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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새눈 Sep 06. 2023

반짝이는 것의 마법에 대하여

고집쟁이 우주인의 파란만장 지구생활 (적응기) 8

  크리스마스 이틀 전 부산 벡스코, 자정이 가까워가는 시각에 나는 불 꺼진 객석 뒷줄에 몰래 숨어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 조명이 어지러이 흔들리며 빛나고 있는 고요한 무대를 바라보았다.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털장갑을 꼈지만 난방이 되지 않는 차가운 공연장 공기가 손끝과 발끝, 코끝으로 파고들었다. 추위와 피곤을 무릅쓰고 그 시간 그곳에 있었던 이유는 조명 메모리 하는 작업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명 메모리란 콘서트에서 음악의 분위기나 리듬에 따라 거의 매초 달라지는 조명의 구성이며 밝기, 색상, 효과 등에 대한 설정을 미리 기계(콘솔)에 저장하는 작업이다. 무대 세팅 후 조명 메모리 작업을 시작하는데 리허설 전까지 마무리해야 하므로 보통 새벽에 그 작업을 한다는 얘기를 서울 공연을 준비하면서 주워 들었다.)


   조명감독님은 헤드셋을 끼고 이따금씩 보일 듯 말 듯 고갯짓을 하거나 상체를 흔들면서 작업하고 계셨다. 그 뒷모습 너머로 조용한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점점이 깜빡이는 불빛, 커튼처럼 드리워진 불빛, 무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불빛, 춤추듯 흔들리는 불빛, 무대의 중앙을 밝히는 외로운 불빛, 나를 응시하는 불빛, 시간을 쪼개듯 격렬히 요동치는 불빛, 겹겹이 쌓인 불빛.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창백한 빛줄기들은 때로는 신비롭고, 때로는 다정했으며, 때로는 공격적이고, 때로는 아름다웠다. 가수도 음악도 관객도 없는 미완성의 무대는 그 자체로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전해지는 메시지를 이해하려 애쓰듯이 집중해서 불빛을 바라보면 어느새 무대의 여백은 사라져 있었다. 빛들이 움직이면서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대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호흡하며 나와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두운 곳에서 빛나거나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건가, 별과 조명의 공통점에 이끌려 여기 앉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해 보았다.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서울 공연에서 느꼈듯이 무대를 위한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별 같았고, 그것이 모여 완성된 공연이 거대한 은하 같았던 나의 감상으로 미루어 봤을 때 나는 어쩌면 내가 ‘별’로 여길만한 또 다른 대상을 찾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너울거리는 빛 너머로 나를 들여다보려 애썼다. 어쨌든 지금 내 앞에 놓인 선택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 밤, 공연을 만드는 일 중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던 나의 마음에 조명이 깜빡이며 수신호를 보내왔다.


 




 잠깐만 보려고 했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무대를 보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결국 예상보다 오래 머물러 버렸다.  조명 메모리 작업이 끝나고 감독님이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나도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플라스틱 의자가 뒤로 밀리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드르륵 끼이익.


 “거기 누구 있어요?”


 '아, 어떡하지. 도망칠까. 괜히 일이 커지려나. 아니지, 잘 못 한 건 아닌데 뭐. 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하시면 어떡하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감독님이 점점 다가왔고 나는 털장갑을 낀 오른손을 엉거주춤 들어 올리며 정체를 밝혔다.


 “저.. 신새눈입니다.”


 “아니, 새눈씨!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왜 여기 있어요? 일이 남았어요?”


 다른 작업을 하느라 남아있었던 무대감독님도 소리를 듣고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아.. 그게.. 조명 메모리 작업 하시는 걸 보고 싶어서요. 어떻게 하시는 건가 궁금해서. 하하. 무대감독님도 계셨네요.”


 “아, 난 또 깜짝 놀랐네.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요. 암튼 늦었으니 숙소로 같이 가요. 갑시다.”


 “네.”


 “근데 이걸 왜 보고 싶었지?”

감독님은 정말로 의아한 표정으로 혼잣말인 듯 질문인 듯 말을 던졌다.


 “아, 음.. 콘서트 준비하면서 조명에 관심이 생겨서요….”


 “오, 그래요? 조명이 좀 멋있긴 하지. 허허허.”


 “감독님, 좋으시겠습니다. 하하하.”

