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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 Jan 18. 2018

일기57_수많은 나, 우리





나를 선택한 직업은 패키지 디자이너다. 직업이 나를 선택했다고 하는 이유는 패키지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초기에 내가 선택했던 방향에서 내 의지와 다르게 틀어졌기 때문이다. 계획대로라면 나는 디자인 기획과 전략 업무를 해야 하지만 입사 몇 년 후 조직변경에 의해 실무와 가까운 디자이너로 포지셔닝되었다. 한때는 일방적인 변동에 분노했었고, 또 한동안은 거부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후회할 수 있는 일도 아니거니와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 내가 있기까지 그런 길을 지나왔다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패키지 디자이너로 사는 지금, 내 창작물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내 직업을 설명하기 위해 해왔던 작업물을 나열하다 "저 그거 집에 있어요"라는 사람을 만나거나 온라인상으로 신제품 반응을 체크하다 "이거 디자인한 디자이너 만나고 싶다"등의 코멘트를 마주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그냥 지나가는데 한 번은 마케팅을 공부하는 걸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짧지만 진지하게 내 디자인에 대한 감상을 올린 것을 보고 처음으로 댓글 하나를 달아보았다. 이렇게도 만날 수 있어서 신기하다는 답이 왔다. 모르는 사람과 SNS로 한 가장 기분 좋은 소통으로 기억한다. 그 날 이후로 내 주변의 생명 없는 브랜드들을 접하는 순간마다 그 뒤에 살아 움직이는, 나 같이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하며 사무실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진다. 어쩌면 이웃에 살고 있을, 아니면 점심 먹다 한 번쯤 스쳤을 법한 가까운 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창작하고 생산한 것들을 나는 쉴 새 없이 소비하며 살아간다.


그런 수많은 나에게 전하고 싶다. 감사히 쓰고 있다고. 수고가 많으시다고. 안녕은 하시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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