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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새눈 Oct 21. 2023

핑크빛 허상이 남긴 절망





 6월 중순, 명동에 위치한 여행사의 경영관리팀에 출근하게 되었다. 출근 첫날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출근으로 부풀었던 나의 마음은 지옥철에서 만난 치한으로 인해 쪼그라들었다. 치한은 뜨듯하고 물컹한 중요부위를 한참 동안이나 내 엉덩이에 의도적으로 밀착시켰는데, 당황스럽고 무서워서 몸이 굳어버린 나는 어떤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거나 화를 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사람들 틈에 갇혀 울상만 짓고 있었다. 치한은 지하철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일 때 사람들의 움직임에 편승해 자신의 몸을 나에게 은근하게 비벼댔다. 나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배를 앞으로 내밀거나 비좁지만 옆으로 한 발짝 움직이는 등의 시도를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는 끈덕지게 나에게 들러붙었다. 지하철의 유리문에 비친 그 사람을 언뜻 보았는데 전혀 치한 같은 인상이나 차림이 아니라 정장을 입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 사실에 한번 더 깜짝 놀랐다. 을지로입구역에 도착해서야 지옥 같았던 지옥철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지하철역을 벗어나 회사로 걸어가는 내내 엉덩이에 불쾌한 감각이 껌처럼 들러붙어 있어 괜히 치맛단을 잡아당기며 먼지를 털었다.



  바쁜 일상은 그날의 불쾌함을 금세 잊게 만들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사람들과 똑같은 줄무늬 셔츠를 입고 국민체조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명랑한 또래들과 입사동기가 되었고, 새로운 동료들과 상사들에게 업무를 배우느라 매일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좋은 곳으로 워크숍을 가서 즐거운 시간도 보냈다.


  제주도로 팀 워크숍을 갔을 때 비행기를 처음 탔다. 나는 구름을 내려다보는 신기한 경험을 했지만 하늘 위에서 멀미로 고생을 했고 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토쟁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놀림도 즐거웠다. 제주도에서 꿩고기도 먹고, 요트도 타고, 펜션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테마파크 같은 곳도 갔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콧 속으로 파고들던 제주도의 달콤한 공기가 너무 좋았다. 몇 달 후에는 강원도로 회사 전체 워크숍을 갔는데, 한탄강에서 래프팅도 하고 캠프파이어도 했다. 한탄강에 빠져서 팽이처럼 돌돌돌 돌면서 떠내려 가던 (구명조끼를 입은) 나를 매우 건장한 가이드 청년이 건져줄 때에는 몹시 다급한 기분이었지만, 보트를 타고 굽이치는 강의 물살을 가르며 자연경관을 감상하는 기분은 꽤나 상쾌하고  즐겁고 신이 났다.



  여행사의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했다. 내 사수였던 같은 팀 A 대리는 내 생일을 맞아 베니건스에서 밥을 사주기도 했고(이때 처음으로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를 먹어보았다!), 같은 팀이지만 회계업무를 하던 동갑내기 친구는 가끔 나를 따로 불러내 간식을 건네거나 팀의 새로운 소식을 몰래 전해주곤 했다. 입사동기들과는 유난히 마음이 잘 맞아서 만나면 웃음꽃이 피었다. (첫 월급을 받은 기념으로 같이 찍었던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보고 있으면 밝은 에너지가 사진밖으로 넘쳐흐른다. 다들 잘 살고 있기를.) 가끔 점심을 먹고 청계천 주변을 산책하며 중국팀, 동남아팀, 고객관리팀, 홍보팀 등에서 근무하던 동기들에게 다양한 가십거리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는데, 상사 험담에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업무의 힘든 점에 대해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누군가 수줍게 연애이야기를 꺼내면 어설픈 훈수를 두며 까르르 웃어대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젊음을 만끽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한동안 열에 들뜬 채로 지냈다.






