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서(Fixer)

by 해리

시리아 출신의 리나(Lina)를 처음 만난 곳은 이라크를 처음으로 방문했던 2016년 에르빌(Erbil)의 한 가정집이었다. 이라크에 속하면서도 실질적 독립을 유지하던 쿠르디스탄 자치 지역의 수도 에르빌은 특별한 도시였다. ISIS와의 전투를 취재하려는 외신기자들과 프리랜서 사진가, 비디오 저널리스트들이 몰려들었고, 인도주의적 위기(humanitarian crisis) 속 민간인들을 돕는 NGO 직원들, 그리고 상상조차 못 했던 목적으로 전쟁터를 찾는 이들의 거점이 되어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모술까지는 차로 불과 한 시간 반 거리였지만, 에르빌의 분위기는 비교적 차분했다. 치안이 전쟁터에 근접한 것치고는 안정되어 있어 모술 프런트라인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온 언론인들, 모술 가까이 세워진 임시 병원에서 전투 중 쏟아져 나오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녹초가 되도록 수술을 집도한 의료진들, 그리고 IDP(Internally Displaced People, 전쟁 등의 이유로 나라 자체를 떠나야 한 이들을 지칭하는 “난민(Refugee)”과 구분하기 위한 용어로 고향을 떠나야 했지만 아직은 국내에 머물고 있는 실향민들을 일컫는다)를 위해 급조된 캠프에서 일하는 직원들 등이 잠시 숨을 돌리러 오는 휴식처였다.


각기 다른 이유로 전쟁터를 향해 자발적으로 온 외지인들에게 에르빌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비분쟁지역”의 일상을 비슷하게나마 영위할 수 있는 도시였다. 카페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펍에서 술을 마시는 평범한 시간들이 가능했다.


독일의 하노버 출신 저널리스트 플로리안을 만나러 유럽 출신 친구들이 주로 모여 사는 그룹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 미소만 지으며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성이 바로 리나였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담하고 마른 체구의 짙은 갈색 머리의 여성은 스페인 배우 페넬로프 크루즈를 연상시키는 매력적인 외모였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게 조금은 불편하고 어색해 보였다.


어찌하다 주로 언론인 위주인 이 그룹하우스에 섞이게 되었는지 궁금하던 찰나에 눈치를 챈 플로리안이 내게 다가와 얘기해 줬다.


“연약해 보여도 아주 강단 있고 능력 있는 픽서야. 알아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 거야.”


한 방 먹은듯했다. 만약 리나의 직업을 맞춰보는 게임을 했다면, 픽서는 내가 가장 마지막에 떠올렸을 직종이었을 것이다.


‘체구도 작고 첫눈에도 내성적으로 보이는 이 여자가 마초적 에너지로 넘치는 전쟁터에서, 험한 곳을 다녔다고 잘난 척하기 쉬운 터프가이 언론인들을 데리고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방을 수없이 오갔다고?’


믿기 힘들었지만, 그녀는 조용한 존재감 속에서도 험지 활동 경험이 풍부한 이들로부터 존중받고 있었다. 그날 밤 리나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명함을 받아 들고 집을 나섰다.


저널리즘 세계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인 픽서(Fixer)는 외지에서 취재 목적으로 온 이들의 현지 활동을 효과적이고 원활하게 돕는 이들을 가리킨다. 우리나라 방송국에서 지칭하는 “코디(네이터)”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방송과 언론사에만 국한되는 용어는 아니다. 쉽게 말하면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픽서들의 역할이 결과물에 직접 반영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질 수 있지만,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이들은 픽서의 역할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안다. 적절한 통역을 통한 명확한 소통은 기본이고,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담아내기 위한 일정 관리, 보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해줄 인물 섭외까지 - 이 모든 것이 픽서의 역량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말 그대로 언성 히어로(Unsung hero), 숨은 공신이라 할 수 있는데, 그 환경이 전쟁터라면 그 의미는 훨씬 더 묵직해진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셰르파(고산 등반의 픽서라고 얘기할 수 있는)의 도움 없이는 그 어떤 등정도 불가능하듯, 분쟁지역에서 픽서의 역할은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아도 히말라야 셰르파만큼 절대적이다. 기본적인 통역은 당연하고, 최전방에 가고자 하는 언론인들을 위해 군부대 내 허가를 받는 일, 클라이언트의 안전을 위해 전투 후 매일 같이 바뀌는 점령지 변화와 위험지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일까지 - 정보력과 네트워크가 탄탄한 픽서일수록 인기가 높고 단가도 비싸지기 마련이다.


