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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주Ivy Oct 26. 2022

외국인 노동자의 삶이란?

아무도 나를 외국인 노동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모두가 잠들어 고요한 새벽 4시, 띠리링 띠리링 적막 속에서 알람이 악몽에서 나를 잡아끌어 현실로 데려다 놓는다.


냄새 촉각까지 생생했던 악몽을 생각할 틈도 없이 눈꺼풀이 무거운 채로 일어나 여느 때와 같이 세수와 양치를 하고 대충 로션을 바른 후 버스가 오기 10분 전에 집을 나선다. 


매서운 차가운 공기가 식도를 지나쳐 장기까지 전해졌다. 눈만 보일 정도로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았고 겨울 모자를 푹 눌러썼다. 


토론토의 2월의 추위는 살을 뚫는 듯이 아팠다. 

엄마가 언제 집에 올지 기다리는 아이처럼 버스가 언제 오나 버스가 오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발을 동동거렸다. 

예상보다 늦는 버스에 지각을 할까 봐 초조함이 몰려올 때쯤 저 멀리서 반가운 버스의 불빛이 보였다. 


이른 새벽 버스에 아무도 타지 않았을 것 같지만 만석이다. 

아저씨, 아줌마, 젊은 사람들, 다양한 연령층들이 창문에 겨우 기대어 불편한 자세로 부족한 잠을 취하고 있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새벽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하러 집을 나섰다. 


다들 누군가의 엄마, 아빠, 가족 중 한 명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애틋했다. 

살얼음 같은 추위와 어두컴컴한 밖이었지만 버스 안에서는 사람들의 따스한 온기가 퍼져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누구보다 일찍 하루의 장막을 열지만 현실은 최소 임금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 

불평불만을 하면 현실은 더 비참해졌기에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라고 매일 되뇌었다.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서 타국에 산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어있기 때문에 일할 기회가 주어지면 고민할 시간도 없이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빈민국에서 한국으로 이민 와서 돈을 버는 외국인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토론토는 여러 각국에서 오는 이민자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크게 인종차별은 없었다.


한 해 두 해가 갈수록 영어도 안되고 한국말도 안 되는 나를 보면서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토론토에 머물러야 할지, 늦기 전에 한국에 가서 취업준비를 해야 할지 눈뜨고 감을 때까지 고민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

한국에 돌아가기 망설이는 결정적 이유는 돈과 시간이 없다는 불안감, 취업준비에 대한 걱정, 폭식증, 부모님을 다시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나이에 대한 압박, 나만 뒤처졌다는 두려움,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들에 사로잡혔다. 


남을 의식하고 자연스럽게 비교하면서 자라왔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는 삶을 선택해왔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부모님께 자랑이 될 만한 직업을 택하려고 아등바등했을까.


나의 내면을 돌보지 않고 남을 신경 써가며 '이 나이 때는 이 정도는 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틀에 나를 끼우려고 애를 썼을까. 


처음에는 고국에서의 취업이 두렵다는 이유로 타국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고통스러웠다. 

해보지도 않고 한국에 오래 자리를 비웠으니 남들보다 뒤처질 거야라고 생각한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웠다. 

몇 주를 고통에 몸부림치며 토론토에 남을지 한국에 돌아갈지에 대한 고민을 밤낮으로 하며 밤을 지새웠다. 


고민을 한 시간이 무색하게 2020년 1월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멈췄고 나의 고민도 멈췄다.


'토론토에 있으라는 하늘의 뜻인가 보다' 하고 생각의 각도를 조금 틀었다. 


영어로 소통하지만 문화, 역사,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를 고유하게 지키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토론토의 매력이 사실 좋았다. 


다들 성장해온 배경환 경이 너무 달라 비교가 불가능해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부심을 가지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일주일 7일 중 3일은 병원, 3일은 카페로 출근했던 적이 있다. 


카페에서 일할 때면 임금은 병원보다 적지만 해가 뜨기 전에 오븐에서 갓 구운 빵의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행복했다.


에스프레소를 내려 고소한 오트 밀크를 넣고 한 모금 마시면 겨울바람에 얼었던 내 몸을 따뜻하게 녹여줬다. 진한 향이 풍기는 커피와 버터향이 가득한 갓 구운 크루아상을 먹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피곤할 때면 바쁜 마음과 달리 입에서 영어가 꼬여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을 때가 많았다. 

한창 바쁜 아침 시간에 긴장감이 높아져 알 수 없는 걱정들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커피 주문이 쌓여 정신없이 커피를 만들고 있을 때 이탈리아 여성 손님 한 분이 내가 만든 카푸치노를 반납하며 


"이건 카푸치노가 아니야 못 마시겠어 거품이 형편없어 다시 만들어줄래?" 여성 목소리가 컸던지라 주위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렸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름이 느껴졌지만 티를 안내기 위해 "죄송해요 다시 만들게요."라고 말하고 다시 만들었다.


스팀기를 조금씩 들어 올리며 거품을 만드는데 "아니 거품 나는 소리가 틀렸어 다시 만들어 줄래?"

"제가 이탈리안이 아니라서 커피에 대해서 잘 몰라요 다시 만들어볼게요."라고 울음을 참으며 애써 밝게 말했다.