  나는 인사총무와 교육관리 업무를 맡았다. 주로 프로세스대로 처리하면 되는 일들이었다. 세금이나 공과금의 지로용지가 날아오면 전표처리를 했고, 때가 되면 사무용품 수요조사를 해서 필요한 것을 구매했으며, 투어상품의 고객들에게 제공되는 여러 물품들의 재고를 파악해서 늘 부족하지 않게 새로 주문을 넣었다. 매일 지정된 시각에 1층 우편함에 우편물을 가지러 가서 직원들에게 우편물을 배달하고 필요한 우편물을 발송했으며, 때때로 신청받은 명함 제작 주문을 넣고, 일주일에 두 번 지정된 요일에 중국 비자신청 서류를 작성해서 담당자에게 건넸다. 가끔 경력증명서나 재직증명서를 요청하는 직원이 있으면 창고에 있는 인사기록부를 뒤져 기록을 찾아왔고, 교육이 예정된 날에는 교육담당 과장님의 지시에 따라 교육장을 관리하거나 해당 직원들에게 교육 참석 안내를 했다. 배우는 게 빠르지는 않아서 처음에는 사수에게 잔소리를 들었지만 나만의 속도로 차근차근 일을 배워서 한 두 달 후에는 일을 잘 해낼 수 있게 되었다.


  하는 일이 만만해지자 멋모르는 생각으로 반년만 경력을 쌓아서 더 큰 회사로 이직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반년을 경력으로 인정받을 생각을 했다니 나는 정말 세상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풋내기였다.) 나는 1시간 일찍 집에서 나와 한산한 지하철에서 업무 관련 서적을 읽었고 회사에 도착해서는 자격증 공부를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퇴근 후에 대학로에 있는 자격증 학원에 갔고, 주말엔 인사업무를 하는 사람들과 만나 북스터디를 했다. 또 중소기업 직원의 업무능력 향상을 위해 정부가 제공하는 교육기회도 찾아내어 적극적으로 참석했다.



  그즈음부터였을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에 성취감을 잃고 권태와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한 것은.


  정해진 대로 처리하면 되는 일들은 요령이 생기자 빨리 처리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남는 시간이 생기면 멍하니 앉아 있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의욕을 가지고 그 시간을 활용하여 불편함이 있거나 개선할 여지가 있는 일들을 찾아서 했다.


  예를 들면 정리가 전혀 되지 않아서 발 디딜 틈이 없던 비품창고를 정리하는 일이나, 부서별 우편함을 만드는 일, 또는 뒤죽박죽 섞여 있던 인사기록부를 한글 자음 순으로 정리하는 일 등이었다.


  비품창고는 물건들이 박스 째 마구잡이로 쌓여어서 사람들이 물건을 뒤지다가 지쳐 나를 호출하는 일이 잦았고, 물건을 다 쓴 줄 알고 새로 주문요청을 하고 나면 어딘가에서 툭 튀어나오는 물건을 마주하기도 했다. 시간을 들여 창고를 다 뒤엎고 정리를 했다. 카테고리별로 구역을 나누어 물건의 위치를 정하고, 물건이 한눈에 보이도록 정렬해서 배치했다. 그러자 재고파악이 용이해지고 내가 호출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틈틈이 가서 정리를 해야 하기는 했다.


  부서별 우편함은 회사의 모든 우편물을 내가 찾아서 일일이 해당직원에게 가져다주었는데, 그 시스템이 너무 불편해서 지정된 장소에 팀 별 우편함을 만들고 각 팀 담당 직원을 정해 하루에 한 번 가져가게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담당직원이 늦거나 잊어버리면 결국 내가 가져다주게 되긴 했다. (회사의 전체 직원은 200명 남짓 되었다.)


