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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주Ivy Oct 26. 2022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 2

앤과 약속하다

당신은 몇 가지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 

당신의 진짜 모습은 당신이 자신을 생각하는 실제 모습과 일치한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바라봤으면 좋겠는가?


"내 안엔 여러 모습의 내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썽꾸러기인가 싶기도 해. 

내 안에 내가 딱 하나라면 훨씬 편했을 텐데. 하지만 재미는 반으로 줄어들 거야."

-빨강머리 앤의 대사 일부-


학교에서의 나와 회사에서의 나는 집에서의 나와 다르다. 상황, 장소, 함께 있는 상대에 따라 나의 행동과 모습들이 달라진다. 

요즘 사람들이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을 부 캐릭터로 만들기도 한다. 

부캐로 활동할 때는 원래 자신의 모습과 다른 모습에 또 다른 매력을 주기도 하고 반복되는 삶에서 재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애교쟁이가 될 수 있고 무뚝뚝한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다.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수많은 감정들이 들락날락거리며 말들을 내뱉는데 그 말에 상대방이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힘을 얻기도 한다.  

내 안에 여러 모습이 있다는 것이 편하지는 않지만 일상에서 재미를 준다는 것을 알았던 앤처럼 

여러 자아를 가진 나를 인정하고 상황에 맞게 다른 내 모습을 꺼내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 다양한 내 모습들로부터 원래 가진 나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고 자신감도 따라온다.

더 나아가 곤경에 처한 나를 다른 부캐가 구출할 뿐만이 아니라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나의 발견을 통해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행복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초록지붕 집에 살면서 여러 가지 실수를 했지만 그때마다 나쁜 점들을 하나씩 고칠 수 있었거든요. 

자수정 브로치 사건으로 제 것이 아닌 물건엔 손대지 않게 되었고요. 진통제 케이크 사건은 요리할 때 덜렁대는 습관을 고치게 해 줬어요. 

머리 염색 사건으로는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로맨틱한 연극놀이에 빠져 오늘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실수를 통해 로맨틱한 걸 바라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라는 말에 매튜는 이렇게 말한다. 


"앤, 네 상상과 로맨틱한 것들을 모두 버리진 말거라. 지나친 건 나쁘지만 조금은 남겨두는 게 좋지 않겠니? 조금은 남겨두렴."


어렸을 적 당신의 상상력은 어땠는가?

상상력이 풍부했던 나는 글짓기 대회, 그림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경험이 있다. 

앤 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내 세상에서 놀았었던 기억이 또렷하기에 앤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에 대한 마음이 애틋하다. 

엉뚱한 상상력으로 쓸데없는 실험들도 많이 했고 덜렁대서 실수도 많이 했던 아이였다. 

그 엉뚱함을 알아줬던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 교단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 윤 선생님은 20대 후반이셨다. 

긴 눈매가 쳐진 모습이 마시마로 토끼를 연상시켜 우리들 사이에서는 마시마로 선생님으로 불렸다. 

윤선생님 덕분에 지금도 12살의 어린 나를 자주 만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그마한 애가 참 당돌했고 거침없었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이어서 거만하거나 건방졌던 12살의 나를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한다. 

집안에 있는 물건들로 여러 실험을 했던 이야기를 일기로 써가면 반 아이들 앞에서 항상 읽어주셨다. 

그 관심이 좋았는지 이상한 실험은 계속되었다. 윤 선생님은 나의 상상력을 무너뜨리지 않던 유일한 어른이었다. 

윤선생님은 매튜처럼 나의 상상력과 엉뚱함이 오랫동안 간직되기를 바라셨던 걸까. 

중학교 입학으로 12살의 엉뚱함은 사라졌고 학교가 정해놓은 규칙과 질서를 배워갔다. 

정답을 택해야 하는 시험과 모의고사를 풀면서 5학년의 상상력은 나만의 언어와 그림이 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책상에 갇혀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들을 암기를 했고 점점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윤선생님을 중 고등학교 때 만났었더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꿈을 키웠을 수 있었을까.


"여기 있는 것들이 다들 너무 화려해서 더 이상 상상할 여지도 없고. 이럴 땐 가난한 것도 위로가 되는 것 같아.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말이야."

-빨강머리 앤의 대사 일부-


어렸을 적에 친구들은 가지고 있고 나만 없으면 엄마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가 갖고 싶다고 말을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없어도 자신은 충분히 가진 아이라고 생각하며 상상을 통해 가질 수 있고 기뻐하는 앤의 태도가 기특하다. 