남성적 아드레날린이 넘쳐나는 전쟁터에서는 대체로 텐션이 높을 수밖에 없어 여성 픽서는 더욱 희귀하다. 내성적이고 적어도 겉으로는 지극히 여성스러운 리나가 어떻게 이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는 그 첫 만남 이후 큰 호기심으로 남아있었고, 그녀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시리아 다마스쿠스 출신 쿠르드족이었다. 내전으로 경제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이라크로 넘어온 사실상의 난민이었다. 대부분의 시리아 난민들이 더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하는 것과 달리, 그녀가 에르빌을 선택한 것은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합리적이기도 했다. 전쟁터에 가깝지만 치안이 안정되고, 쿠르드족에게 친화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었으니. 시리아에 남은 가족 중 유일하게 일하며 실제적 가장 역할을 하던 그녀는 동생의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더 나은 일자리를 찾다가 우연히 픽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계약


리나와 정식 계약을 맺고 함께 일하게 된 것은 그 첫 만남 이래 이라크를 두어 번 더 방문한 이후였던 2017년 5월이었다. 이라크 정부가 ISIS로부터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전투를 선언했지만 실제 개전까지는 몇 개월이 더 걸렸고, 그 사이 나는 비용 절약을 위해 전문 픽서 대신 가급적 현지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작업해 왔다. 하지만 에르빌에 돌아올 때마다 리나와 그녀의 룸메이트들과 어울리며 우정을 쌓아갔는데, 처음부터 일로 맺어진 인연이 아니어서 더 다행이었다.


픽서라는 직종은 아이러니하게도 무기상과 더불어 전쟁 때문에 번영할 수 있는 직업군 중 하나다. 자금이 넉넉한 영국 BBC나 미국 CNN 같은 해외 대형 방송국은 브레이킹 뉴스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런 언론사를 위해 일하는 픽서들은 일당 $1,000-1,500을 받을 정도로 한시적이나마 환경이 만들어낸 고수입 직종이었다. 특히 전쟁으로 일자리를 잃고 유엔 지원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이라크, 시리아 대부분 사람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큰 괴리감이 드는 이상현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20대 초반의 픽서들은 전쟁이 아니었다면 만져보지 못했을 돈을 쉽게 벌고는 에르빌에 돌아와 클럽을 전전하며 위스키를 병째 주문하며 돈을 흥청망청 쓰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리나는 이런 점에서도 차별화되는 친구였다. 상대적으로 요구하는 금액이 훨씬 적었을 뿐 아니라 클라이언트를 더 구하기 위한 욕심으로 지키지 못할 약속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대부분의 수입은 에르빌 생계비 정도만 제외하고 고향 가족에게 보내는 속 깊은 친구였다. 늘 초심을 잃지 않고 겸손하며 그만둬야 할 시기를 이미 깨닫고 픽서 이후의 삶을 고민하는 지혜로운 면이 있어, 나는 어리지만 그녀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녀대로 내가 다른 클라이언트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다른 클라이언트들과는 다분히 사무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개인적 이야기를 잘 공유하지 않는 내성적 성향이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내게 때로 고마움을 표현하곤 했다. 어찌 보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게 호기심 많은 내가 인간적으로도 끌린 리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지 못해서일 수도 있는데, 오히려 성향이 비슷한 덕분에 더 강한 유대가 형성되는 듯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로 관계가 자연스레 발전했고, 그 덕분에 추후 공식적으로 그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예외적인 선심을 쓴 이유이기도 했다.


홀로 동모술에서


가급적 픽서라는 카드는 정말 필요할 때만 쓰자는 것이 나의 접근법이었다. 티그리스강 동쪽 모술 영토를 대부분 회복한 후, 나는 에르빌에서 차를 렌트해 홀로 동모술로 가곤 했다. 동모술을 탈환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곳곳에 숨어있는 Sleeping cell(미처 퇴각하지 못한 ISIS 대원들이 일반 시민으로 위장하며 숨어있던 세이프하우스 같은 개념으로 간헐적 테러와 자살폭탄으로 이라크군과 시민들에게 타격을 입히는 요소) 때문에 치안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나처럼 홀로 픽서 없이 오는 외지인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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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전 초기에 모술 주변부 요지를 의외로 쉽게 포기하고 후퇴하던 ISIS도 전투가 모술 구시가지에 가까워지자 더는 밀리지 않겠다는 듯 훨씬 치열하게 방어하기 시작했고, 이라크군의 전진 속도는 더뎌졌으며 희생자가 속출했다. ISIS의 퇴각을 저지하기 위해 모술강을 잇는 모든 다리는 미군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정부는 늘어나는 이라크군 사상자 수에 비례해 최전방 허용 저널리스트를 극도로 통제되기 시작했다. 오로지 이라크군 최상위 지휘관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유능한 픽서들을 통해서만 허가가 주어지던 시점에 나는 리나에게 SOS를 쳤다.


리나는 꽤나 양심적인 픽서였다. 솔직히 함께 일하기 전까지는 그녀가 이라크군 현장 지휘관 최윗선까지 네트워크를 가진 몇 안 되는 픽서라는 것을 몰랐다. 자신의 희소가치를 이용해 얼마든지 높은 가격을 부를 수 있었음에도 다른 거대 방송국 픽서들에 비해 절반에 절반도 안 되는 비용(일당 $300)을 요구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녀와 인연이 닿은 것도 내게는 꽤 큰 행운이었다.


서모술에 갈 날짜를 정하고 며칠간 회의하며 준비하던 중 테운 이라는 네덜란드 사진가가 동행 문의를 해왔고, 나 역시 비용을 공유해 부담을 줄일 수 있었기에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조합은 나중에 피곤해질 인연을 스스로 초대한 꼴이 되어버렸다.