  회사를 거쳐간 몇 백명의 직원들에 대한 인사기록부는 10층 창고에 파일철로 보관 중이었는데,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어서 직원 기록을 한번 찾을라치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뒤져야만 했다. 그게 매번 너무 번거로워서 짬짬이 창고에 가서 인사기록부를 정리했다. 낡은 종이를 하도 만지작거린 탓인지 어느 순간 오른손 검지 손톱이 물결모양으로 변했는데 병원에 갔더니 원인도 잘 모르고 예후도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반복되는 일들은 지루하기만 했고, 애를 써서 개선을 해보려고 했던 일들은 잠깐 효과를 보았을 뿐 여전히 불편한 점들이 남아 있거나 내 몸에 병을 남겼다. 생각하지 않고 정해진 순서대로 처리하면 되는 일, 잘해도 티가 안 나고 못하면 티가 나는, 현상유지를 위한 일들이 의미 없게 느껴지고 지긋지긋해졌다. 그리고 총무 업무의 특성이긴 하지만 자질구레한 허드렛일 같은 일들이 많아서 업무에 대한 동기부여도 되지 않았다.



  하루는 새로 들어온 막내직원과 내가 팀 간식과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사러 나가려고 했더니, 팀장님이 콕 찍어서 나만 다녀오라고 했다. 경영관리부서는 회계팀과 인사총무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막내직원은 회계팀이었고 팀장님도 따지자면 회계팀이기 때문인지 회계팀 직원에게 다른 일들을 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느낌이 있었다. 혼자서 들고 오기에는 양이 좀 많을 것 같기도 하고, 팀의 일이니 막내와 함께 가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바쁘지도 않은 막내를 굳이 제외시키고 나만 보내는 팀장님이 그날따라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런 대우가 불합리하다고 느꼈고, 팀장님의 태도가 나를 허드렛일이나 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여겨져서 기분이 나빴다.


  구매한 간식과 물건들은 역시 혼자 들고 오기에 양이 많았고 무게 때문에 단단하게 늘어진 비닐봉지의 손잡이가 손가락을 파고들어 손이 아팠다. 팔도 아프고 손도 아프니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나는 봉지를 양손에 든 채 사무실이 있는 4층이 아닌 건물 1층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끝칸에 들어가서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변기뚜껑 위에 앉아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벌게진 손가락으로 훔쳐냈다. 화장이 지워지면 운 티가 날까 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모아서 눈물을 바닥으로 수직낙하시켰다. 그날은 내가 과민하게 반응했거나 너무 감정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씩 쌓여왔던 것들이 그날 팀장님의 태도로 임계치를 넘어섰고 내 안에 생겨난 미세한 균열은 거대한 틈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결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즈음 업무 외적으로도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사회경험이 없는 내가 느끼기에 나와 안 맞거나 이상해 보였던 것들은 주관적인 의견이므로, 그런 부분들 객관적으로 나쁘거나 흠잡을 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고, 그 이면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며, 나의 좁은 식견으로 오해한 것일 수도, 혹은 풋내기인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경력자의 통찰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내가 느낀 바를 솔직히 적겠다.


  나의 사수였던 A 대리는 평소에 사람 좋기로 유명했고 융통성을 발휘해서 일처리를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자신의 업무처리능력을 믿는 탓인지 그때그때 일처리를 하지 않다가 상사가 무언가 지시를 할 때만 급하게 일처리를 했다. 평소에는 한가하게 지내다가 그럴 때만 엄청 바쁜 티를 내면서 (그때그때 일처리를 하고 있는) 나에게 이것저것 시켜서 내 일이 밀리게 하는 일이 잦았고, 그때그때 해 놓지 않은 일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으며, 또 미리 생각해서 일처리를 하지 않은 탓에 일의 번거로운 뒤처리를 내가 맡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인사업무를 총괄하고 있던 B 과장은 평소에 조용하고 젠틀했지만, 꼭 퇴근시간만 되면 나를 불러서 업무를 알려주고 싶어 했다. B과장이 파티션 위로 고개를 쭉 빼고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까딱까딱할 때면 어김없이 6시가 되기 20~30분 전이었다. 그 시간에 불려 가면 30~40분은 붙잡혀 있었고, 설명이 끝나면 과제도 내주었기 때문에 일찍 퇴근하는 것은 물 건너간 셈이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업무가 총무업무보다는 인사업무이긴 했지만, 퇴근을 미루면서까지 배우기는 싫었다. 학원 때문에 일찍 퇴근할 때면 티 나게 서운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던 B과장은 왜 퇴근시간만 다가오면 나에게 일을 가르쳐주고 싶어 했던 것일까.


