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새눈 Oct 05. 2023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






  병원에 처음 출근 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병원 공기에 은은하게 배어 있는 소독약 냄새였다. 인력파견업체 직원을 만나 계약서를 작성하고 근무지로 안내를 받는 동안에도 병원의 소독약 냄새에 줄곧 신경이 쓰였다. 그 냄새는 왠지 모르게 주사기의 뾰족한 바늘이나 빨간 소독약이 묻은 솜 따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는데, 그것들이 한번 떠오르자 주사를 맞기 전이나 상처에 소독을 하기 전처럼 괜히 긴장이 되었다.


  그때 순백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 준 수간호사 선생님의 단정한 얼굴에 떠오른 인자한 미소가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수간호사 선생님은 인력파견업체 직원에게서 나를 인계받아 간호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모두(모두 여성이었다.)에게 나를 간단하게 소개한 후, 우직하고 다정한 인상의 J 언니에게 필요한 것을 알려주고 도와주라고 일렀다. (J 언니는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나를 가장 잘 챙겨주고 도와주었던, 내가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다.) J 언니는 진중하고 차분한 눈빛에 정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와 상냥한 말투를 가지고 있어서, 얼굴을 마주 보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면 금방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탈의실로 가서 하얀색과 연녹색이 섞인 반팔과 긴바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머리망이 달린 핀으로 머리를 단정히 묶은 다음, 주머니에 작은 수첩과 펜, 립글로스를 챙겨 언니를 따라 내과 외래 중앙 데스크로 향했다.


  내과 외래는 입구에 있는 데스크를 기준으로 양 옆으로 진료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에 환자들이 대기할 수 있도록 길쭉한 의자들이 열을 맞춰 놓여 있다. 대학병원의 외래 진료 풍경은 처음 보았는데, 진료 시간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거의 하루 종일 복작복작 들끓다가 진료시간이 끝나면 환영처럼 사라졌다. 그야말로 인파, 사람의 물결에 하루종일 휩쓸리고 나면 정신이 쏙 빠져서 멍한 채로 퇴근을 하기 일쑤였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그것에 더해서 외워야 할 것들이 매우 많은 것 또한 내 혼을 쏙 빼놓았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다른 직원들이 있어서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바빴기 때문에, 내가 쩔쩔맬 때면 내가 안내를 하는 환자의 시간은 물론이고, 내 일을 대신 처리해 주는 직원의 시간, 그리고 내가 쩔쩔매지 않았더라면 나와 직원에게 안내를 받는 순서를 맞이했을 환자들의 시간이 멈추는 것을 공기로부터 느꼈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는 환자도 있었지만, 못마땅한 표정을 짓거나 재촉을 하거나 푸념을 늘어놓는 환자가 더 많았다. 그럴 때면 안절부절못하고 손에서 진땀이 났다.


  직원들은 나의 도움 요청에 귀찮은 내색도 없이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하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일을 최대한 빨리 익혀서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필요한 것들을 수첩에 꼼꼼히 메모했다. 그리고 그것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참고하여 일처리를 했고, 그래도 모르는 것은 물어가면서 응대를 했다. 


  환자를 접수하고 안내해주기 위해서는 병원 내 주요 장소들의 위치(수납, 각종 검사실, 화장실 등), 병원에서 쓰이는 부서의 명칭(진료과목의 영어 약자: 내과  MG, 소화기내과 GI, 내분비내과 ED 등), 환자 접수 프로그램 사용법, 서류를 떼는 절차 등은 물론이고, 공복은 몇 시간 밥을 안 먹어야 하는지, 혈압 정상수치 범위(수축기, 이완기, 맥박)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약을 구분하는 두 자리 알파벳(DG는 먹는 소화제, DD는 바르는 연고제 등) 또는 특정 약물 이름(예, 유박스 : B형 간염 백신), 영어로 된 검사 이름(예, Routine U/A : 소변검사)을 비롯하여 각종 검사 방법 및 스케줄, 그리고 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 소요되는 기간, 검사 예약에 필요한 절차, 교수님 별 특이사항 등도 알아야 했다. 이런 것들을 전부 알아야 환자들에게 무리 없이 안내를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중앙 데스크에서 기본적인 것을 안내하거나, 예약을 확인해서 접수하는 업무를 했는데, 차차 처방에 따라 안내를 하거나, 서류를 떼기도 하고, 진료실에서 진료보조를 하거나 다른 과(성형외과, 재활의학과)에 지원을 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착실하게 능력치가 쌓였다.