모술의 의미


수도 바그다드 다음으로 이라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모술이 ISIS에게 어떤 의미였기에 그들은 사력을 다해 지켜내고자 했을까?


2014년, 중동을 아니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부 바카르 알 바그다디가 이끄는 이슬람 수니 근본주의 세력이 급격한 조직화와 효과적 전략으로 시리아와 이라크 내 영토를 빠르게 차지하더니, 모술의 알 누리 모스크에서 바그다디가 “이슬람 국가(ISIS)”라는 이름으로 국가 성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라크는 1979년부터 24년간 독재한 사담 후세인이 축출된 2003년 이래 수니파와 시아파 간 내전과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시아파를 기독교인 이상으로 증오하는 급진 수니파 조직이 바로 ISIS였다. 당시에는 거의 민병대 수준에 가까웠던 이 조직이 시리아 내전 중 정부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시리아 북서부 지역의 군사적 공백을 파고들어 영토를 차지하고, 이라크 내에서도 수니파 득세 지역에서부터 성공적인 군사 캠페인을 벌이며 그 여세를 몰아 모술을 점령하러 몰려온 것이 2014년 6월의 일이었다.


2001년 미국 심장부인 뉴욕과 워싱턴 D.C. 에 전례 없는 피해를 입힌 알카에다 이후 가장 큰 중동발 반미·반서구 조직으로 성장한 ISIS의 실질적 수도 역할을 한 도시가 바로 모술이었다. 상징성 하나만으로도 중요했지만, 실제로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인근 석유 시설 확보로 조직을 지탱할 자금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ISIS 대항 연합군이 전투를 개시해 생산에 차질을 빚기 전까지 2년여 동안 ISIS가 석유만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연간 5억 달러(한화 약 7,000억 원)에 달했다. 또한 모술은 본래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던 보수적 색채가 강한 수니 무슬림 지역이었다. 수니파였던 후세인 축출 후 바그다드에 시아파 위주 정권이 들어서자 불만이 가득한 후세인 지지 세력이 다시 모인 곳도 모술이었기에, ISIS가 도시를 점령하러 몰려올 때 이를 지켜야 할 이라크 정규군이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못하고 미군이 지원한 최첨단 무기를 그대로 버려둔 채 줄행랑을 쳤고, 모술 시민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ISIS의 손쉬운 도시 점령을 바라만 봤다.


지역 내 무기고와 유전을 차지하며 자금줄을 확보한 ISIS가 국가 형태를 나름 갖추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모술 점령이었다. 석유로 인한 막대한 수입을 전투원 모집에 썼던 ISIS에 경제적인 이유로라도 가담하는 것이 크게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하지만 당시 모술 시민들이 예상하지 못한 점은 거대한 영토를 통제하고 그럴싸한 이름까지 부여한 이 조직이 1980년대 소련과의 전쟁 후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한 탈레반처럼 시대에 역행하는 극보수적 장치들을 마련하고 시민들을 숨 막히게 억압하는 공포 강압통치를 시작한 점이다. ISIS 지배 2년여 동안 심각한 인권 유린으로 모술이 퇴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치욕스럽게 패퇴했던 이라크군이 그때 무너진 자존심과 영토를 회복하려 절치부심한 것은 당연했고, ISIS의 수도였던 모술 탈환은 이라크군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시리아 내전과 더불어 ISIS의 영향력 강화로 인한 치안의 부재가 수많은 난민들을 발생시켰고, 결국 그들이 사랑하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


전쟁의 중심부로


몇 년 전부터 난민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건 그들의 여정을 함께하며, 나는 자연스레 그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직접 목격하고 싶었다. 그들이 도망쳐 나온 그 방향으로, 전쟁의 중심부로 가기로 결심했다.


리나와 모술을 향해 출발한 시기는 이라크군이 모술 탈환의 가장 상징적 승리가 될 알 누리 모스크까지 불과 3~4km에 접근한 때였다. 하지만 더는 물러설 곳이 없던 ISIS는 일반 시민들을 인질로 방패 삼으며 최후의 저항으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이라크 군은 그런 완강한 저항에 크게 고전하며 좀처럼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나와 테운과 함께 에르빌을 출발한 차량은 3시간 정도 지나 티그리스강에서 일단 멈춰야 했다. 에르빌에서 모술까지의 직진 거리는 약 50km에 불과했지만, 서모술에 닿기 위해서는 머나먼 우회로를 택해야 했다. 후퇴하는 ISIS 대원들의 퇴각로를 막기 위해 미국 폭격기들이 모술 내 티그리스강 위 다리들을 폭격해,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모술 서쪽 도심에 가기 위해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은 모술의 남쪽 약 50km 지점의 수십 개 철판 플랫폼을 연결하여 만든 임시다리뿐이었다. 이 지점까지도 난민으로 위장한 ISIS 대원들을 가려내기 위해 무수한 체크포인트를 거쳐야 했기에 그만큼 시간이 더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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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한 대밖에 지나갈 수 없는 이 좁은 임시다리로 모술을 빠져나오는 민간인들과 차량이 끊임없이 이어져, 반대방향으로 가려던 소수인 우리는 이라크군 부대 차량이 도착하면 함께 건너라는 지휘관 지시에 몇 시간을 기다리며 우리 쪽을 향해 차량에 물건을 가득 실은 채 넘어오는 피난 대열을 바라보며 차례를 기다렸다.