  어느 날은 술을 좋아하는 무리들에게 직급이 낮은 내가 붙들려 4차까지 회식을 했는데, 제비인가 참새인가 하여튼 작아서 먹을 것도 없는 새 구이까지 먹고 나서 집에 도착하니 새벽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그날 분명 A 대리는 오늘 늦게까지 마셨으니 내일 조금 지각하는 것은 봐주겠노라고 호기롭게 얘기했는데, 순진하게 그 말을 믿고 다음날 조금 지각을 한 웃는 얼굴의 나에게 A대리는 어젯밤의 기억이 없는 듯이 나를 나무랐다.


“새눈, 무슨 일이 있어도 출근시간을 지키는 게 사회생활의 기본이야. 어제 회식이 늦게 끝났다고 해서 이렇게 늦으면 되겠어? 다음부터 조심해.”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멍했다. A대리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회식 이후로 A 대리는 내가 더 친근해졌는지 농담을 더 건네기도 하고 가끔 나를 더 챙겨 주기도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배신감이 들었던 그날 아침이 떠올랐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년에 한 번 외부 회계사들에게 회사의 회계 감사를 받는데, 그 작업이 끝나면 경영관리팀 전체와 회계사들이 회식을 했다. 1차로 고깃집에서 맛있게 고기를 구워 먹고 2차로 노래방을 갔는데 거기서 아주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


 맥주와 마른안주가 같이 나오는 노래주점이었는데, 팀장님이 나서서 분위기를 띄웠고 이어서 회계사들도 신나는 노래를 연이어 부르며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나는 시끄러운 곳이나 노래방에 익숙하지 않아서 자리에 앉아 손뼉을 치고 있었다. 노래방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서 있거나 몸을 흔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A 대리의 눈치에 못 이겨 나도 쭈뼛거리며 일어섰다. 그때 근처에서 노래를 부르던 회계사가 갑자기 한 손으로 내 허리를 확 감아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박자에 맞춰 좌우로 흔들던 자신의 몸에 내 몸을 밀착시켰다. 술냄새가 훅 끼쳐왔고, 순간적으로 회계사의 팔과 손이 닿은 허리께부터 온몸으로 소름이 쫙 끼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건 뭐지,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에 짧은 순간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여기저기 보냈지만 아무하고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다들 술에 취해 흥이 올라 있어서인지 조명이 어두워서인지 아무도 내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쭈뼛쭈뼛 손뼉을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늘 웃는 얼굴이던 순한 인상의 남자 대리님이 특유의 웃는 얼굴로 이러시면 안 된다고 말하며 회계사의 손을 내게서 부드럽게 떼어내주었다. 대리님의 웃는 얼굴 덕분에 분위기가 이상해 지지 않고 금방 순간을 모면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낯선 남자의 신체가 내 몸에 닿는 경험은 역시 불쾌했다. 모르는 사람,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이 아니라 업무 관계로 만난 사람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더 무력했고 억울했고 답답했으며, 그런 감정에 더해 수치심과 죄책감 비슷한 것이 얼버무려져 마음이 무거웠다. 그 대리님이 대담하게 나서서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더 이어졌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 대리님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사회생활을 오래 해 보니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이었는지 더 깨닫게 되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몇 달이 걸려 결국 원하던 자격증을 땄고, 일련의 교육과정들을 수료하면서 일명 '인사 전문가 자격'을 인정해 주는 인증서도 받았는데, 이력서는 넣는 족족 떨어졌다. 열심히 한 만큼의 보상이 따라와 주지 않으니 허탈하고 괴로웠다.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들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자 원망의 화살은 나를 향하게 되었다. 나의 대학과 전공으로는 해도 안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동안 순진하게 핑크빛 미래만을 꿈꿨던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별로인 사람인 건가 싶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현재를 불행하게 받아들이는 나의 개인적인 기질도 탓하게 되었다. 나는 융통성이 없고,  자신감도 부족하고,  금세 기가 죽으며, 상사의 비위를 적당히 맞출 줄 아는 요령도 없고, 눈치도 없고, 쓸데없이 성실하고, 쓸데없이 솔직했다. 또 말주변도 없고, 술자리도 싫어하고, 좋고 싫은 게 분명했으며, 불합리한 것들도 그냥 넘기지 못했다. 한마디로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평온하게 지내려면 나의 고유한 부분들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인지, 왜 이렇게 부족하고 고쳐야 할 것들 투성이인지, 이것저것 다 바꿔버리고 나면 그건 내가 맞는 건지,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지, 나를 뜯어고치지 않아도 괜찮은 곳은 없는지, 나도 장점이 있는 사람일 텐데 왜 이렇게 단점들 때문에 힘들기만 한 건지. 이토록 나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은 처음이라 다 팽개치고 어딘가로 도망쳐서 숨고만 싶었다. 그 와중에 이렇게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내가 나약하고 초라하고 못나게 느껴져서 또 주눅이 들었다.