  병원에 다니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의외로 하루 종일 서 있는 일이었다. 병원의 데스크는 서서 일하기에 알맞은 높이로 되어 있었고(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서비스직이 서서 일하는 것이 당연했다), 워낙 바빠서 몇 개 없는 간이의자에 앉을 수 있는 시간도 거의 없었다. 다리는 매일 붓고 아팠다. 집에 가서 저녁 내내 다리를 주무르는데도 부기가 채 다 빠지기도 전에 다시 출근을 해야했다.


  하루는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물이 떨어지는 고무장갑을 낀 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온 동생이 흐느끼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울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 다리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으흑흑 흑흑.”


 동생은 안심하는 동시에 조금 어이없어했지만, 자신이 설거지를 할 테니 쉬라고 말하며 내가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겼다. 사실 다리가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설거지 순번을 바꿔주지 않은 동생에 대한 야속함이 더해져 눈물버튼이 눌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은 눈물이 날 정도로 다리가 정말 많이 아프긴 했다. ^^;


  서 있는 것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유난히 다리가 잘 붓는 체질이었기 때문에 나만 이렇게 힘든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의료용 압박스타킹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병원에서의 하루는 2~30분 정도 일찍 출근해서 아침조례를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외래 간호사들이 내과 외래의 대기공간에 삼삼오오 모이면 수간호사 선생님이 병원에서 내려온 지침이랄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 등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이야기가 끝나면 모두 복도 공간에 두 줄로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다 같이 손뼉을 한번치고 양 엄지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면서 구호를 외쳤다.


“예, 당신 최고! “


  같이 근무하는 간호사들은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상냥한 사람들이었다. 간호사라는 직업을 택한 데에는 어느 정도 타고난 따뜻한 마음이나 희생정신, 봉사정신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만 모여서 그런 근무 분위기가 생긴 것인지,  병원의 근무 분위기가 원래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간호사들은 대체로 마음이 선하고 늘 미소 짓고 있었으며 상냥하고 경쾌한 말투를 사용했고 서로 배려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들의 친절한 태도에 감동한 시골 할머니들이 가끔 옥수수나 양파 같은 채소를 가져다주시기도 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그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찰을 하게 되었다.


  직원들은 규칙적으로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월급의 일부를 저축했고, 그 돈으로 여행을 계획하기도 하고 부모님의 건강검진을 시켜드리기도 했으며, 어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다가오는 미래를 자신들의 손으로 일굴 수 있음에 매우 만족하는 듯했다. 고정된 직장에서 예측 가능한 미래를 그리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안락하고 행복한 것인지 그들을 보며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 내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이런 삶도 있구나. 어른들이 내게 기대하는 삶이 이런 것이었겠구나. 이런 삶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토요일 오전 근무가 거의 끝난 시간, 한 언니의 남편과 아이들이 병원에 왔다. 남자아이가 셋이었는데 얼굴만 봐도 누구의 아이들인지 단박에 알 수가 있었다. 가장 어린아이는 아빠 품에 안겨 있었고, 나머지 두 아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있었는데 부끄러움을 많이 탔으며 얌전했다. 언니를 꼭 빼닮은 까무잡잡한 피부와 선한 눈매가 참 예뻤다. L 언니가 아이들과 꼭 같이 쑥스러워하며 나타났다. 점심 외식을 하기로 해서 언니를 데리러 온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엄마를 부르며 언니에게 달라붙었다. 언니는 가장 어린아이를 남편에게서 안아 들고 다른 아이들의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한 자리에 모인 가족의 모습이 매우 보기 좋았다. 한 번도 내가 꾸릴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가족을 보고 있자니 나도 언젠가 저런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낯설었다. 임신을 하고 기뻐하는 다른 언니를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행복한 가족의 완전한 실체를 직접 보고 나니 감상의 깊이가 사뭇 달랐다. 부러웠다.


  나에게 '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오로지 나 밖에 없, 그러므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내가 지향하는 바를 향해 부지런히 가는 것만이 최선이 완전한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약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행복에는 기쁨과 치유 이외에도 안정과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정적인 삶, 이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만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안정적인 삶이라는 것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할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날부터 생각이 많아졌다.


 




  병원에서 인상적인 경험들도 했다. 심폐소생술 교육에서 상반신만 있는 더미에 실습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을 배운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실습 차례가 되었다. 나는 배운 대로 더미의 의식을 확인하는 질문을 하고, 주변 사람을 지정하여 119 신고를 부탁했다. 그리고 더미를 바로 눕히고, 턱을 들어 기도를 확보하고, 손으로 콧구멍을 막고 입술로 입을 덮듯이 한 다음 힘차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다음 양손을 가슴 가운데 겹쳐 두고 팔꿈치를 굽히지 않은 채 손에 체중을 실어 숫자를 세면서 가슴압박을 했다. 교육을 진행하는 간호사가 말했다.


