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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 Nov 02. 2018

W일기_사진

남는 게 사진뿐이라면





원래 여행과 사진을 좋아하는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느낌 좋은 사진작가 몇 명을 팔로우하고 있다. 그중에서, 처음에는 풍경사진작가로 알고 팔로우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색적인 야외 웨딩사진이 올라와서 흥미롭다 생각하게 된 젊은 작가 한 명이 있었다.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 가장 처음 떠올린 사람이었다.


‘남들 다 찍는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에서 시작한 생각이었다. 그도 전적으로 동감해주었다.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않으면 꼭 해보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지나고 남는 게 사진뿐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작가와 통화를 하고 견적과 진행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확정되면 오프라인 미팅을 가지고 커플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들어본다고 했다. 인위적이지 않은 따뜻한 사진이 가득 나올 것 같은 핑크빛 꿈에 부풀었다.


대전에서 올라온 그와 함께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작가를 만났다. 평소 드라마 대본을 토대로 촬영에 적합한 로케이션을 제안하는 일도 해서 이국적인 장소를 많이 안다고 했다. 다만 의상과 소품, 그리고 새벽같이 출발하기 때문에 사실상 헤어와 메이크업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풍부한 사진이 나올 수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작가는 ‘경성시대 느낌’으로 해보자 했고 나는 그냥 스튜디오에 가서 찍을걸 그랬나 하고 조금 후회했다.


드레스는 저렴한 것으로 구매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아무래도 촬영할 장소들은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숨겨진 곳들이라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생길시 드레스 반납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인터넷으로 최저가 드레스를 검색했다. 요즘은 셀프 촬영도 많이 하기 때문에 드레스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캐주얼한, 저렴한 레이스 원피스들을 취급하는 쇼핑몰이 꽤 많았다.


조금이라도 더 희소성 있는 디자인을 찾기 위해 뒤지고 또 뒤졌다. 촬영 후에도 다른 행사에 입을 수 있을 법할 정도의 무난함과 단정함이 있다면 더 좋으니까. 검색 중 꼭 입고 싶지만 대여만 가능한 드레스 하나를 메인으로 골랐고 다른 하나는 정말 많은 사이트에서 취급하는 원피스이지만 세컨드로 손색없어 보여 최저가를 검색했다. 같은 상품인데도 쇼핑몰에 따라 크게는 4만 원까지 차이가 났다. 그리고 마지막은 저렴한 수입 원피스이지만 이색적으로 진한 녹색 레이스를 선택했다. 선택 과정에서 틈틈이 작가와 카톡으로 상의했다. 나의 20년 인터넷 쇼핑 인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나와 함께할 그의 의상은 레트로 하지만 특별한 날의 느낌을 낼 수 있는 연한 회색 체크 쓰리피스 정장이었다. 경성 느낌을 위해 빈티지한 원형 선글라스며 중절모, 그리고 회중시계 등을 더해보기로 했다. 의상은 평소에도 입는다 하지만 소품들은  촬영이 끝나면 버릴 가능성이 높아 무조건 저렴한 것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인터넷 쇼핑에 불붙어 보낸 시간이 꼬박 2주는 되었고 나는 늘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지냈다.





이제 남아있는 가장 큰 숙제는 조화로 만든 부케였다. 작가는 보통 부케보다 크고 풍성한 것을 선호했다. 내가 몇 년 전 서촌의 한 공방에서 플라워 수업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공방 선생님에게 도움을 구해보기로 했다. 바쁜 와중에도 흔쾌히 재능을 베풀고자 하는 선생님과 남대문 조화 시장에서 재료를 골라 만든 부케는 촬영 후 많은 칭찬의 대상이 되었다. 가을의 색을 담은 빈티지한 색감이었기 때문에 화이트 의상들과 함께 매치했고 진녹색 원피스는 마침 대여할만한 것이 있어 저렴하게 대여했다. (사실 보증금에 왕복 택배를 생각하면 대여가 저렴하면서도 번거로운 편이다.)


우리는 촬영 하루 전날 작가가 원하는 로케 근처의 숙소에 도착해서 촬영당일 새벽 5시에 작가와 만나 해질 때까지 촬영하고 헤어졌다. 묵었던 숙소에서 하루를 더 쉬고 다음날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결혼에 성큼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큰 고비를 하나 넘은 기분이랄까. (그 힘들다는 웨딩촬영을 내가 하다니!) 내 손으로 준비하는 촬영이지만 결론적으로 스드메 촬영 패키지에 버금가는, 또는 넘어가는 지출이 발생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온다면야.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니까. 그리고 몇 주 뒤, 지금까지 본 웨딩사진들과는 다른 마음에 쏙 드는 사진들을 고르느라 진땀을 빼게 되었다. 카메라를 보고 좀처럼 웃지 못하는 나는 수 많은 사진속에서 참 편안하게도 웃고 있었다.




사진작가 김한님의 인스타그램 @graphiehan

부케에 도움받은 베르씨빌라쥬의 인스타그램 @bercy_village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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