피난민들은 하나 같이 다 지쳐 보였고 무표정했으며, 그중 간간히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사람들과 부모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걸어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익숙했다. 이미 목격한 유럽으로 향하던 난민들의 표정이 이렇게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겠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전쟁 시 한강을 건너려던 피난민들의 표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문득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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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우리 쪽으로 오던 행렬이 잦아들었고, 그곳 지휘관은 재빨리 군용 차량과 장갑차, 그리고 우리를 태운 방탄차들을 건너게 했다. 다리를 건너 강을 따라 모술을 향해 북상해 도시 중심부에서 대략 10km 떨어진 세이프하우스에서 일단 멈춰야 했다.


더 이상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전투가 너무 치열하고 이라크군 희생자가 많아 언론 관련 종사자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말라는 지휘부 명령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외국인이 행여라도 전투 중 죽거나 다치면 그 책임이 어느 정도 현장 지휘부에 떨어질 것이고, 더 중요하게는 아군이 희생당하는 모습을 언론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사기 문제였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군대와 언론의 관계는 늘 미묘하다. 역사적으로는 보통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갖게 된다. 머나먼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접한 후 반전 운동이 극심해지며 미국 정부의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후로는 전쟁터에서 언론을 통제하려는 군대와 진실을 알리려는 언론의 숨바꼭질 같은 게임이 본격 시작되었다. 정부의 의견에 많이 영향받지만 통제가 심해진 이런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이들이 픽서이다.


그 세이프하우스에서 모인 전 세계 저널리스트들은 각자 고용한 픽서가 능력을 발휘해 최전방으로 갈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이번 경우에는 이라크군의 피해가 너무 컸던 모양인지 우리 모두 그렇게 이틀밤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림의 예술


전쟁을 겪으며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아마도 그 기다림에 관한 것이다.


전투 중에는 모든 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순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런 치열함의 시간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큰 맥락에서 상대적으로 적고, 훨씬 더 많은 시간은 그저 기다려야 하는 것이라는 점. 이런 기다림의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이어서 어떤 계획을 짜기에 최악의 환경인 것이다.


이렇게 공치는 날도 클라이언트와 픽서 간의 계약 일수는 차감된다. 항공편이 기상 악화로 결항되어도 항공사가 책임지지 않듯, 픽서가 통제할 수 없는 접근 불허 상황은 그들의 과실이 아니다. 그 시간들 역시 그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고용주들은 자신의 운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인다. 하지만 회사에서 그 비용을 대주는 이들에 비해, 프리랜서들에게는 그 부담이 결코 가볍지 않다.


당시 세이프하우스에는 우리 팀 외에도 다른 픽서들과 온 다섯 팀 정도가 함께 머물고 있었다. 테운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타이트한 스케줄로 일주일 후 유럽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돈을 들여 여기까지 온 성과가 없다며 픽서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처음엔 리나에게, 그리고 결국에는 주변 모든 픽서들에게 불만을 쏟아내며 순식간에 그곳에 있던 대부분 이들이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 되었다.


진상은 어디든 있는 법인가. 에르빌을 떠나기 전 자신의 전쟁터 경험담을 끊임없이 늘어놓던 이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곳에서 일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황된 것인지를.


계속해서 픽서들을 괴롭히는 테운에게 참다못해 한 마디 했다.


“뭘 기대하고 온 거야? 며칠 프런트라인에서 시간을 보내면 드라마틱한 광경을 목격할 거라고? 여기 픽서들이 우리를 못 들어가게 막는 것도 아닌데, 지금 아무에게도 도움 안 되는 짜증의 포인트가 뭐야? 많은 전쟁터를 가봤다면서? 그럼 이런 기다림은 당연한 거고, 애초에 며칠만 계획하고 온 너에게도 책임이 있는듯한데? 이러고선 돌아가서 이 분쟁에 대해 다 안다는 듯 포장할 거야?”


다행히 테운은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지 않았다. 다른 팀을 이끌고 온 픽서 마지드가 내게 넌지시 다가와 말했다.


“고마워. 네가 나서지 않았으면 내 주먹이 먼저 날아갔을 거야.”


세이프하우스에서의 사흘째, 드디어 최전방 진입 허가가 떨어졌다.

그 이후의 며칠간은 내가 살면서 목격한 가장 끔찍한 광경들의 연속이었다.


계약 종료일이 다가왔고, 테운과 나는 이틀을 연장하기로 했다. 그 이후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니, 사실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며칠간 목격한 것들로 만족한 테운은 짜증 내며 모두를 힘들게 하던 시절을 잊은 듯 한결 친화적인 태도로 에르빌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 미완성된 느낌에, 왠지 그곳에 더 머물러야 한다는 필요를 느꼈다.