무대감독님이 잘생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게 멋있지만은 않은데. 허허. 암튼 생각 있으면 콘서트 끝나고 얘기 한번 나눠봅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열린 신승훈 콘서트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 횟집에서는 그 열기가 새벽까지 식지 않고 흘러넘쳤다.




   신승훈 콘서트를 마치고 조명감독님께 연락을 드렸다. 감독님은 마침 일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같이 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정말로 관심이 있다면 자신 밑에서 한번 배워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일단은 자신이 오래 몸담고 있었던 회사이면서 지금도 함께 작업하는 회사의 크루들과 같이 일하면서 기본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바닥부터 잘 다져놔야 나중에 디자인도 잘할 수 있다고. 참고로 자신은 바닥을 다지는 기간이 매우 길었으며, 일하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친 적도 있지만 놓지 않고 버틴 덕에 지금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자신과 일을 하게 된다면 그 기간이 많이 줄어들 테지만 일단 일을 배우는 것이므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보수를 지급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그건 내가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돈을 못 받는 것이 썩 괜찮진 않았지만, 금방 배워서 한 사람 몫을 해내면 되니까 괜찮았다.   



   새해가 밝고도 3주나 지난 1월 22일 저녁 8시가 조금 안된 시각, 밤이 내려앉은 올림픽 체조경기장 앞에서 조명 감독님을 만났다. 감독님은 이번에 빅뱅 콘서트를 준비하게 되었으며, 곧 다른 크루들이 도착할 텐데 그전에 당부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내가 회사 소속이 아니라 조명감독 직속으로 일하는 특별한 위치이기 때문에 내가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서는 일하는 동안 자신이 나를 특별하게 대하거나 챙겨주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아마 실제로는 바빠서 신경 쓸 여력도 없을 테지만 그들과 친해져야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테니 알아서 잘해보라고 했다. 금방 커다란 탑차가 도착했고 뒤이어 온 봉고차에서 크루들이 내렸다. 감독님은 나와 예닐곱 명 정도의 크루들을 인사시키고 나서 금방 자리를 떠났다. 낮에도 최고기온이 영하에 머무르는 추운 날씨였으므로 난방이 되지 않는 저녁의 공연장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그날은 탑차에서 장비들을 빼내 공연장에 넣어두는 작업을 한다고 했다. 일은 탑차에서 바퀴 달린 알루미늄 박스들을 내리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커다란 탑차였고, 그 안에 크고 작은 박스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겉으로만 봐서는 이게 다 뭐 하는 장비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목장갑을 나누어 끼고, 장비를 이용해 박스를 내리는 사람과, 내려진 박스를 옮기는 사람, 옮겨진 것을 정리하는 사람으로 역할이 나뉘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눈치껏 여기저기 일을 돕다가 결국 내려진 박스를 받아서 옮기는 역할을 맡았다. 바퀴가 달려 있었지만 꽤 크고 무거운 박스들을 요리조리 방향을 바꿔가며 밀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박스들은 무대 뒤편에 있는 출입구 근처에 모아두었다. 여러 명이었는데도 내려서 옮겨 놓는 데에 몇 시간이 걸렸다.



    다음 날 아침 7시. 이른 시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무대를 제작할 때는 무대의 골격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골격에 설치되어야 하는 조명들이 있기 때문에 무대 제작작업의 초반부터 조명팀이 투입되었다. 대관료가 하루 단위로 지불되기 때문에 보통 아침 일찍부터 가능한 늦게까지 작업을 한다고 했다.


