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都9_한 잔 가득한 향

헛헛함을 달래는

by 일랑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정확하게는 커피가 주는 휴식을 좋아한다. 마신지는 오래되었만 전문성이 있는 건 아니다. 향이 유난히 독특하지 않은 이상 쓰다, 시다, 싱겁다, 딱 좋다 이런 단순한 표현을 쓰는 전형적인 아마추어.





일본도 커피가 유명하다 한다. 한국에서 손쉽게 접하는 아메리카노와는 조금 다른, 일본이 오랜 세월 고수해온 커피 스타일이 있다. 꽤나 예스럽달까. 그 옛날 모던보이들이 마셨을 법한 진하고 시큼한 커피.


70년 된 교토 커피의 상징인 이노다를 찾았다. (찾았다기보다는 벤리도에 가는 길에 들르게 되었다.) 미리 잘 알아보고 간 게 아니다 보니 뭘 기대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들어선 공간은 마치 레트로한 식당 같았다. 약간 당황스러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가이드북을 펼쳐 본 후 대표 메뉴라는 '아라비아의 진주'를 주문했다.


사실 명성에 비해서 아쉬움이 남는 한잔이었다. 언 듯 담배냄새가 밴 듯한 집중하기 어려운 인테리어 때문이었을까, 나 같은 한국 관광객들로만 가득한 주변 테이블 때문이었을까. 보통 아메리카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시지만 '아라비아의 진주'는 같이 나온 각설탕과 크림을 듬뿍 넣고 마셔봤다. 향을 느낀다기보다는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켜준 이노다에 대한 존경을 담아서.





별생각 없이 들렀다 반한 카페도 있다. 바로, Wife and Husband. 데마치야나기 델타에서 정적인 휴식을 취하고 나니 시끌벅적한 관광지보다는 조용한 카페에 가고 싶었다. 좁은 골목길, 닫혀있는 카페 맞은편에 줄 서 있는 사람들. 카페 문 앞 안내문을 읽어보니 이름을 쓰고 대기해 달란다. 달리 대안이 없던 나는 기다림을 선택했다.


마침내 순서가 되어 들어간 내부는, 마법사의 부엉이가 천장 어딘가에서 내려다보고 골동품 벽시계가 말을 걸어올 것 같은 초현실적 분위기였다. 풍미 있는 인도네시아 커피는 과일 파운드 케이크와도 잘 어울렸고. 그나저나, 누가 아내이고 누가 남편이신지.





大原(오-하라)라는 교토 외곽으로 가는 날이었다.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교외로 가는 버스는 처음이라 낯설었고 예상치 못한 만원 버스에 피로도가 급상승했다. 오하라 대표 사찰인 호센인을 둘러보다 액자 정원이 마주 보이는 다다미에 가 앉으면 맛차 한잔과 모찌 한 점을 내어주며 입장권과 함께 받았던 티켓을 회수해간다. 평일 낮에도 관광객이 많아 호젓하게 액자 정원을 감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오는 길에서 쌓인 피로가 보상받는 기분.





아라시야마에 가면 한 번쯤 들러볼 생각이었던 %Arabica. (요즘 인스타에서 꽤나 핫하다.) 자연 속에 파묻혀있는 위치인 데다 통유리 외관이라 내부에서 보는 뷰가 엄청나다. 오픈 준비 중이라 하여 가게 길 건너에 무료하게 앉아있는데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 줄을 서더니 문을 염과 동시에 정신없이 북적대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근처 벤치에서 먹을 생각으로 카페라테와 샌드위치를 하나 샀다. 커피는, 맛있다. 그럼 됐지, 뭐.





미슐랭 스타를 받은 장어를 먹어보겠다고 11시 반 오픈하는 '廣川(히로카와)' 앞에서 9시 반부터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여행이 별거 있나, 여기 앉아서 쉬나 카페에 앉아서 쉬나 똑같지 뭐. 오픈이 임박해오자 내 뒤로 선 줄이 급격히 길어진다. 왠지 모를 우월감. 두 시간을 기다려 들어가 앉은자리에서 차 한잔을 받아 들고 한숨을 돌린다. 미슐랭 장어 맛의 2할쯤은 통유리 너머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소담한 정원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날따라 너무 힘들었다. 그날따라 많이 걸었으니까. 발이 아프다 못해 버리고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라시야마에서 유명한 '사가노유' 카페의 대기줄에 질려 돌아서서 그저 조용한 카페에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무 데나 걸터앉아 '嵐山の静かなカフェ'(아라시야마의 조용한 카페)를 검색한다. 그중 그나마 가까운 '안나마리아'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서양의 티 하우스가 옛날 일본식으로 재해석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할머니가 만들고 할아버지가 서빙하는 로열 밀크티를 마시는 이색 체험. 휴식을 향한 간절함이 나를 인도한 곳에서.




70년 역사의 '이노다' 커피
Wife and Husband, 피크닉 도구를 대여해준다
Wife and Husband, 내부로 들어오는 햇살이 예술
호센인의 자랑, 액자정원이다
액자정원 앞에서 맛차와 달달한 모찌 한조각
풍경과 혼연일체가 된 %Arabica
오픈 전에 긴 대기줄이 먼저 생긴다
두 시간 기다림의 피로를 풀어주는 '히로카와'의 티
휴식이 절실했던 순간, '안나 마리아'의 로열밀크티


한 잔에 담긴 '머물렀다 가시라'는 의미를 이해한다. 한 끼의 식사보다는 부담되지 않으면서 고요함을 어색하지 않게 해 주는 그 한잔을 나는 한 번도 거절해 본 적이 없다.

커피가 되었든, 차가 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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