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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 Jul 13. 2017

일기23_밤 산책

익숙한 거리의 낯선 모습




해가 지난 자리에 밤이 내린다

오래간만에 비 없이 바람이 선선하니

그냥 들어가기 어딘가 아쉬워

집으로 난 길을 멀리 돌아 걷는다


셀 수없이 걸었던 익숙한 길이

어둠을 덫 입고 낯선 얼굴을 한다

적나라하던 낮의 복잡함이 지워지고

줄지어 스쳐 지나는 불빛으로만 남았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텅 빈 학교 둘레에

울타리따라 나무로 빼곡한 산책길을

한 걸음씩 천천히 눌러가며 걷는다


오늘 아침 이 길을 지나며

어린 학생들이 흘렸을 천진함을 줍고

환한 낮에 손잡고 걸었을 아가와

젊은 엄마의 다사로움을 줍고

해 질 무렵 퇴근길 발걸음을 재촉했을

어느 아버지의 고단함을 주워서

걸음수에 비례하게 마음이 묵직해진다



나는 그렇게,

민낯이 가려진 세상이 낯설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은 밤을 걷는 중이다

걸음마다 조그만 보석을 주워 담으며

조금 돌아가는 길을 즐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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