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행을 살린 몇 가지 준비물
이번 여행에서 나는 많은 실수를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날씨에 대한 대비였다. 가기 한 달 전부터 날씨 앱 리스트에 멜버른을 넣어놓고 그곳의 날씨를 상상하며 한국의 추운 겨울을 보냈다. 호주 지도를 보며 가장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멜버른의 뜨거운 여름을 준비했더랬다. 옷은 대부분 시원한 린넨 소재의 것들로 더우니 중간중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여유롭게 넣고 조그마한 접이식 우산 하나, 그리고 에어컨 바람을 대비한 얇은 머플러 하나 정도로 나름 꼼꼼히 챙겼는데, 공항에 내려 마주한 쌀쌀한 날씨는 나를 꽤나 당황스럽게 했다. "이 곳 멜버른은 남극과 비행기로 네 시간 정도라 비교적 선선한 날씨..."라는 말을 들으며 눈이 동그래져 있던 나는 그때까지도 이곳이 남반구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쌀쌀하다 기억하지만 땀이 날 만큼 더운 날도 있어서 발등은 샌들 모양을 따라 타버렸고 팔목에는 시계 자국이 남았다. 날씨 앱에 생전 처음 보는 바람 모양이 뜬 날은 바닥의 낙엽과 먼지가 날아올라 온몸을 따갑게 후려칠 정도로 거세게 불기도 했다. 어느 날은 비바람에 내 연약한 우산이 무용지물이 된 적도 있었고 여행 대부분의 시간을 머플러와 함께 해야 했다. 여행 중빈쯤에는 날씨를 핑계로 가을 옷들을 쇼핑했는데 (호주는 여름을 지나 가을 신상품이 나오는 시점이었으므로), 이후 일정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 일단은 챙기라고 말하고 싶다. 필요할지 짐스러울지 고민된다면 일단 챙기고 보자. 지구 반대편에서 한국과는 반대의 계절을 지나는 그곳의 날씨는 숫자만으로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이 바뀌고 가방에는 늘 우산과 선글라스를 동시에 챙겨야 했던 그곳은 내가 기억하는 영국보다도 변화무쌍한 날씨를 보여줬다. 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인 나에게 그것은 짧은 시간 동안 도시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또 다른 매력으로 기억된다.
다만 나만의 팁이 있다면, 버릴 수 있는 것들로 짐을 꾸리는 것이다. 화장품 같이 부피가 큰 것들은 샘플로 가져가서 마지막 날 모두 버리고 온다. 옷도 비싼것보다는 여차하면 버려도 무방한 것들로 챙겨넣는다. 최대한 레이어링이 가능하게 하여 여러 날씨에 대비할 수 있는 구성으로 고민한다. 현지에서 마음에 드는 신발을 발견하여 신고 간 낡은 신발을 버리고 바꿔 신고 온 적도 있는데, 이렇게하면 가방의 여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쇼핑할 때 마음의 부담을 한결 덜 수 있다. 하여 출발할 때는 마치 짐의 3분의 2만 챙겨 돌아올 것처럼 가방을 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꼼꼼한 준비 없이 나서는 편이기도 하다. 요즘은 어느 나라나 도시를 가도 생필품 정도는 쉽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정 필요하면 현지에서 구입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한 번은 경유지에서의 시간이 짧아 헐레벌떡 뛰어 급하게 연결 비행기를 잡아탔는데 내 가방은 최종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적이 있다. 분실센터에서 받은 몇 가지의 위생도구로 예상치도 대비하지도 못한 하루를 보내며, 어차피 미지수로 가득한 것이 여행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결국 여행에 필요한 것은 가벼운 몸과 마음. 그리고 돌발상황을 대처할 의연한 태도.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