문제는 테운과 함께 들어왔기에 한 팀으로 움직여야 했고, 유럽행 비행기를 예약한 그를 에르빌까지 데려가야 하는 픽서 리나의 스케줄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픽서가 마련해 준 경로로 최전방에 온 이들에게는 불문율이 있었다.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는 것. 첫째, 픽서를 담보로 외부인의 입장을 허가한 군이 픽서 없는 외부인데 대한 책임소재를 묻기가 어렵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픽서의 연줄과 노력으로 데려온 클라이언트가 픽서 없이 현장에 있다는 것은 곧 그 픽서의 수입 감소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픽서-클라이언트 관계라면 생각조차 못했을 테지만, 나는 그간 리나와 쌓은 인간적 관계에 기대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쟁터에 혼자 남겨달라는 부탁


“리나, 나 남아도 될까?”


“절대 안 돼!”


“보통은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부탁할게. 너무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며칠 만에 나가서 언제 또 들어올지 모르잖아. 솔직히 너와 일하고 나서 다른 픽서는 이용하고 싶지 않아. 지난 며칠간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봤잖아. 절대 너를 곤란에 빠뜨리는 행동은 하지 않을게.”


그간 어느 정도 신뢰가 쌓였기를 바라며, 클라이언트보다는 친구로서 예외적인 결정을 해주기를 바랐다. 다행히 간절한 나의 눈빛으로 그 진심이 닿았는지 그녀는 나를 한참 바라본 후 말했다.


“정말 나를 괴롭게 만드는구나. 해리가 잘못 안 해도 사고가 나면 누구 책임인지 알지? 하지만 왜 그러고 싶은지는 알겠어. 남겨두는 대신 두 가지만 약속해 줘. 알리 소령 곁에서 단 1미터도 떨어지지 마. 병사들이 자기 지휘관만큼은 지키려 할 테니 그나마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법일 거야. 그리고 나중에 다른 저널리스트들한테 내가 너에게만 특별 대우 해줬다고 얘기하지 않기다. 테운 데리고 에르빌 돌아가서 좀 쉴 생각이야. 일주일 후에 다른 그룹 데리고 돌아올 건데 그때는 뭐라고 해도 함께 나가는 걸로 약속해야 돼.”


“물론이지. 그때면 아마 내가 씻고 싶어서라도 나가고 싶어 할걸?”


농담은 했지만, 더 큰 책임감으로 리나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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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가 떠난 후, 나는 홀로 5일간 알리 소령의 부대와 함께하며 벌어지는 모든 일을 촬영하고 기록했다. 다행히 이라크군이 주로 공격하는 입장이라 전투는 이라크군이 개시할 때 주로 벌어진다는 것이어서 전투가 언제 벌어질지 예측 가능했고, 군인들도 휴식 시간을 가지며 다음 전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반면 방어하던 ISIS는 서서히 조여 오는 공격에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리나가 떠난 첫날밤 병사들에게 휴식이 주어졌고, 나는 일반 병사들과 버려진 집의 큰 방에서 조금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잠을 청하거나 모바일폰을 보고 있을 때, 나는 먼저 친근하게 다가가는 의미로 가방 속 아끼던 위스키가 담긴 플래스크를 꺼내 함께 마시자는 제스처를 보였다. 모든 소통이 몸짓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간단한 인사말 외에는 아랍어를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 시간이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졌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원활한 소통은 불가능했고, 나는 그들에게 철저히 목숨을 의존해야 하는 그 상황. 서울의 평범한 중산층에서 자란 내가 참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에 위삼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알리 소령의 최측근 참모로 지위가 높은 부사관쯤으로 보였는데, 40~50명의 부대원 중 나와 테운에게 드러내놓고 적대감을 보이던 인물이었다. 뼛속까지 마초적인 성향의, 상관 외에는 누구 말도 들을 것 같지 않은 인물처럼 느껴졌고, 내가 아랍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내 앞에서도 대놓고 좋지 않은 멘트를 직접 또는 주변 병사들에게 던지곤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우리 관계에 극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곁눈질로 나를 주시하던 위삼은 내가 건넨 플래스크를 받더니 그 안의 위스키를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 내 의도는 방에 모인 모든 병사들과 몇 모금씩 나눠 마시자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로 받은 위삼이 혼자 몇 초만에 끝내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다른 병사들이 환호를 하고 방은 갑자기 활기를 찾았다. 그를 바라보며 내가 한 첫마디는 “fxxx you!”였다.


그 순간적인 욕설은 우리 모두를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계속 어이없어하며 위삼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나를 보며 병사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위삼도 처음엔 근엄한 척, 아무런 일 없었다는 척 나와 눈을 피하다가 이내 자신도 그 상황이 웃겼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작은 에피소드로 우리 사이의 벽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이 일은 빠르게 다른 부대원들에게도 알려졌고, 한동안 모든 병사들은 나를 보면 위스키 마시는 흉내를 내며 키득거렸다. 위삼은 그 이후로 나의 절친이 된 듯 행동하며 마치 “너는 내가 보호한다”라는 뉘앙스로 챙기기 시작했다.


