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새눈 Oct 16. 2023

패딩과 맞바꾼 열정




  이제 필요 없어진 잎들을 떨궈내고 다음 계절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는 나무들처럼, 나도 영어와 일본어 스펙을 쌓으며 추운 계절을 견디고 있었다. TOEIC 점수와 JLPT 2급 자격을 따내고 나니 입춘 즈음이었다.


 당시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일찍이 취업에 성공한 동생의 월급과 고향에서 부모님이 부쳐주는 얼마간의 돈으로 월세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던 터라, 집 밖에도 거의 나가지 않고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않는 생활을 했다. 계획을 세워서 공부를 성실히 했고, 그런 만큼 만족스러운 어학 성적을 얻어서 마음이 든든했지만, 몇 달간 집에만 있다보니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게 조금 두렵기도 했다.


  일단 지원할 분야를 선택해야 했다. 인문계 쪽 업무는 분야만 들어서는 정확히 무슨 일을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였다. 채용공고를 들여다보며 고심했다. 경영지원, 기획, 재무, 홍보, 교육 업무는 나와 거리가 있어 보였고, 직원들을 서포트 하는 총무(인사총무) 업무라면 내가 생각했던 업무와도 맞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채용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까해서 대학교에서 열리는 대기업의 채용설명회에도 몇 번 얼굴을 들이밀어 보았다. 하지만 결국 나 정도의 스펙이면 어느 정도 수준의 회사가 서류합격 안정권인지, 전공 제한이 없다고 하더라도 천문학과 출신이 합격할 가능성이 있는 곳인지와 같은 정보는 알지도 못한 채 접수마감에 맞출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지원서를 넣었다. 대기업은 물론이고 제약회사, 의류회사, 무역회사 등 공채가 난 곳은 가리지 않았다. 하루종일 자기소개서를 썼다.   


  야속하게도 몇 달째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럴 즈음 습관처럼 들락거리던 공연계 취업소식을 모아놓은 사이트에서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뮤지컬제작 회사의 무대감독 인턴 채용공고를 발견했다. 땅에 발붙이고 살자고 생각했지만 미련하게도 약간의 미련이 남아 있었고, 하필이면 그 시기에 난 그 공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정말 마지막 시도라는 생각으로 이력서를 넣었다.




  그즈음 명동에 위치한 어느 여행사에서 서류합격 통지를 받고, 1차 면접을 통과했다. 며칠 사이에 뮤지컬제작 회사에서도 연락이 와서 면접을 다녀왔다. 얼마 후, 여행사 2차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고, 뒤이어 뮤지컬 제작회사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았다.


 운명의 장난처럼 여행사 2차 면접 날짜와 인턴 출근날이 겹쳤다. 인턴은 6개월 계약직이긴 했지만 채용이 확정된 것이었고, 여행사는 면접을 보아도 합격이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수습기간을 거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었다. 나에게 그 두 곳을 둔 고민은 계약직인지 정규직인지 혹은 어느 쪽이 합격 가능성이 높은지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길로 나뉘는 지점에서 어떤 한 가지를 완전히 버려야 하는 문제였다.



  콘서트 분야에서만 일을 해보았기 때문에 뮤지컬 분야에서 일하는 건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애초에 원했던 것이 뮤지컬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기도 해서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열정페이를 받으며 고생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콘서트 분야와는 다르게 안정적인 근무환경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생활)에서 월급도 받아가며 일을 한다면 콘서트 현장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되었다. 하지만 어쩌면 공연계라는 것이 결국에는 큰 틀에서 많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뒤따랐다. 지금이 내 인생에 있어 다시 돌아가지 못할 선택을 해야 하는 어떤 분기점 같은 것이 될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초조했다. 머릿속이 그 생각으로 가득 차서 하루 온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공연일을 한다는 것은, 꿈을 좇는 일이긴 하지만 배고프고 힘든 생활을 각오해야 하겠지. 아직 젊긴 하지만 또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닌데, 나는 모든 것을 떨치고 꿈만을 향해 나아갈 각오가 되어 있을까.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긴 너무 아쉬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인걸! 그 뮤지컬은 정말로 유명하고 규모가 큰 데다가, 내가 정말로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 일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해. 정말로 이렇게 겹치지만 않는다면 그 일을 하루라도 해보고 싶어.


  하지만 지금의 선택은 혹 하는 가벼운 마음이나 약간의 관심만으로 결정하기에는 사안이 중요해. 여행사에서의 2차 면접도 쉽게 오지 않을 기회야.


  그런데 공연계에서 평생 일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평생 이 일을 좋아할 수 있을까.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꿈을 잃지 않고 커리어를 쌓으면서 일을 할 수 있을까. 공연 일을 계속하려면 모든 불편함, 궁핍함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열정이 있어야 할 텐데 지금 나에게 그런 열정이 남아 있을까. 이런 기회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자체가 이미 열정이 식었다는 증거는 아닐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무렵, 한 가지 기억이 나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몇 달 전 찬바람이 매우 세게 불던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얼음장 같던 추위에 내 열정을 너무나도 쉽게 팔아버렸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날따라 휘몰아치던 바람은 얇은 점퍼를 입은 내 몸을 후드려 때리는 것 같았고, 옷 사이의 틈과 봉제선 사이로 스며들던 냉기에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짧은 순간 나는 꼭 보고 싶었던 뮤지컬을 위해 모아두었던 비상금으로 패딩점퍼를 사야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즐겁게 해 줄 두어 시간이 아니라, 추위를 나게 해 줄 겨울 옷이었다. 내 마음이 냉혹한 현실에 가볍게 꺾일  수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창피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받아들였다. 나는 가난하고, 가난한 나에게 뮤지컬은 사치라는 것을. 하지만 그런 뼈아픈 깨달음도 안락한 방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고 나니 금방 잊혔다. 우스운 일이었다. 자조 섞인 얼굴로 옷장에 걸려있던 패딩점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선택했던 것이다.  


  나는 열정을 패딩점퍼와 맞바꿨다.




(계속)

이전 10화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