 “이렇게 약하게 해서는 사람을 살릴 수가 없어요, 더 더 세게 하셔야 해요."


 보는 것과 달리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었다.  여러 사람이 빙 둘러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어서 부끄러웠다. 나름대로 온 힘을 다했는데 더미와 연결된 장치에 나타난 나의 입김과 가슴 압박 수치는 계속해서 기준치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얼굴이 점차 달아올랐다.


"선생님은 이 분을 살리지 못하셨군요.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도움이 되었어요. 다음엔 더 세게 하세요. 다음 분! ”




   어느 날은 점심시간에 병원이 떠들썩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지금 부분 일식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멀찍이 내다보니 직원들이 병원 출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일식을 본다고? 해가 눈으로 보이나?'


  얘기를 전해 듣고 궁금한 마음에 나도 출입구 쪽으로 가보았다. 사람들이 다 같이 뭔가를 눈에 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게 뭐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같이 갔던 직원 중 한 명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저쪽에서 오는 누군가를 반갑게 맞았다. 그 사람은 영상의학과 직원이었는데 까만색 종이 쪼가리 같은 것을 몇몇 사람에게 건넸다. 받아 들고 보니 x-ray를 찍을 때 쓰는 필름조각이었다. 사람들이 왠지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곧 나도 한쪽 눈을 감고 다른 쪽 눈에 필름지를 대고 고개를 젖혀 해를 보았다. 일부가 곡선 모양으로 가려진 창백한 태양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우와!’


 내 생애 처음 본 일식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늦잠을 자고 버스를 놓치고 버스에서 허둥지둥 내리다가 지갑도 잃어버렸던, 아침부터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날, 병원에 도착하니 J 언니가 반가운 얼굴로 나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새눈아, 오늘 너 칭찬받아서 조례시간에 수선생님이 사람들 앞에서 네 이야기를 했는데, 찾아보니 네가 없었지 뭐니. 병원이 아픈 사람들 많은 데라 아무래도 칭찬보다는 불만이 더 많이 접수되는데,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된 네가 칭찬을 받아서 다들 놀라워했거든. 칭찬도 드문 일인데 그 당사자가 너라서 아침에 엄청 이슈였어. 잘했다~ 대견해. 새눈이 열심히 하니까 칭찬받을 만 하지. 그 자리에서 박수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지각을 했어. 으이구. 아쉽다. 암튼 옷 갈아 입구 나와~.”


 언니는 아쉬워하는 얼굴도 다정했다. 언니 얘기를 듣다 보니 지갑을 잃어버린 허탈함이 금세 가라앉고 마음이 들떴다.  


‘내가 칭찬을 받았다고? ’


  얘기를 듣자마자 어떤 건지 짐작이 갔다. 며칠 전 진료가 끝났을 무렵 안내데스크를 혼자 지키고 있을 때 받았던 전화였다. 내과 수술을 한 후 첫 정기 검진을 받는 김에 필요한 여러 과의 진료를 하루에 모두 받고 싶은데 과마다 스케줄이 다르고 예약이 마감되기도 해서 여러 날에 나누어 진료를 보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집이 전라도 시골이고 진료 때문에 숙박을 하기도 어려워서 한번 더 부탁하려고 전화를 했다고.


 유명한 교수님의 진료는 몇 달 전에 예약이 마감되기도 해서 나로서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화하신 분의 사정이 딱하기도 해서 해당 과에 한번 더 전화를 걸어보았다. 처음엔 예상대로 안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사정을 설명하고 다른 방법이 없겠냐고 한번 더 부탁을 했더니 그러면 수술한 교수님 진료 스케줄에 맞도록 다른 과 진료 교수님을 변경하는 방법으로 예약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처음 진료를 보았던 교수님에게 계속 진료를 보는 것이 관례였지만 외래 진료를 한번 변경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전화를 받는 간호사가 아이디어를 내었다. 내가 부탁을 하긴 했지만 그 간호사가 같이 방법을 찾아 주고 사정을 봐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고, 막 그렇게까지 어렵고 힘든 일을 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겸연쩍었지만 그래도 칭찬을 받아서 기뻤다.


  한 사람 몫을 해내려고 노력한 결과가 칭찬으로 돌아오니 보람이 있었다. 이 일이 생각보다 나에게 잘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들뜬 마음으로 잠깐 고민도 했다.


 '간호사가 되려면 간호대를 다시 가거나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까.'






