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은 다시 넓지 않은 방과 동생으로 한정되었다. 어묵과 야채를 조금 넣어 끓인 죽이나, 핫케이크 가루를 밥솥에 익혀 만든 빵떡, 혹은 마른반찬과 김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나면, 취업사이트를 뒤져서 이력서를 넣고, 드라마를 한 두 편 보고, 가끔 건강을 염려해 체조를 하거나 누워서 자전거 타기를 하는 단순한 생활이 반복되었다. 한동안은 해방감을 누리며 마음 편히 잠이 들었다.하지만 한 달, 두 달, 세 달.. 불합격 소식을 들으며 백수생활을 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넘쳐나는 해방감이 오히려 나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누워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이어졌다.
동생과도 자주 부딪혔다. 늦은 밤 지쳐서 집으로 돌아온 동생은 사소한 것에도 짜증을 부렸고, 백수로 지내는 누나를 싫어하고 무시한다고 받아들인 내가 같이 쏘아붙이면 언쟁이 벌어져 씩씩대며 잠이 들었다. 속으로는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막상 동생의 날 선 말투를 들으면 나도 울컥 화가 났다. 그때 살았던 집이 원룸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그때 동생도 상사의 괴롭힘과 야근에 시달리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그 상사는 동생을 따로 불러내어 출신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얼토당토않은 지시를 하고, 이상한 꼬투리를 잡아 많은 일을 맡기거나 일을 다시 하라고 하는 등 동생을 교묘하고 끈질기게 괴롭혔다고 했다. 정말로 그만두어야 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동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성과는 없고 시간이 많아지니 눌러둔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무엇에 홀린 듯이 글 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다. 내가 쓴 글을 사람들에게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동생이나 친구보다는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시선이 필요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뒹굴거리는 것보다 생산적이고, 건전하고 돈이 들지 않는 활동인 데다가, 글을 주제로 모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서 무료함도 달랠 수 있었다. 그 카페에서는 매주 글의 분량과 형태에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백일장이 열렸고, 나는 편하게, 하지만 약간의 기대를 갖고 매주 참여를 했다. 회원들의 좋아요 수로 순위를 정했는데 그중에 여러 번 1등을 했다. 매우 기뻤다. 객관적으로 내 글이 나쁘지 않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느끼자 의욕도 생겼다. 적극적인 마음이 되어 회원들과 서로의 글을 읽고 감상을 얘기하는 모임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그 활동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딴짓을 곁들인 백수생활을반년쯤 했을 무렵, 서울에 사는 작은 아버지께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화가 내 미래를 통째로 바꿨다.
“그래, 요즘 취업 준비 중이라면서? 잘 되니? 어떤 쪽으로 이력서를 넣고 있어? 네 전공이 천문학이라 인문계 쪽 취업이 쉽지는 않을 텐데...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은 정보를 알게 되어서 알려 주려고 전화했다. 정부에서 취업과 연계되는 교육과정들을 운영한다는데, 교육비는 들지 않고, 오히려 교육을 받는 동안에 월급이 나오는 데다가, 교육이 끝나면 취업도 꽤 잘 되는 모양이야. 내가 본 건 기상청에서 하는 거였는데, 네 전공과 비슷하지 않니? 다른 것도 있을 테니 이공계 쪽 국비지원 교육과정을 한번 찾아봐. 인문계 쪽 보다 그쪽이 취업도 더 잘 되고 전망도 좋을지 몰라. 한번 고민해 보고 지원해 보렴. 다른 별일은 없지? 동생도 회사 잘 다니고? 그래, 건강 잘 챙기고. 한 번 놀러 와.”
‘내가 잘하는 것을 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 일 수도 있겠어.’ (나는 아직 행복한 지구라는 모토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기상청 국비지원 교육과정에 지원을 했다. 면접을 보았고 합격통보를 받았다. 기상청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기도 했다. 뭔가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생은 스무 명 남짓이었고, 대부분 대기과학과 졸업생이었는데 나를 포함해서 역사학과나 지리학과 등 전공이 다른 교육생도 몇 명 있었다. 처음 두 달은 9시부터 6시까지 이론 및 컴퓨터 프로그램 교육을 받았고, 이후 6개월 동안에는 여러 기관으로 흩어져 실습을 했다. 교육생마다 멘토가 한 명씩 배정이 되고, 멘토의 지도아래 연구를 수행해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최종 발표를 하는 것이 실습의 내용이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것이 교육의 목표였다.
교육은 나와 잘 맞았다. 어렵기도 했지만 지구과학과 수학을 기본으로 한 이론 교육도 따라갈 만했고, 대학시절에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다시 기초부터 배우니 할 만했다. 교육생들끼리도 사이가 좋아서 교육을 받는 시간이 즐겁고 재밌었다. 두 달간 교육을 받고 치른 필기시험에서는 상위권을 차지해서 더욱 의욕이 생겼다.
실습은 각자 다른 기관에서 수행했는데, 나는 서울 본청 어느 과로 배정이 되었다. 본청에는 나를 포함해 9명의 교육생이 있었다. 실습 기간에는 짬을 내어 다른 교육생들과 함께 기상기사 자격증을 준비하기도 했는데, 기본기가 부족한 나는 아침에 조금 일찍 출근해서 이론 공부를 하고 기출문제를 풀었다. 1차 필기시험을 합격하고 나서는 다 같이 모여 앉아 2차 실습에 대비해 일기도를 그리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무난히 자격증을 땄다.
연구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니 자연스럽게 열심히 하게 되었다. 정해진 프로세스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주제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하나씩 단계를 밟아 조사를 하고, 방법을 찾고, 결과를 도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일은 재미있었다. 그 문제가 자연과 닿아 있고 공부한 것들과 닿아 있으니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 교육을 수료하고 나면 어디에 어떻게 취업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그림자처럼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연구를 부지런히 한 덕분에 연구 보고서 발표회에서 1등을 한 나는 최우수 교육생으로 교육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관 연구기관에 취업을 했다. 그때부터 연구원 경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