  이대로 불행한 현실에 갇히게 될 생각을 하니 절망스러웠다. 계속해서 물결치며 자라나는 오른손 검지손톱을 볼 때마다 앞으로의 내 인생도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처럼 기약 없이 불행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스트레스가 심해서 아침마다 지하철을 타는 것이 너무나 고역이었다.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한숨이 나오고 가슴이 꽉 막히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회사에서는 말수가 점점 줄고 표정이 어두워졌으며, 말을 거의 안 하고 퇴근을 하기도 했다. 스트레스가 심해지자 몸에도 이상이 나타났다. 치맛단이 닿는 무릎 뒤 피부에 이유 없이 빨갛게 발진이 올라와서 쓰리고 가려웠고, 생리가 2주 내내 멈추지 않기도 했다.


  결국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정말로 눈물을 흘렸던 어느 날  결단을 내렸다. 수습기간이 끝나고 정규직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러니까 입사를 하고 반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사직서를 냈다.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인사업무 쪽으로 이력서를 넣어 볼 작정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집에서 취업에만 집중한다고 해서 합격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다거나, 무언가 스펙을 더 쌓을 수 있진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경력직 이직을 위해서는 지금의 회사에서 몇 년 더 경력을 쌓는 편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없었지만 이곳에서의 일은 나와 맞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더 견디다가는 정말로 매일 울면서 출근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곳이 그정도로 극한의 환경은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내가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은 허황된 기대가 무너지고 나서 스스로를 너무 몰아부쳤기 때문이었고, 내가 나와 맞지 않는 것들을 매우 예민하게 피부로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직서를 냈을 때, 아마도 형식적이었을 이사님과의 면담에서 나는 쓸데없이 솔직했다. 회사를 다녀본 것도 처음이었고 사직서를 내 본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분들이 정말로 나의 솔직한 속내를 궁금해한다고 생각했다.


“왜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나요?”

  “이 회사에서는 제가 원하는 롤모델을 찾을 수가 없어서요.”


  나는 최대한 나의 의중을 비껴가지 않으면서 서로 불편하지 않을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하지만 이사님은 납득이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다른 회사에 합격을 해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면, 회사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제가 없어도 A 대리님 만으로도 충분히 업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아마 당시의 나는 내가 하는 일은 하찮고 별 볼일 없으므로 내가 없어도 업무적으로 크게 불편함이 없을 거라는 의미에 더해, 정말로 질문에 해당하는 답을 내 방식대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한 것 같다. 덕분에 업무량에 대한 문제로 A 대리가 덩달아 이사님께 불려 다녔다.



출근 마지막 날  A대리는 씁쓸한 얼굴로 나의 안녕을 빌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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