13살의 나는 친구들에게 인기 많은 아이가 되고 싶었다.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예쁜 것들도 마냥 가지고 싶었다. 엄마에게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과 신발을 사달라며 떼쓰기도 했다. 

본격적인 사춘기로 접어들어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가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에 예민해졌고 자기 멋대로였다. 

'나중에 너 같은 딸 낳아서 고생해봐라' 하던 엄마의 목소리와 '몰라! 내가 어때서'라며 방문 쾅 닫던 사춘기 시절 내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내 모습들은 항상 지나고 나면 보인다. 

20대에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욕망을 좇으며 보여주기 위해서 살았다. 

내가 목표로 한 것을 못 이루면 인생이 망할 것처럼 불안정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혼잡한 마음과 어지러운 정신의 방해로 시야가 좁아 내가 보이지 않았다.

앤은 없는 것에 대한 집착, 세상으로 부터의 원망, 불공평함을 느끼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현재 가진 것들에 감사하며 다른 화려한 것들이 없어도 상상력을 통해 현재를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보인다.


요즘 현대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채우는데 에너지와 돈을 소비한다.

채워지지 않는 물욕에서 오는 공허함과 타인과의 비교와 집착에 파 묻혀 인생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불행을 겪을 수 있다.

타지에서 캐네디언들과 끝없는 비교로 매일 힘들다며 부정적이었던 내게 앤의 태도는 가뭄에 단비처럼 나를 살렸다. 


"이제 전력을 다해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아, 내 오랜 친구들, 너희들의 순수한 얼굴을 다시 보게 돼서 기뻐. 그래, 기하 너도. 아줌마, 저는 정말 멋진 여름을 보냈어요." 

앤의 구절을 읽으면서 나를 위했던 휴식들은 어땠었는지 되돌아볼 수 있었다.

쉬는 날에도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에 괴로웠다. 

시간이 주어져도 오로지 나를 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영어공부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미드를 보거나, 부자가 되는 습관을 알려주는 유튜브를 틀어 놔야지 마음이 놓였다. 

여행을 갔을 때도 오로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휴식을 갖지 못했다. 

유명한 곳은 다 가봐야 해서 마음이 바빴고 많은 액티비티로 심신이 지쳐가는 휴가를 보내기 일쑤였다.

학생 때는 공부 걱정 없이 열심히 놀면서 여름 방학을 보내는 것은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나 역시 방학 동안 다음 학기를 예습하는 학원에 다니느라 방학 때도 공부와 씨름했고 다음 학기에 대한 불안감으로 마음 놓고 놀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잘 쉬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서른이 넘어서도 나를 위해 온전히 쉰다는 것에 불안한 감정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온전히 쉼으로부터 나오는 창조적 에너지를 경험했기에 하루 중 한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게 집중하려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입가에 미소를 지어본다. 


말수가 줄어든 앤에게 마릴라는 왜 그런 거냐고 물었더니

"글쎄 모르겠어요. 전처럼 많이 말하게 되지 않아요.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가슴속에 그냥 간직하고 싶어 져요. 

제 마음속 생각들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싫고 이상한 애 취급을 받고 싶지도 않고요. 거창한 단어들은 이제 쓰고 싶지 않아요. 

좀 안타까운 일이죠. 이제 제가 원한다면 그런 단어를 써도 될 만큼 자랐는데 말이에요.

성인이 된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재미나기도 하지만 제가 기대했던 거랑은 다른 것 같아요. 

지금은 배워야 할 것도 많고 해야 할 일이나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서 거창한 단어를 쓸 틈도 없어요."


앤의 끊임없는 재잘거림과 긍정은 사람에게 힘을 준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던 앤이 어엿한 숙녀가 되어 좋은 생각은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다는 말이 끄덕여졌으나 어린 앤의 엉뚱 발랄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꼬마가 서서히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성인이 되어가면서 나이에 맞게 행동하고 주위를 신경 쓰기 시작하는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는 앤은 성인이 되는 것은 설레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할 일도 많아지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겨 옛날처럼 상상 속에 빠져들 시간이 줄어든다. 말 수가 줄어든 앤의 모습에 마릴라가 섭섭해하는 모습에서 엄마가 떠올랐다. 

나는 엄마를 그리워하지만 통화버튼은 잘 누르지 않았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와 다른 일들로 엄마와 통화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주말에 시간 나는 날 전화를 걸 때면 반갑게 큰딸~ 하고 맞이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자주 할걸.'약간의 후회가 밀려온다. 


말수가 적은 나는 주로 질문을 하고 많이 듣는 편이다. 안 좋은 얘기는 좋지 않은 감정만 상기될 뿐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꺼내지 않았고 좋은 얘기를 해도 긴 과정은 생략하고 간단하게 요약한다. 


