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서 찾는 의미
쉬려고 떠나온 여행이었다. 최선을 다해 쉴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 그러나 낯선 도시는 예상을 뛰어넘는 운동량과 시간을 필요로 했고 나도 모르는 새 피로가 쌓여갔다. 3일째 날이었나, 근교로 당일치기 여행을 마치고 10시가 넘어 상벤투역에 도착했을 때는 숙소가 2분만 더 먼 거리에 있었다면 어떡했을까 싶을 정도로 에너지가 방전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꼭대기층 내 방으로 등산하듯 올라와 텁텁한 실내 공기를 환기시킬 요량으로 창문을 열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쉬러 온 여행에서 지쳐 쓰러지는 꼴이라니, 스스로에게 어이없어하면서 한동안 그렇게 멍하고 앉아 있었다. 온몸으로 느끼던 중력이 서서히 사라지고 공중에 몸이 떠오르는 듯 욱씬대던 근육들이 아련하게 느껴질 즈음, 내 눈은 어느덧 창문으로 들어오는 거리의 붉은 불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예쁘다는 말로는 표현 안될 것 같은 아름다운 방 안의 적막이 밤공기 속에 더 선명하게 울리는 거리의 소리와 대비되어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슬며시 웃음이 난다. 여행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드니 이제야 마음도 좀 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 사진첩은 매일 아침 숙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사진으로 시작되어 해 질 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의 순간은 늘 하루의 시작과 끝에 있다는 듯이. 마치 그걸 하루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나는 꼬박꼬박 하루의 시작과 끝을 기록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늘 아침을 챙겨 먹고 다니는 나는 약속이 있지 않은 한 저녁을 잘 먹지 않아서 하루 중 오전 시간에 뭔가를 제일 많이 먹는 편이다. 여행 중에도 아침을 먹고 나서 일정을 시작하기 때문에 첫 끼는 그 날의 질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숙소 근처 카페에서 먹는 브런치도 좋고 가볍게 라테와 함께하는 갓 구운 크로와상도 행복이다.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가이드 책이 알려주는 식당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예쁘고 아담한 카페를 보게 되어 계획을 변경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말이다. 이런 경우는 하루가 사랑스럽게 풀리곤 한다. 아니면 기분이 좋아진 내가 모든 문제를 사랑스럽게 보는 것일 수도 있겠고. 어느 쪽이든, 행복이다.
이번 여행 중에는 내 생일이 끼어있었다. 1월 1일같이 모두가 함께 기념하는 달력의 시작이 아닌 나에게만 특별한 한해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타지에서 혼자 기념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여행 내내 먹는 것만큼은 소홀하지 않게 챙기고 있었지만 조금 더 특별하게 기념해볼까 하는 생각 중에 가져간 가이드 책자가 소개하는 어느 유명한 와이너리의 트렌디한 루프탑 레스토랑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근사한 식사를 해야겠다며 야심 차게 방문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헛웃음 한번 내뱉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 한눈에 봐도 나와는 맞지 않는 분위기.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게 매번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 근사한 파티가 나에게 소란스럽기만 하고 피곤할 수 있는 건 당연한 거다. 굳이 그걸 이겨내 가며 취향을 꺾을 필요는 없는 거다. 굳이 새로움을 매번 추구할 필요는 없는 거다.
그곳을 나와 조금 더 걷다가 도우루 강의 석양이 잘 보일법한 강가의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야외 테라스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지만 쉬기에는 실내가 나을 것 같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주문을 하고 내일 할 것들을 정리하며 가만히 석양을 구경하고 있자니 내가 기대했던 일 년의 끝에 가까워진 것 같다. 이 여행을 마지막으로 지나간 한 해를 추억 삼아 조금 더 여유롭고 성숙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올 한 해도 수고했어.
하루의 시작과 끝. 일 년의 시작과 끝. 그리고 여행의 시작과 끝. 조금 익숙해질 만하면 끝나고 시작되는 것이 반복되어 인생이 되는 건가 싶다. 그것 또한 하나의 커다란 시작과 끝. 나는 여전히 익숙해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