   이 날은 박스에서 조명들을 꺼내서 날랐다. 크루들은 구역을 나누어 조명 배치가 기록된 도면에 따라 조명을 설치했다. 조명의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한 색필터를 끼우고 전선을 연결했다. 나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지만 시키는 일을 하고, 일손이 부족해 보이는 곳을 살펴 일을 거들었다. 조명은 파라이트 같이 작은 것부터, 스트립라이트, led 빔라이트에 이어 무빙라이트, 핀라이트처럼 크고 무거운 것들까지 다양했다. 무거운 것은 남자도 낑낑거리며 들거나 혼자서는 들지 못 할 정도였다. 전선도 날랐는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선이 아니라 두께가 얇게는 2센티에서 두꺼운 것은 5센티 이상 되는 두껍고 길고 무거운, 밧줄 같은 것들이었다. 둥글게 말려진 전선들을 양 어깨에 하나씩 걸거나 등에 짊어진 자세로 옮겼다. 전선을 들어 올려 몸에 짊어질 때마다 '어휴' 소리가 절로 나왔다. 공연장 외부에 연결된 발전차량으로부터 공급된 전기는 전선을 타고 조명 콘솔로 이어졌다. 전선은 무대 근처에서부터 3~4층 객석 뒤쪽까지 연결되었다. 장비나 전선을 나르다 보면 힘이 들기도 했지만 체온이 올라 추위를 덜 느끼기도 했고 힘을 쓰고 난 다음 근육에 남는 긴장감도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마른 체형인 것 치고는 힘이 센 편이어서 사람들의 호감을 약간 사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배운 것은 전선을 정리하는 방법이었다. 그때 배운 선 정리법은 지금도 집에서 잘 써먹고 있다. 그 방법은 전선을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놓는 것이 아니라 둥글게 말되 숫자 8을 그리듯이 마는 방향을 바꿔가며 마는 것이다. 그렇게 말아 놓은 전선은 낚싯줄 던지듯이 끝을 던지면 꼬이지 않고 한 번에 훌훌 풀렸다.(하지만 난 잘 되지 않긴 했다;) 조명 기구들은 종류가 다양했고, 저마다 연결도구나 연결 방법(직렬이나 병렬)도 달랐다. 그런 것들 어깨너머로 조금씩 얻어 배웠다.



  같이 일했던 크루들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고, 나를 잘 챙겨주었다. 대체로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그중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조명 디자이너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일하러 왔다던 삼십 대 언니도 있었다. 콘서트 조명크루로 일하면 일이 규칙적이지 않고 근무시간도 일정하지가 않아서 기혼에 자녀가 있는 여성이 일하기는 쉽지 않은데 ,언니의 경우에는 아이를 좀 키워놓았으며 모님과 남편이 많이 배려를 해준다고 했던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모든 크루들은 단계를 밟아 조명감독님 같은 조명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언젠가 콘솔 앞에서 일하기를 꿈꾸면서 조명을 나르고 설치하는 노동을 감내하는데, 조명 디자이너의 수요가 많지 않고 조명 회사 내에서 그 자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연차 순으로 순서를 기다려야 하므로, 연차가 낮으면 컴퓨터나 콘솔을 만지는 일을 배울 기회도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조명 감독님이 나에게 해주었던 말의 의미를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새벽까지 이어진 이틀 간의 리허설을 마치고 3일 동안 진행된 콘서트는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막을 내렸다. 곧바로 철수 작업이 시작되었다. 무대를 제작할 때는 무대의 골격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하지만, 철거할 때는 나중에 설치된 것 순으로 해체한다. 그래서 조명팀은 공연장에 가장 먼저 들어와서 가장 나중에 떠난다고 했다. 크루들과 나는 일단 전선들을 분리해서 정리하고 무대 바닥에 설치된 조명들을 해체한 다음 다른 팀들의 진행상황을 체크해 가면서 2~3시간 정도 대기해야 했다.


 크루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박스를 한두 개씩 주워 들고 빈 대기실을 찾아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출연자들이 먹고 버린 도시락 포장지며 빈병, 비닐 포장지 등 다 정리되지 못한 쓰레기들이 굴러다녔다. 크루들은 그것들을 한쪽으로 밀어 대충 정리한 다음 아주 자연스럽게 박스를 바닥에 깔고 몸을 뉘었다. 그중 반장 같은 크루가 피곤할 테니 눈을 좀 붙여두는 게 나중을 위해 좋을 거라고 일러주며 나에게도 친절하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노숙자 같아 보여도 신문지를 덮고 있으면 좀 더 따뜻하게 있을 수 있다고 웃으면서 팁을 알려주기도 했다.


  나는 사실 오티나 엠티를 가서도 누워서 자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서 잠깐씩 졸듯이 눈을 붙이는 편이었다.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예민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가 침을 흘리며 자는 모습이나 방심한 상태로 잠이 든 모습 같은 것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날은 박스를 깔고 바닥에서 잠깐이라도 잠을 자는 것이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잠을 자야 하는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어둠 속에서 지저분한 옷차림에 꼬질꼬질한 얼굴(나도 마찬가지였다.)로 박스를 깔고 잠을 자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잠시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눕지도 자지도 못할 터였다. 다른 팀들이 해체작업을 하는 것을 구경하며 밤을 새웠다. 몇 시간이 지나서 조명팀의 작업이 시작되었고 작업은 날이 밝아지고 점심이 다 되어가서야 끝이 났다. 우리는 해장국을 먹고 헤어졌다.