마치 낮에만 전투를 벌이자고 양측이 무언의 합의를 한 듯, 몇십 미터라도 전진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공격하고 밤에는 공세를 늦추는 마치 직장인이 회사에 다니듯 날마다 똑같은 루틴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나 또한 그 리듬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는데 5일째 되는 아침, 일어났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대개 이른 새벽 분주히 무기를 챙기고 탄창에 총알을 끼우는 루틴으로 분주했던 병사들이 여전히 어두운 방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위삼이 자던 자리를 봤지만 그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다시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미동하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다.


해가 뜨려는 시간에 일어나 옆방을 갔지만 마찬가지였다. 알리 소령이 숙소로 쓰고 있던 옆 건물을 가니 그의 군화가 보이지 않아 불길한 생각에 에르빌의 친구 아달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부대원에게 전화기를 건네준 후 잠시 얘기하던 아달란은 내게 말했다.


“알리 소령이랑 참모들이 휴가를 갔대.”


“뭐?!? 무슨 소리야?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안 하고? 전투 한창 중에 웬 휴가? 적이 이때를 노려 반격하면 어쩌라고?”


“나름 계산을 했나 봐. 모술 탈환 막바지에 지금이 잠시 휴식을 취할 적기라고. 병사 말이 적군도 지난 일주일 동안 정신없이 두드려 맞아서 이쪽에서 공격을 잠시 멈추면 오히려 고마워하며 차마 섣불리 행동하지 못할 거라고. 그들은 지휘부가 현장에 없다는 걸 모를 테고, 만약에라도 반격하면 모든 지휘관들이 즉각 복귀할 거고. 아마 3~4일 후에 돌아올 거래”


리나가 남기고 간 단 하나의 임무를 실패했다. 하지만 분명 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홀로 떠나는 길


‘이제 어쩌나?’


가장 이성적인 대답은 남아있는 병사들 사이에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알리 소령이 복귀하거나 리나가 다른 그룹을 데리고 돌아올 때까지.


‘아니면?’


지난 일주일간의 루틴을 좀 깨고 싶었다. 전투를 따라나서고 풀려나오는 시민들을 목격하며 아주 조금씩밖에 전진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한두 주 더 있어도 크게 변화할 건 없을 것 같았다. 모든 저널리스트들은 상징적인 알 누리 모스크가 함락되는 순간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곳이 ISIS가 지키려는 마지막 방어선이었고, 항복하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든 그곳이 함락되는 순간 모술 전투는 끝나는 것이었다. 이라크 정부는 며칠 안에라도 모스크를 탈환할 수 있다고 선전했지만, 현장에 있는 우리는 마지막 2~3킬로미터를 전진하는 데 의외로 꽤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걸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최전방에서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이곳에서 나가겠다고.


분위기상 아무에게나 안전지대까지 데려달라고 할 수 없었고, 부탁해도 들어줄지 모르겠어서(거기다 말도 안 통했으니) 첫날 곧장 최전방까지 장갑차를 타고 들어오느라 모술 시내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을 혼자 나가면서 촬영하고 싶기도 했다.


어떻게? 걸어서.


장갑차로 들어올 때 그리고 중간에 내려 도보로 이동하며 모바일 지도 앱에 어디서 턴하고 어느 지점에 스나이퍼가 있어 우회해야 하는지를 일일이 표시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그대로 되돌아가면 도시 외곽의 지휘통제부나 심지어 며칠간 지냈던 세이프하우스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재 위치에서 멀어질수록 조금씩 더 안전해질 테니, 처음만 바짝 긴장하고 무사히 넘기면 그 후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쨌건 도시 전체가 다 파괴되고 시민들이 이미 많이 피난을 가서 텅 비어있지 않은가?


결심이 서자 더 지체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떠나기로 마음먹고 짐을 챙겨 이제 막 깨어나는 몇몇 병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철저히 파괴된 길거리로 나왔다.