"딸 벌써 끊게? 이제 자고 내일 일까야 되지? 자주 전화해 이 시간에 전화하면 엄마 항상 받아." 

목소리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있다. 다음 통화는 좀 더 길게 하리라는 자신 없는 다짐을 또 해본다. 


'아, 꿈을 가진다는 건 즐거운 일이야. 그리고 꿈에는 끝이 없다는 것, 그게 제일 좋은 점인 것 같아. 목표 하나를 이루자마자 더 높은 목표가 반짝이며 나타나다니! 삶이란 것이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빨강머리 앤의 대사 일부-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절망적인 현실에도 꿈을 꾸면서 앞으로 삶을 기대하며 살 것이냐 차가운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단정 짓고 불평하면서 살 것이냐는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차갑고 냉정한 현실에 앞날을 기대하면서 살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반감이 들 때가 많다. 

어떤 선택을 하던 결과가 같다면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하며 과정을 즐기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앤은 매튜가 없어도 세상이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서글픔을 느꼈다. 

사랑을 잃은 아픔으로 슬픔이 가득했지만 초록지붕 집도 이전 같은 일상을 되찾아 규칙적으로 할 일을 해내갔다. 

앤도 점점 슬픔에서 벗어나 다시 떠오르는 태양과 뜰에서 터지는 연분홍빛 꽃망울들을 보고 있으면 다시 예전처럼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다. 

다이애나가 찾아오면 여전히 반가웠고, 꽃들이 흐드러진 아름다운 세상과 사랑과 우정이라는 아름다운 세계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앤의 상상력을 여전히 자극하고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삶은 여전히 여러 가지 형태로 앤을 끈질기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앤을 슬프게 했다.

매튜 아저씨가 이 세상에 없는데 자신은 여전히 일상으로부터 오던 행복을 느끼고 있어서 죄스럽게 느껴진 앤에게 목사 부인 앨런이 이렇게 말한다.


"매튜는 떠났지만, 네가 여전히 주변의 즐거운 것들에서 기쁨을 찾아내고 웃으면서 지내길 원하실 거야.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치유력에 마음을 닫아 버리면 안 돼. 

네 마음도 이해할 수 있어.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하게 되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 더는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는데도 무언가 다시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세상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그동안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말이야."

-빨강머리 앤의 대사 일부-

매튜의 죽음으로부터 모든 인간의 삶의 여정 끝에 기다리고 있는 죽음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모든 만물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이다. 

시간의 유한함 앞에서는 부자든 왕이든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어 준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 같지만 지구의 자전과 태양을 공전으로 세상은 변함없이 흐른다. 

결국 죽음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마지막 목적지라면 최대한 도착지에 건강한 몸으로 늦게 도착해야지 않겠는가. 

길가에 그림을 그려 놓은 꽃들과 나무를 집으로 생각하고 동물을 벗으로 삼아 자연을 만끽하는 여정을 그리면서 가야 하지 않겠는가. 

태양이 주는 따스함을 다른 이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푸른 달이 주는 강인함을 벗 삼아 모험을 하면서 가야 하지 않겠는가. 

길을 가다가 두 갈래길을 마주치게 되면 어느 방향으로 갈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결정으로 미래가 이어진다. 길모퉁이를 만날 때면 무엇이 나올지 몰라 긴장도 되지만 멋진 것을 기대하는 설렘도 맛보기도 한다. 

길을 걷다가 사람이 사는 마을을 만날 때는 이 마을에서는 사람들과 어울려 사계절을 지내보기도 하고 저 마을에서는 뜨거운 사랑으로 자식도 낳기도 한다. 

호랑이를 만나 생존 문제에 위협을 받기도 하고 광활하게 펼쳐있는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는 행운도 가지게 된다. 

앞만 보고 직진으로 달리는 자는 도착지에 너무 빨리 도착해 생각지도 못한 죽음이 코 앞으로 다가와 있을 수도 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어떠한 여정을 그려 나갈 것인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으므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의 질문이 곧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

내일 당장 죽음이 코 앞에 닥칠 수 있는 것이 인생임을 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저 내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살 날은 많아, 언젠가는 하겠지라는 마음으로 미뤘던 일들도 많다. 

폭식증을 경험하며 죽음에 대한 인식이 코 앞으로 다가왔을 때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돈을 벌어서 나중에 효도하겠다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미루다가 큰일이 터지고 나서야 후회하는 일은 절대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지막 종착역은 죽음이기에 내게 앞으로 일어날 모험들이 힘들거나 아프더라도 그마저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것임을 앤과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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