이 어떨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목숨을 걸고 힘겹게 도달한 자신의 “새로운 모국”에서 난민 출신이라는 자격으로 생활하는 자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할지를. 대부분은 그 국가에서 나고 자란 국민들에 비해서도 오히려 그런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 국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훨씬 더 법을 준수하며 살아가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실상이라는 것을. 적어도 그 여정에서 만난 많은 난민들과 여전히 교류하며 종종 그들의 소식을 듣는 나로서는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반대편에 서있는 이들은 여전히 대중들의 불만을 교묘히 이용해 애꿎은 약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십상이다.


큰 맥락에서 이 시기에 일어난 대규모의 난민 이동이 추후에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오로지 더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판단할 수 있을 테지만 이 여정이 개인적으로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감히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내가 살면서 만들었던 결정 중에 가장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음은 분명할 테고 이를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 그때의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결정이었다고.

당시에 주변의 몇몇 이들은 그 여정에 따라나서고 심지어 보트까지 타기로 한 나의 결정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내게조차도 여전히 큰 의문이다. 그저 그 시기에 심리적이고 상황적이고 물리적인 여러 요인들이 맞아떨어져 나로 하여금 그런 큰 모험을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 줄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일 테다. 당연하게도 그런 큰 결정을 하기까지는 꽤 오랜 기간에 걸쳐 고민하고 결정을 한 것이었다. 난민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한 시점에서부터 그리고 그 방식이 조금은 개인적인 접근이었으면 했던 바람에서 시작되었고 준비과정에서 만난 난민들과 그들 주변의 인물들을 직접 만나 그들이 공유해 준 이야기들을 토대로 점점 그 이야기에 관여되어 가는 과정이 유기적이고 자연스럽게 느껴졌었다. 물론 선택의 여지가 없이 모든 걸 잃고선 목숨을 건 여정에 나서야 했던 난민들과 입장이 다르긴 했지만, 조금은 쉽고 과하게 감정이입되는 성향으로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과정에서 울컥하는 상황을 함께 겪으며 이 지구상에서 가지각색으로 살고 있는 인류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국가나 고향이라는 조금은 추상적이기도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단어들이 우리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이 여정이 내게 가져다준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여정에서 만난 수많은 영혼들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게 된다. 미미하지만 이 세상에 어떤 긍정적인 기운을 보태고 싶어 하던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을 보며, 어떻게든 틈만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냉소가 들어서려다가도 잠시 멈추고 그들의 기운에 동화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도 어떻게든 계속해서 살아나갈 이유와 방법을 찾아내고, 그 안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난민들의 회복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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