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飲み物'(노미모노, 마실 것)에 대한 감상
도쿄의 먹거리와 마실거리를 묶어 이야기를 펼쳐보고자 했으나 나는 역시 푸드 블로거의 기질은 없는 것인지 쓸만한 음식 사진이 거의 없다. 하여 대신 이번에 도쿄에서 경험한 음료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먹고 마시는 것들이 진진한 도쿄이지만 그중에서도 카페만을 테마로 묶은 여행책자가 있을 정도로 도쿄는 카페가 즐비한 도시다. 그저 인테리어만 번지르르한 셀카용 카페가 아니라 로스팅부터 직접 하는 스페셜티 카페들 말이다. 그렇다 보니 커피 한잔을 마시는데도 선택의 연속이다.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의 스페셜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Blue Bottle이 요즘 핫하다는데 나는 출장 중에 동료에게서 처음 들었다. 보통 커피숍 하면 떠오르는 진한 나무색이나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하얀 마블에 금속 프레임의 가구들이 배치된 매장을 기대하던 나로서는 매장에 들어서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디테일이랄 것이 거의 없는 평면적인 화이트 인테리어의 매장 중앙에 사방이 뚫려있는 사각형 카운터가 위치해 있었다. 그 안에서 청남방을 입은 바리스타들이 손님을 마주 보고 커피를 내리고 있다. 일본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찾아보니 역시 미국발 브랜드란다. 처음에 밋밋하다 느낀 화이트톤의 인테리어가 눈에 익어가자 그 위에 떡 하니 올라가 있는 하늘색 병 실루엣의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오히려 도드라져 보인다. 'Blue Bottle'이라는 글씨도 쓰지 않았다는 것은 곧 품질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일까. 동시에 '다른 것이 아닌 우리 커피에만 집중해 달라'는 브랜드 메시지이기도 하겠다. 첫 모금부터 산미가 느껴지는 그 맛도, 화이트와 밝은 우드톤, 카운터의 메탈 소재들, 직원들의 데님 유니폼이 만드는 가벼운 분위기도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무조건 어둡고 무거워야만 진지한 것은 아니니까.
일부러 일정을 맞춘 것도 아닌데 우연히 마주친 팝업스토어들이 있었다. 이것은 많은 브랜드들이 도쿄를 여전히 역동적이고 트렌디하게 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긴자식스에서도 한정된 기간 동안 옥상공원에서 'Vogue Lounge'라는 루프탑 바가 운영된다 하여 동료들과 함께 저녁시간에 방문하게 되었다. 잡지사 보그가 제안하는 'Vogue다운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패셔니스타들의 패셔너블한 식사와 드링크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하지만, 거창한 문구만큼 화려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패셔니스타들은 쉬지 않고 파티하듯 살 거라는 내 선입견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Vogue Lounge'는 '저녁시간 기분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사람들과 편안하게 한잔 하는 라운지' 정도의 표현이 적당할 듯하다. 음료를 마시지 않아도 옥상 공원 벤치에서 도쿄 시내를 내려다보며 오붓한 시간을 갖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이 시끌벅적하지 않은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도심 속 휴식처는 10월 29일까지 운영한다고 한다.
일차원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도쿄에 가면 가장 큰 무인양품과 유니클로 매장에 가보고 싶었다. 자국의 플래그십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고, 가장 큰 매장에서 쇼핑을 경험해보고 싶어서였다. 유니클로의 경우 오히려 한국보다 할인점에 가까운 느낌을 많이 받아서 조금 실망했지만 무인양품은 달랐다.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신선식품 코너가 무인양품 본점에 들어감으로써 무지카페, 무지북스와 합쳐진 완전체의 매장이 되었다. 식품의 재배과정에 관한 스토리를 영상으로 보여 줌으로써 브랜드를 더 인간적으로 느끼게 했다. 무인양품은 외식업을 전문으로 하는 브랜드는 아니지만 생활용품에서 시작하여 카테고리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식음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한잔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봄부터 겨울까지, 어릴 때부터 나이 들어서까지 평생 함께할 수 있는 브랜드가 제공하는 음료수는 역시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뒤에 깔린 스토리를 마시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다음은 블루보틀을 추천한 동료의 또 다른 추천 카페 Fuglen Coffee다. 꽉 찬 일정을 소화하고 꽤나 긴 거리를 걷느라 커피맛이 안 느껴질 정도로 몸은 피곤했지만 도착해서는 분위기에 만족한 곳이다. 코너에 위치해 있어 외벽을 따라 'ㄱ'자로 야외 벤치와 간이 테이블이 설치되어 날씨가 좋다면 여기에 앉아 시부야의 골목길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 하기 좋을 듯하다. (밖이 어둑해지니 직원이 나와 무드등을 연결해주고 갔다.) 일정 시간 이후에는 주류도 취급하기 때문에 내부 분위기 또한 바에 가깝다. 마치 우체국 표시 같은 로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커피와 이루는 부조화 때문인지 더 기억에 남는다. 하얀 외벽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작한 이 브랜드의 북유럽 감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긴자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보게된 PARLA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좁은 입구를 지나 넓은 내부로 통하는 것이 일반적인 매장의 구조라면 PARLA는 도큐 플라자 건물 외벽에 좁고 길게 평면적으로 붙어있는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내부 공간이라고 해 보았자 입구에서 1m 남짓 안쪽으로 난 폭이다. 우리가 지나갈 당시 모던보이 느낌으로 잘 차려입은 할아버지가 아래 사진 속 원형 테이블에 걸터앉아 칵테일을 한잔 하고 계셨기 때문에 더 비현실적으로 멋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건물의 외벽 공간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활용한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 다시 찾아보니 이 곳은 파르페가 주 메뉴이면서 주류도 취급하는 디저트숍이란다. 하지만 우리의 첫인상과 같이 평면의 Bar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주변이 어둑해지면 매장의 내부에 조명이 켜지고 기억 속의 할아버지가 나타나 칵테일 한잔을 마시는 모습이 마치 연극무대를 보는 듯 로맨틱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