 그 후로 두 달간 일이 없었다. 고시원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라면과 계란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고시원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믹스커피를 간식으로 타 마시는 생활을 했다. 아빠가 보내주는 돈으로 고시원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 와중에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하는 작업들이 많으니 성능이 괜찮은 노트북이 있어야 한다는 감독님의 말에 염치없지만 엄마에게 부탁을 해서 최신형 노트북도 마련했다. 감독님이 신승훈 콘서트 때의 무대 도면을 보고 3d 디자인 프로그램인 스케치업으로 무대를 재현해 보라는 과제를 내주어서 1~2주 정도는 그것에만 매달려 작업을 했다. 그 외에는 새로 산 노트북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빈둥거리거나 조명 기사 자격증 책을 사서 공부를 했다.


  이후로 3월 말에 원더걸스 콘서트, 4월 중순에 신승훈 콘서트에서 조명 크루 일을 두 차례 더 했다. 원더걸스 콘서트에서는 핀조명을 지지대에 다가 그 사이에 왼손 검지의 첫번째 마디가 끼이는 사고를 당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악소리도 내지 못했다. 당시에는  피가 별로 나지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한동안 다친 부분에 감각이 없고 만지면 쥐가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신경 쪽은 예후를 장담할 수 없어 감각이 돌아오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신승훈 콘서트 때에는 콘서트와 날짜가 겹쳐 사촌언니의 결혼식에도 가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 신승훈을 좋아했던 언니를 위해 신승훈 님에게 사인을 받아두었는데, 결국 언니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이사를 다니면서 잃어버렸다.


   언제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 규칙적인 아르바이트를 하기 애매했고, 그나마 하는 크루 일도 보수를 받을 수 없어서 경제적으로 힘이 들었다. 어렵게 택했던 전공도 살리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한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그래도 믿어볼 테니 하고 싶은 것을 해보라고 해주신 부모님께 생활비를 타서 쓰는 신세가 스스로도 한심했다. 또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 손가락도 무서웠고 일정하지 않은 업무 스케줄도 불안했다. 이런 일이라면 나중에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계속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세 번의 콘서트를 거쳤는데도 내가 한 사람 분의 몫을 언제쯤 하게 될 것 같은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감독님은 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시시콜콜 얘기해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나도 먼저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막연하고 기약 없는 생활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희망찬 미래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고, 이렇게 그림자처럼 살다가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공연 분야에서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은 뭐가 있을까, 나에겐 어떤 일이 맞을까, 뭘 잘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글 쓰는 일이 떠올랐다. 살면서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 사실은 제일 하고 싶었지만 자신감이 없어서 못했던 일. 아직은 부족하지만 전문기관에서 더 배워보면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롯데월드 무대 공연을 보면서 속으로 했던 다짐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언젠가 행복한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래! 아카데미에 등록해서 작가 수업을 듣자.'






   나는 감독님께 장문의 편지를 써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리고, 그 길로 조명 기사 자격증 책을 내다 버렸다. 그리고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한 아르바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돈 버는 일뿐만 아니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기 때문에 단순히 돈을 많이 주는 곳보다는 무언가 배울 수 있는 자리를 탐색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공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더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행복에는 두 가지 종류 즉, 즐거움으로서의 행복과, 힘듬이나 아픔을 극복하는 것에서 오는 행복이 있는데, 지금껏 행복과 기쁨이 있는 곳(극장, 놀이공원, 콘서트장)에 있어봤으니 이제는 치유로서의 행복을 배울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그 조건에 적합한 장소가 병원이었다. 그래서 여러 병원에 부지런히 이력서를 넣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간호조무사 자격도 없는 내가 병원에 합격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서야 알았다.


  결국 두 군데 면접을 보고 한 군데 합격을 했다. 중앙대학교병원 내과외래 간호보조 업무. 출산휴가 대체 3개월 계약직. 딱 좋았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병원으로의 출근을 준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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