폐허 속 걸음


너무나 고요했다. 전쟁 전 백만 명 이상이 살던 이라크 제2의 도시라고 하기에는 무너진 건물 잔해를 조심스럽게 밟는 내 발자국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출발 후 첫 몇 블록은 대부분 집과 집을 연결한 통로를 거쳐야 했다. 적군의 사격 범위 안에 있었고 그들이 남겨둔 스나이퍼들도 있다고 믿었기에, 노출된 거리보다는 가급적 집과 집을 나누던 담벼락을 부수고 만든 임의로 통로를 이용해 이동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아무도 없는 누군가의 사적인 공간을 그렇게 지나가는 느낌은 굉장히 이상했다. 조금은 투명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실제 주민이 피난 가기 전 살고 있던 그 공간의 광경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모든 물건이 흩어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떠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텐데도 마치 몇 년간 폐가로 남겨진 듯 섬뜩한 느낌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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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용히 주위를 살피며 앞으로 나아가다 곳곳에 남겨진 병사들과 마주치면 모두 조금 긴장했다가 다시 경계를 풀곤 했다. 중간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건너야 할 때는 들어올 때처럼 양옆을 살핀 후 마치 얼마나 빨리 그 거리를 건너는지에 내 목숨이 달린 듯 내달려 건너편 집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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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그렇게 버려진 가정집과 거리를 걸어 나오자 조금 큰 거리가 나왔고, 그제야 가장 위험한 핫존은 벗어났음을 깨닫고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속도를 늦췄다.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아직 모술에 남아있던 주민들도 한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모두가 대피해야 할 때 어떤 이유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거나 남아있기로 결정한 이들일 것이다. 그들은 반대로 예상치 못한 나의 출현에 조금 놀란 듯하던 일을 멈추고 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계속 눈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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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모술강 동편에서 혼자 다니다 군인들에게 붙잡혀 심문당할 때 그들이 하던 얘기가 생각났다. 긴 머리에 턱 주위로만 수염이 있는 나의 스타일이 흡사 ISIS 병사들의 일반적인 외모와 비슷하다고. 그리고 중앙아시아 이슬람권 국가에서 그룹에 합류하는 병사들이 간혹 있는데, 아랍 사람들은 동양에서 온 나와 구분을 잘하지 못해 오해할 수 있다고. 나를 바라보던 모술 시민들은 분명 내가 어디 숨어있다 나온 중앙아시아 출신 ISIS 병사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폐허가 된 거의 텅 빈 모술 시내를 이제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걸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걷던 대로 반대편 백여 미터 앞에 한 군인이 보였다. 순간 곧 곤란한 상황에 빠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잠시 움찔했고, 그를 못 본 척 다른 골목길로 몸을 숨길까 고민했지만, 그는 그런 나의 생각을 아는 듯 그저 나를 주시하며 암묵의 한마디를 건네고 있었다. 다른 생각 말고 그대로 자신에게 오라는 듯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콧수염을 가진 인상 좋아 보이던 소령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적어도 적대적이지는 않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는 찰나 그가 내게 영어로 말했다.


“난 당신의 눈빛에서 당신이 용감한 사람이라는 걸 볼 수 있어.”


“???”


“모술의 이 부분을 당신처럼 홀로 걸어 다니는 외지인은 없어. 아무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은 다른 누구보다 내가 당신을 먼저 찾았다는 거고, 나쁜 소식은 지금 내 상관이 엄청 화가 나있다는 거. 누군가 지휘부에 보고를 했어.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레드존을 걸어 다니고 있다고. 지금 당장 잡아오라는 명령이야. 어느 부대와 함께 있었고, 당신 픽서는 어디 있어?”


그날 오전까지의 일을 간략히 얘기해 줬다.


“알리 소령? 휴가 가지 않았나? 유능하고 좋은 군인이지. 한데 너무한데? 당신에게 얘기도 안 하고 그렇게 가버린 건? 뭐라고? 픽서가 여기 없다고? 좀 어리석지만 대단한데? 여하튼 장군한테 직접 설명해야 될 거야. 난 당신의 대담함을 높이 사서라도 한 번 넘어갔겠지만 대령은 요새 엄청 민감해. 현장 통제 못하는 지휘관으로 보일까 봐.”


장군과의 대면


5분쯤 걸으니 한 공터에 군인들이 모여있었고, 가운데 임시로 놓인 테이블에 앉은 이들 중 누가 지휘관안지는 그의 표정만으로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나를 발견한 소령은(그의 이름도 알리였다) 영어를 꽤 잘하는 포격부대 담당 참모였고, 그는 나를 위해 통역을 해주었다. 주위 모든 참모들에게 고성으로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명확히 보여줬던 그는 정작 내게는 싸늘한 눈빛만 보이고 직접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사실 그 점이 더 두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염려하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그는 내게 휴대폰을 건네주며 나를 이곳에 데려온 픽서에게 전화를 걸으라고 했다.


‘리나가 나를 죽일 거야. ISIS가 아니라 그 여자가 나를 죽일 거야.”


신호가 울리기 시작하자마자 전화기를 뺏듯이 가져가 장군은 리나가 전화를 받기 무섭게 소리를 질러댔다. 무슨 얘긴지 뻔했다.


그런데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일 분여 간을 분노를 쏟아내던 장군이 서서히 리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점차 화가 누그러지더니 통화 마지막 일분은 방금까지 자신이 왜 격분했는지조차 잊은 듯 웃음을 터뜨리며 유쾌하게 마무리했다.


장군이 전화기를 내게 건네주었다.


“리나, 정말 미안해. 근데 믿어줘. 알리가 그냥 사라졌어. 그리고…”


“어이구, 됐어. 너 나한테 빚졌어. 대령은 걱정하지 마. 더 크게 문제 만들지 않을 거야. 대신 지금은 거기에 더 머물지 못하게 할 거라고 하네. 우리 이전에 대기했던 세이프하우스로 보내겠다고 했으니 거기서 이틀만 더 기다려. 곧 돌아가니까.”


전화를 끊은 후 리나가 어떻게 장군의 분노를 그토록 쉽게 풀었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알리 소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더 설명하겠어. 리나는 지휘관이든 병사들이든 모두에게 인기가 좋아. 우리 모두 그녀를 좋아하거든.”


