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랑 Sep 10. 2017

일기41_노스탤지아에 대하여

그것은 마치 현대인의 지병같은 것





뿌리가 없는 사람은 평안하게 살 수 없다. 고향을 떠나 사는것이 일반적이 된 현대인은 늘 '돌아갈 곳'을 그리는 마음인 노스탤지아(nostalgia)를 안고 산다. 돌아갈 곳을 잃은 '실향민'이라는 단어에서 진한 슬픔이 배어나오는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부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와 오빠는 아버지의 첫 직장이 있던 구미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부모님에게도 나에게도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어린 나와 오빠에게 '너희의 고향은 부산'이라고 주입시키셨고 한동안 그렇게 답하기도 했다. 이후 몇년간은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살기도 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 말 부터 약7년은 대전에서 보냈다. 하여 지금까지도 (서울에서) 만나고 있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고향이 대전이다. 그렇다고 나 또한 대전을 고향이라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고향이 어디냐는 단순한 물음이 나에게는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 중 하나이다. 의미없이 짧은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부산이라하지만 자세히 묻는 사람에게 지금껏 살았던 도시를 늘어놓으면 아버지가 군인이시냐고 묻는다. (전혀 아니다.) 이후 나는 캐나다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살았는데, 외국에서 누군가가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한국이라 답한다. 한국 국적을 상실한지는 오래지만 그들이 내 생김새를 보고 기대하는 답은 후자일테니까. 분명 한국이 나의 정서적 고향인 것은 틀림이 없음에도 캐나다에서 적지않은 학창시절을 보낸것을 생각하면 누군가의 단순한 호기심을 빠르게 채우기위해 "한국"을 선택할 때 마다 조금 씁쓸하다. "한국과 캐나다"라고 하기도 억지스럽고. (두 나라가 스포츠경기를 할 때 누굴 응원하느냐고 묻는 짓궂은 사람들도 은근히 많은데, 각자 강한 스포츠가 전혀 달라 비등하게 맞붙을 일이 없다.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정도의 유치한 질문으로 이해할 뿐.)

덕분에 한참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청소년 시기에 나는 고향에 대한 고민을 해야했다. 장고끝에, '현재 부모님이 계신곳이 고향이자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결론내렸다. 지금은 지나온 그 어느곳도 아닌 경기도에 계시니, 내 고향은 언제 바뀔지 모르는 참으로 역동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부모님이 영원히 살아계시지는 않을테니 언젠가 부모님을 잃으면 나는 고아가 되는 동시에 실향민이 될 것이다. 과연 한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아픔일지는 아직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람에 대한 노스탤지아가 있다. 내가 돌아와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한국에는 친구가 별로 없겠네요"이다. 질문자의 친구가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내가 감당하기 딱 적당한 수의 한국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어린시절 친구들이기도 하고 전 직장 동료이거나 여러가지 다른 상황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로마 민박집에서 만난 한국 친구가 남아공 남자와 결혼할 때는 시댁 전담 통역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물론 많은 어린시절 친구들과 여전히 교류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주 연락하며 지내는 학창시절 친구가 손에 꼽힌다고 했다. 나도 별반 다를것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럼 캐나다에 있는 친구들이 보고싶겠다"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보고싶은게 비단 캐나다에 있는 친구들 뿐이겠는가. 캐나다는 이민자들의 국가이기 때문에 나처럼 대학졸업 후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친구들도 있고 미국이며 유럽으로 취업한 친구들도 있다. 이탈리아 대학원에서 만난 친구들 또한 남미를 포함하여 유럽전역과 동남아에 퍼져있다. 그들을 향한 그리움은 나에게 지병같은 것이다. 지병으로 아파하며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면 인생을 살 수가 없다. 좋은 기회로 그 중 어떤 친구와 눈물겨운 재회를 하는동안 세상 다른곳에 지금 당장 볼 수 없는 다른 친구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고 슬퍼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반대로 해석하면 나는 어딜가나 친구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번은 태국에 출장을 갔는데 비행기가 밤늦게 도착하여 공항에서 동료들과 우왕좌왕해야 하는 상황에 대학원 친구가 나와 맞아주어 다들 감사한 적이 있다. 같은 출장에서 호텔 조식을 먹던 중 여행중이던 푸에르토리코 친구와 마주쳐 반가움에 소리를 지른적도 있다. 유독 대만출신 친구가 많은 나는 타이페이 여행 중 캐나다에서 만난 대학 친구들과 이탈리아에서 만난 대학원 친구가 한데모여 식사를 한 적이 있다. 나를 통해 서로에 대해 들어온 친구들이 서로 만나 친구가 되는 자리가 신기하면서도 가슴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탈리아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중에는 캐나다 대학에서 알던 친구와 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그녀가 그 도시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있었지만 버스에서 만날줄은 상상도 못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베이징으로 이직한듯 하니 또 언제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 일이다.

외로움을 타지 않는 나에게도 그리움은 있다. 내가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지금 전세계로 퍼져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내 친구들이 함께했던 다시오지 않을 그 시간 속 그 공간이다. 어쩌면 나는 외로움을 많이 느끼지 않는 인간이 아니라 너무 깊은 외로움을 한번에 겪어 강력한 면역체계가 생긴 신종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세상 어디에 있던지 간에 돌아갈 곳과 친구들이 있다는 백신으로 무장한 채 살아가는 그런 사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기40_두번째를 위해 건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