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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 Jan 04. 2019

W일기_청첩장





결혼을 50일 정도 앞두었을 때, 나는 청첩장을 단 한 장도 돌리지 않은 상태였다. 준비야 이미 한 달도 더 전에 끝나 얌전히 한데 포개어져 잘 보관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그 100여 장의 봉투들 중 70장은 최소한 신혼여행으로 자리를 비울 것이라는 사실을 알릴 요량으로 회사에 뿌릴 것들이었고 나머지는 가까운 친척들 앞으로 열 장, 개인적인 친분을 위해 스무 장 정도를 가늠하고 있던 참이었다. 참석을 청한다는 뜻의 '청첩장'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도 그 안에는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만 담았으니 애초부터 널리 뿌릴 생각은 없었다. 고르는 과정에서 더 좋은 재질의 더 희소성 있는 디자인으로 자꾸만 마음이 끌렸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크게 의미 없을 종이 한 장에 사치를 부리지 않기로 했다. 나 또한 청첩장 깨나 받아본 사람으로서, 남의 청첩장에 길어야 3초 이상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이 스스로도 납득해버린 현실이니까.


친가와 외가를 합쳐 30명 미만과 20년 내외로 인연을 이어온 친구들 10명 남짓. 그것이 처음부터 내가 계획하는 신부 측 하객수였다. 마침 친오빠의 결혼이 1년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가까운 친척들만 참석을 청해도 되지 않겠냐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하지만 사실 오빠도 작게 한 편이라 부모님 지인들까지는 거의 알리지도 않았었다.) 나 또한 지금까지 살면서 내키지 않는 경조사는 참석하지 않았고, 경조금은 돌려받지 못해도 속상하지 않을 정도의 성의표시만 한 데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예정이라 아쉽지 않았다. 받은 돈은 또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역시 이 편이 마음 편하다.


결혼을 두 달 정도 남기고 가지는 만남들에 암묵적으로 '결혼 전 마지막'이라는 전제가 붙기 시작하면서 나도 슬슬 청첩장을 내밀어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오래간만에 성사된 20년 지기와의 식사를 앞두고 처음으로 청첩장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방 한편에 말려서 화병에 꽂아두었던 드라이플라워를 몇 개 잘라다 봉투에 붙여놓으니 꽤나 뭐라도 되는 것 같이 보인다. 친구는 이 연애가 결혼으로 연결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지켜봐 왔으니 청첩장에 놀랄 인사는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하는지도 이미 알거니와 본인이 열명 남짓되는 소수정예 인원 중의 하나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난생처음 이런 것을 내미는 내 손만 어색할 뿐이다. 지금까지는 받기만 해 봤던 청첩장을 주문하고 하나하나 봉투에 접어 넣어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생소한 과정. 익숙해지기 전에 끝날 테지만 말이다.


회사에는 결혼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돌리기로 했다. 참석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쯤 돌려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답례품도 한 번에 같이 전달하기로 했다. 참석을 하고 안 하고, 축의금을 내고 안 내고를 떠나 존재 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운 그 봉투를 조금이라도 덜 민망하게 건네보기 위한 내 꼼수. 지금으로써는 남겨진 숙제 같은 그 날이 어서 빨리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350장 인쇄에 생각보다 큰돈은 들지 않았다. 가볍게 할 생각일수록 기성품이 맞는 것 같다. 결혼 날짜를 잡고 경험상 한번 들렀던 스몰웨딩 컨벤션에서 업체 할인 코드를 받아 조금이라도 더 혜택을 받았다. 우리가 고른 버전은 일러스트도 사진도 들어가지 않아 딱히 유행타지 않을 미니멀한 디자인이다. 약도도 넣지 않아 안쪽면도 글씨와 그 사이사이의 공간뿐이다. 보면 볼수록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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