남성적인 에너지가 지배하는 전쟁터에서 리나 같은 여성성의 희소가치를 새삼 깨달으며 감탄했다. ‘리나가 내 친구이자 픽서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


장군은 알리를 통해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ISIS로 오해받아 구금되었던 일과 위삼과의 위스키 에피소드를 들려주자 그는 크게 웃으며 자신의 부하들이 나에게 기억할만한 시간을 준거 같다며 흡족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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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위삼이 너를 그렇게 챙기려 했다는 건 다행이야. 내가 그의 부하가 아니라 상관이라는 것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좋은 군인이지만 그가 그가 나의 보스라고 생각하면… 그 성격을 어떻게 맞출지, 참 까다로운 친구건 모두가 알고 있으니.”


나를 세이프하우스에 데려갈 차량이 도착했다. 거대한 덤프트럭이었다. 적의 눈을 피해 인원을 이동시키려는 목적인지, 아니면 혹시 있을지 모를 총격을 막기 위함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올라타니 이미 몇몇 병사들과 다른 외국 저널리스트들이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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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쓰레기로 위장한 채 남쪽으로 모술공항을 지나 십여 킬로미터를 달려 익숙 세이프하우스에 도달하였다. 함께 탔던 저널리스트들은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타고 바로 에르빌로 향했고, 나 홀로 몇몇 병사들이 쉬고 있던 세이프하우스에 들어갔다.


그제야 지난 며칠간 목격한 광경들과 그 아우성이 메아리처럼 한꺼번에 돌아와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틀 후 리나가 새 그룹을 데리고 돌아오면 나는 다시 최전방으로 들어가 며칠을 더 보내야 할 텐데, 그 순간만큼은 잠시 그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나에게 전화해 여기서부터는 비교적 안전할 테니 직접 차량을 구해서 에르빌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고, 그녀는 그럼 돌아와서 그날 저녁 에르빌에서 보자고 했다.


사막 바람 속의 사색


다시 짐을 챙겨 에르빌로 향하는 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이내 독일 언론인들을 태운 차량이 멈춰 섰고, 보조석에서 내린 이는 다름 아닌 픽서 마지드였다. 그는 반갑게 맞아줬다.


“트럭 안에는 자리가 없지만 뒷칸에 타는 것도 괜찮으면 같이 가자.”


“난 괜찮아. 오히려 세 시간 동안 덜컹거리는 도로에서 찬 에어컨 바람을 맞는 것보다 사막 먼지와 신선한 공기가 훨씬 낫겠어.”


트럭 짐칸에 앉아 멀어지는 모술을 바라봤다. 곳곳에서 여전히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산발적인 총소리와 포격 소리가 그 먼 거리에서도 비교적 선명하게 들렸다. 나오는 길 곳곳에는 피난민들을 더 안전한 지대로 옮기기 전 임시로 머물게 하는 캠프들이 보였고, 끊임없이 사람들이 트럭이나 버스에서 내리고 올라타고 있었다. 그런 곳에 있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한 차원의 세계에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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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ISIS가 격퇴되면 바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들이 떠났을 때는 그래도 내가 목격한 만큼 집안이 엉망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 폐허로 돌아가면 어떤 심정일까? 전투가 종결됨과 동시에 수많은 언론인들은 또 다른 분쟁 지역으로 떠날 테고, 모술은 재건이 시작되기도 전에 잊혀질텐데… 도시를 정상화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온갖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에르빌로 들어가는 말끔한 도로가 눈에 들어왔고, 이미 나는 모든 건물이 멀쩡하게 서 있는 문명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리나와 저녁을 함께하며 그간의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난 그녀가 내게 보여준 친절과 예외적인 호의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고, 그녀는 그저 내게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나와서 다행이라고 담담히 답했다.


가끔 운이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


이틀 후, 리나가 새로운 그룹을 데리고 모술로 돌아가기로 한 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해리, 소식 들었어? 네가 나오지 않았으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그 세이프하우스가 ISIS의 공격을 받아서 병사 두 명이 사망했데. 우리도 그리로 오늘 가기로 계획했다가 정부가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모든 진입을 차단해서 일정이 연기되었어. 해리는 어떻게 그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어?”


리나와는 연을 놓지 않고 그 이후로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우리의 마지막 만남 후 일 년쯤 지나 그녀는 룸메이트였던 체코 출신 다큐멘터리 감독의 도움으로 비자를 얻어 현재 프라하에 거주하고 있다. 여전히 이라크와 시리아로 향하는 수많은 저널리스트와 NGO 활동가들이 안전하게 분쟁지역으로 데리고 가고 있고.


이들 픽서들이 없었다면 나의 모술 경험은 분명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아니었다. 생사가 갈리는 순간마다 나를 보호해 주고, 문화적 장벽을 허물어주며, 때로는 목숨을 걸고 외국인 저널리스트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들이었다.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저널리스트들에게 픽서는 생명줄과 같은 존재다. 그들의 헌신과 용기 없이는 세상이 알아야 할 진실들이 묻혀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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