  외래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의 유니폼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예쁜 패턴이 들어간 원단으로 만들어진 유니폼이었고, 하나는 내가 입은 것과 같이 단순히 연녹색이 몇 군데 섞인 유니폼이었다. 유니폼에 따라서 서로를 부르는 호칭도 달랐다. 패턴이 들어간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누구누구 선생님이라고 불렸고, 내가 입은 것과 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그렇게 불리지 않았다. 언젠가 J 언니에게 진로에 대한 고민을 숨긴 채로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나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자격의 차이야. 패턴이 들어간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4년제 간호대를 졸업한 사람들이고, 색만 들어간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2년제 간호전문대를 나왔거나 학원을 다녀서 간호조무사 자격증만 취득한 사람들이지.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간호사,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간호조무사로 구분 지어. 나는 전문대를 나왔고 보다시피 간호조무사지.


  병원에는 자격으로 나뉘는 계급이 있어. 계급에 따라서 유니폼, 호칭뿐만이 아니라 급여나 승진기회도 다르단다. 간호조무사는 절대 수간호사가 될 수 없고 올라갈 수 있는 직급이 정해져 있어. 어디까지 승진할 수 는지 잊어버렸는데, 암튼 그래. 4년제를 나온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더 많은 교육을 받은 것에 대한 매리트가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외래에서는 어차피 똑같은 일을 하는데 그런 차이가 무슨 소용인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알고 보면 같은 간호사끼리, 간호조무사끼리 더 친하게 지내는 경향이 있는데 혹시 눈치 못 챘니?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그냥 다들 받아들이는 거지."

 (자세한 내막이 있겠지만 내가 들은 것은 거기 까지였다.)


  패턴이 있는 유니폼을 입은 동갑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와도 이런 얘기를 나눠보았는데 그 친구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다고 했다. 그 친구는 간호사의 또 다른 점을 짚어주었다. 병동 간호사는 정규직인 데다가 월급이 많지만 3교대라서 몸이 힘들고, 또 조그만 실수도 생기면 안 되므로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했다. 외래간호사는 출퇴근이 정해져 있고 병동에 비해서 일이 어렵 않은 것은 좋지만, 그만큼 월급이 적은데다가 계약직이기 때문에 고용이 불안정한 단점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간호사들을 비롯한 자신도, 정규직이지만 출퇴근이 정해져 있고 일이 덜 힘든 검사실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하는데, 좋은 자리는 늘 그렇듯 자리가 잘 나지 않고 경쟁률이 높다고 했다.


  조금 더 들여다보니, 간호사라는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보람과 좋은 근무 분위기의 이면에 해소되지 못한 불만과 걱정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안정적으로만 보였던 그들의 일이 사실 그렇게 안정적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외래에서 간호보조 역할로 근무했기 때문에 일체의 의료행위는 하지 않았으므로 진정한 간호사로서의 일은 하지 않은 셈이다. 실제로 어떤 처치, 예를 들면 주사를 놓는 일 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려워졌다. 그런 주제에 간호사의 일이 나와 맞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하여 판단하다니 너무 건방진 생각이었다.


  '참 보람 있고 좋은 일이지만 역시 내가 하기는 힘들겠어. :( '


 (나중에 알게 사실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계급은 '어디든' 조금씩 그 정도는 다르지만 존재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등록할 돈을 벌고 새로운 경험을 쌓기 위함이었지만 병원생활은 나의 생각에 변화를 일으켰다. 간호사가 되는 것은 어떨까,라는 짧은 고민은 단순히 지나가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꿈과 목표를 다시 검토해 보기로 했다. 생활의 터전으로서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그들의 진지함과 현실성에 감화되어 내가 너무 허황된 꿈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공연을 통해서 행복을 전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을 직접 만나고 교류하며 얻어지는 현실적인 기쁨 진짜가 아닐까. 나는 너무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행복을 좇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실적인 행복은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전해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안정적인 생활을 꾸려 나가는 것이 가능은 할까. 친구의 말처럼 나는 발이 땅(현실)에 닿지 않고 공중에 붕 뜬 채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 일단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자! 글 쓰는 건 일단 생활이 안정된 다음에... 그 다음에 하면 돼.'



  전략을 잠깐 바꾸기로 했다.


'내가 무언가를 창작해서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 닿아 있는 회사의 직원들을 서포트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행복한 지구에 기여하자. 직원들의 행복을 서포트하면 직원들이 만나는 고객들이 행복해질 테고, 고객들이 행복해지면 또 그 사람들과 닿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겠지.'


 약간은 다단계식으로, 내가 한 일들이 사람들 간의 연결고리를 타고 행복이란 이름으로 널리 번져갈 수 있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회사에 취직을 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3개월의 기간을 다 채우고 병원을 그만뒀다. 그즈음 다른 사람이 또 출산 휴가를 가게 되는 바람에 계약 기간을 연장해 줬으면 좋겠다고 수간호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했다.




  

 (계속)

이전 09화 반짝이는 것의 마법에 대하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