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여행을 간다고요?
또 혼자서요?'
지난 9월 포르투갈을 다녀온 지 고작 5개월 만에 다시 떠나는 장거리 혼행이다.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도 미리 준비해왔던 여행도 아니었다. 그저 구정 때 찾아뵈어야 할 친척집이 없고 제사를 도와야 하는 사람이 아니니 집에서 하릴없이 때우기보다 어디로든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발전한 결과였다. 목요일부터 시작하는 구정 휴일에 앞으로 3일만 연차를 붙이면 예쁘게 만들어지는 9일의 연휴를 쓰기에는 예전부터 떠올려왔던 멜버른이 좋겠다는 지극히도 두서없는 생각의 흐름이었다. 여느 때처럼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나서는 특별히 조사도 하지 않았다. (멜버른에 관한 여행책자도 마땅히 없더라.) 그렇게 연이은 한파경보로 얼어붙은 서울을 피해 여름의 멜버른으로 날아가게 된 것이다.
여행이 가까워지면서 그래도 조금은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DOR와 DRIFT라는 큐레이션 매거진의 멜버른 편을 찾아 읽어보았다. 그 흔한 여행책자는 없을지라도 큐레이션 매거진에서는 다루고 싶을 정도로 매력 있는 도시라는 생각에 설레었다. 좋아하는 커피로도 유명한 도시라 하니 도착하기도 전부터 점점 마음에 스며들었던 행선지.
나는 지금 여행을 끝내고 경유지인 발리 덴파사 공항에서 열 시간 넘는 대기시간을 흘려보내며 지난 여행을 되돌아보고 있다. (실제로 글을 올리는 시점은 조금 더 뒤가 되겠지만, 쓰고 있는 지금은 그렇다.) 생각해보면 이 여정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성격대로 여유 있게 인천공항으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날씨가 반대인 나라에 처음 가보는 나는 외투를 맡기기 위해 인천공항 코트룸 서비스에 대해서 미리 알아봤었는데, 굳게 닫힌 문 앞에는 3월까지 공사 중이라는 공지만 붙어 있었다. 이 코트를 가지고 여름나라에 가야 하는 건가 대혼란이 오려는 찰나, 미리 주문한 데이터 유심을 받으러 가는 길에 다른 코트룸 서비스를 찾았고 극적으로 맡길 수 있었다. 이때쯤 나는 연신 손부채질 중이었고 올림픽 기간이라 보안이 강화되었다는 출국장 줄의 끝에 서서 마음속으로는 면세품 수령을 포기했다.
호주땅에서는 나를 그다지 반기고 싶지 않던지 입국심사 때는 줄에서 옆으로 불러내 수십 가지 질문을 해댔다. 조금 오래 걸렸지만 무사히 통과해 나오니 이번에는 유심이 말썽이었다. 세 시간 경유를 했던 발리에서는 잘 사용했던 유심이 호주에서 먹통이 되어 현지 유심을 새로 구입해야 했다. 비행기가 멜버른에 랜딩 한 지 두 시간 만에 공항을 나와 호텔로 올 수 있었지만 아침 9시도 안된 시간이었기 때문에 방은 구경도 못하고 캐리어만 맡긴 채 이리저리 쏘다녔다. 덕분에 발은 첫날부터 물집 투성이가 되었다. 게다가 여름이라더니 날씨가 생각보다 쌀쌀해서 가지고 온 옷들이 민망해졌다. 그 와중에 반대로 움직이는 차들은 얼마나 헷갈리는지 버스를 반대로 타기 일쑤였다. (반대쪽을 보며 건너다 차에 치일까 봐 함부로 무단횡단도 못했다.)
하지만 늘 편리한 우버와 대중교통 노선은 물론 실시간 교통상황을 알려주는 구글맵이 있었다. 멜버른의 현대적인 시설들과 너른 공원들, 쾌적한 숙소가 피로를 덜어주었고 언어에 대한 부담이 적었기에 그다지 긴장할 일도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예상치 못하게 발리에서 세 시간이 아닌 열세시간 경유를 하게 되면서 여행이 연장된 기분이다. 읽으려고 가져갔으나 몇 페이지 못 읽었던 책을 읽었고 멜버른에서 기대했지만 만나지 못했던 여름 날씨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한 자리에 붙박이처럼 앉아있다 보니 옆에 앉았던 누군가가 두고 갈 뻔 한 물건을 챙겨 보내 주는 것.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등 뒤를 바라봐 주는 것. 한줄기 햇살이 공항 벤치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천천히 훑고 지나갈 때까지 한 자리에 앉아 있으며 경험한 시각이다. 여행으로 부산스러웠던 마음이 비로소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천천히 할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공항에서의 긴 시간은 역시 고되었고, 한국행 비행기 체크인 줄의 가장 첫머리에 서서 가방을 부치고는 라운지로 뛰어들어와 샤워부터 했다. 공항은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피로가 쌓이는 곳이다. 대단한 것 하나 갖추지 못한 내 집이 가장 편안한 공간인 것처럼.
그렇게 한국에 있는 이들에게는 설 명절이었고 멜버른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저 일상이었으며 단지 나에게만 휴식이었던 그 시간에 대해서 이제부터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 많은 여행들에 더해진 또 하나의 여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또 많은 처음을 있게 해 준 이번 여정을 다시 한번 (부족할 지라도 온전히) 내 시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