"여기서 일하려면 커피 만드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겠어 거품은 카푸치노의 생명인데 그걸 못하면 안 되지." 


그 여자는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새 스팀 컨테이너에 우유를 붓고 호흡을 후~ 하고 나지막이 내뱉고 다시 차분히 거품을 냈다. 


다행히 말이 없었다. 먼저 내려놓은 에스프레소 위에 우유 거품을 천천히 원을 그리며 부었다. 

그 여성 분은 한 모금 맛을 보고 "폼은 나쁘지 않은데 커피 맛이 약해 에스프레소 한 샷 추가해줄래?"


"그건 엑스트라 비용이 있는데 괜찮으시나요?" 


"말도 안 돼 너 때문에 내 시간을 여기서 낭비했는데 또 비용을 추가하는 게 말이 돼? 

지금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늦었어 여기 매니저 어딨어?"


그녀의 깐깐한 목소리가 언성이 높아져 톡 쏘는 듯이 말했다.


입구 저 끝까지 늘어선 줄이 눈에 들어오자 이 여자를 얼른 내보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죄송해요, 매니저는 아직 출근 전이에요. 그럼 오늘은 에스프레소 샷 추가 비용은 안 받을게요."

얼른 샷 추가를 해줬다. 갑자기 그 여자가 말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여기서 30분 정도 있었던 것 같아 환불받아야겠어 솔직하게 말하면 다시 만들어준 커피도 마음에 안 들지만 그냥 마시는 거야, 환불해주겠어?"


매니저가 아직 출근 전이어서 이 일을 내가 해결해야만 했다. 


이 여자는 환불받지 못하면 내가 일하지 못하게 끝까지 나를 괴롭힐 것 같아 얼른 환불해줬다.


우연히 갔던 고깃집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던 동남아시아 아줌마가 생각이 났다. 


한국말이 서툰 아줌마는 주문을 잘 못 알아듣고 실수를 했었는데 우리는 배고픈 나머지 짜증 섞인 모습으로 아줌마를 대했던 적이 있다. 아줌마가 옆에 있는데도 아랑 곳 않고 흉을 봤었던 철없고 미성숙한 시절이었다.


카푸치노 사건을 계기로 마음의 상처는 받았지만 커피 만드는 연습을 더 열심히 했고 그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배웠다. 

손님이니까 모든 것을 다 받을 권리가 있으니 대접받아야 한다는 망상을 버리게 된 값진 경험이었다.

더 나은 직업을 가졌다고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을 나보다 아래라는 생각을 가짐으로 감정노동자가 발생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생긴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게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첫걸음이지 않을까.


병원 급식소 직원으로 일 할 때면 환자들의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아침 6시까지 출근해야 했다. 직장동료들을 대부분 이모나 엄마 나잇 대였다. 

 

인종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가끔 언어의 벽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큰 행운이었다. 

그들은 종교, 문화, 역사가 달랐지만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일을 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회사 가는 대신 쉬고 싶어 했고 어느 직장이든 경쟁은 존재했고 삶은 치열했다. 

어느 집단이든 꼴 보기 싫은 사람은 존재했고 은근한 따돌림도 존재했다. 남을 위해 일하기 싫어했고 놀면서 돈을 벌고 싶어 했다. 

주말만 기다리며 주중을 버텼고 월요일엔 예민했다. 직장인들은 피곤한 얼굴로 출근했고 점심시간이 제일 행복했다.


병원 급식소에서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설거지는 아직 허리와 어깨가 쓸만한 내가 많이 하곤 했다. 너무 많은 음식들이 낭비되고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환자들의 만족도와 보이는 실적이 더 중요한 그들에게는 낭비되는 음식과 쓰레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음식쓰레기의 역한 냄새를 맡으니 폭식 후 토한 내용물이 생각났다. 

먹지 않은 음식물이 낭비되는 것보다 먹고 내 몸을 괴롭혀 게워내 낭비되는 것이 죽어서 더 큰 벌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이후 폭식의 충동이 올라올 때면 낭비된 음식쓰레기들의 역한 냄새를 떠올리며 충동을 가라앉혔다. 

학생 때는 길가에 음식 쓰레기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얼굴을 찌푸리며 숨을 참곤 했었는데 이제는 부패되고 있는 상한 음식 냄새들을 맡으면 화려한 현실 뒤에는 누군가는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존재들이 필요하구나라며 삶에서 자연스러운 냄새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집에서 쓰레기 만드는 일을 최소화하고 적어도 음식물 쓰레기는 거의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장을 볼 때도 먹을 만큼만 샀고 욕심부리지 않았다. 음식 준비가 간편한 음식들을 해 먹으며 만족하는 연습을 했다. 

병원 설거지가 폭식을 멈추게 하는 치료제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사실 아무도 나를 외국인 노동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영어가 서툴었던 내가 자존감이 낮아져 스스로를 외국인 노동자라고 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면 어떤가. 인종이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지면서 토론토에 뿌리를 내렸고 인내심과 평등성을 배웠다. 

모두가 꺼려하는 설거지를 하면서 음식의 소중함을 알았고 먹기 위해 뒤에서 준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부지런함을 체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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