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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새눈 Oct 20. 2023

송충이의 꿈



  솔잎을 만난 송충이는 무럭무럭 성장했다. 일을 하면서 파트타임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연구 결과를 국내 및 국외 학회에서 발표하면서 견문도 넓혔다. 연구직의 수평적인 업무분위기가 나와 잘 맞았고, 연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결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박사님들은 대체로 인격적으로도 성숙하고 학식도 깊어서 곁에 있으면 배울 점이 많았다.


  연구원으로 지냈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는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어학 자격증을 따고, 논문을 쓰는 등의 목표는 내가 꾸준히 노력만 하면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의 목표였고, 다음 단계로 나를 데려다줄 것임이 확실한 과정들이었다. 목표들을 달성한 후에 나는 늘 어느 정도 성장해 있었으므로, 성취감은 달콤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곳’에 취업을 하고 나니 목표가 없어졌고,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도 사라졌다. 목표가 없어진 회사생활은 점점 매일이 반복되는 날들일 뿐이었다. 나는 정체되기 시작했다. 혼자 정체되는 것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과 같았다. 특히 그 회사에는 일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반면 항상 나의 부족함을 직시하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세상에서 최고일 순 없지만, 대체로 훌륭한 사람들 사이에서 별 것 아닌 능력을 지닌 보통의 존재로 지내는 와중에 정체되어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비참했다. 세상사람 모두가 대통령일 수 없듯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야만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이치를 이해했지만, 조금은 기가 죽었다. 남들과 비교를 잘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내 기준에서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지시를 받고 굴러가는 회사의 작은 톱니바퀴일 뿐이었다. 나는 더 큰 세상으로 나왔지만, 그만큼 초라해졌다. 스스로를 향한 그런 생각이 마음 한 구석을 쿡쿡 찔렀지만 그저 내 못난 열등감 때문이라고 곧 지나갈 슬럼프일 거라고 여기며 쳇바퀴 굴리는 일상을 살아냈다. 



   내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곳’이라고 회사를 표현한 이유는 그곳이 정해진 기간 동안만 정부에서 예산을 받아 운영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회사는 해체될 예정이었다. 그래도 1단계 사업 결과를 개선하고 개발하는 다음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가능성이 100 % 는 아니었지만 다들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즈음이 내가 연구원으로 일한 지 8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회사의 사업이 종료된 직후 결혼을 했고, 다음 사업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다시 백수생활이 시작되었다.


  






  쳇바퀴를 벗어난 생활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면 뭔가 숨통이 트이고 안개에 가려진 것 같던 앞날에 대한 고민도 걷힐 것이라 여겼지만, 명쾌한 답은 어느 날 마법처럼 나타나거나 아르키메데스의 영감처럼 한순간 갑자기 떠오를 리 없었다. 비자발적 퇴사를 한 된 셈이었으므로 실업급여를 몇 달간 받으며 지내게 되었기 때문에 돈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게으르고 단순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 시간들은 마치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현실과 세상 사람들의 일은 수면 바깥의 일처럼 내게서 멀고 까마득하여 피부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되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나는 잔잔한 물결에 흔들리는 해초의 몸짓을 해가지고 가끔 집 안 이곳저곳을 천천히 걸어 다니거나 집안일을 했다. 그 외에는 대체로 나긋나긋한 몸을 해가지고 소파에 누워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생활은 영화 '가려진 시간' 에서처럼 정지되어 있는 시간 속에 나만 고립되어 있는 상태와 유사했다. 나 외의 모든 것은 정지해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가 멈추자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아침이 되면 낮이 찾아왔고, 낮이구나 싶으면 금방 어두워져 밤이 되었으며, 겨울은 봄이 되고, 봄은 여름이 되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우주탐사를 나가듯이 비장한 마음으로 옷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외출을 했는데(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럴 때마다 바깥세상은 매번 깜짝 놀랄 만큼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 에서처럼 집 안에서의 중력이 워낙 강해서 집안 에서의 1시간이 바깥세상의 24시간쯤 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외출을 하고 오는 날이면 정말로 다른 행성으로 우주탐사를 다녀온 것 같은 커다란 피로가 덮쳐와 깊은 잠에 빠졌다.


  주변의 것들은 점차 색을 잃어갔고, 나조차도 점점 더 하얗게 색이 바래져 갔다. 무언가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가도 그런 욕망은 금세 사그라들었고, 무언가 간절히 원하는가 싶다가도 그런 관심이나 흥미도 금세 사라졌다. 무언가 남기고 무언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은 죄책감이 되어 내 발목을 붙들고 나를 더욱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더욱 무력해지고 더더욱 무기력 해졌다. 모든 것이 새롭지가 않아서 금방 싫증이 나고, 지루하고, 시시하게 느껴졌으며,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했다. 의미를 잃은 하루하루는 쓰이지 못하고 페이지만 넘겨버린 빈 책과 같았는데  쌓여가는 페이지는 점점 더 짙은 공허가 되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들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잉여스러운 시간들을 견뎌냈다.






  11개월 후, 다시 사업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사업, 새로운 회사였기 때문에 다시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치렀다. 다행히 합격을 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옷을 갖춰 입고 화장을 하고 출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생산적인 일을 하니 집에 있는 것보다 사람 구실을 하는 것 같아서 보람차고 신이 났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쳇바퀴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찾아온 권태와 회의는 전보다 더 강력했다. 


  거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달라진 나의 위치도 한몫을 했다. 예전 회사에서는 내가 가장 연차가 적은 직원에 속했는데 새로운 회사에서는 이제 막 석사를 졸업하고 입사한 석사급 연구원들이 있어서 내가 중간 연차의 직원이 된 것이다. 그들은 생기가 넘쳤고, 의욕이 왕성했으며, 무엇이든 빨리 배웠다. 그들을 보며 그 나이였을 때의 나를 떠올렸다. 그 나이였을 때의 나는 그들처럼 무엇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거리낌 없이 했고 자주 웃었으며, 지금보다 훨씬 더 일을 열심히 했었다. 나는 그들보다 경력이 있으므로 당장은 업무적인 면에서 그들보다 낫긴 했지만, 그들이 내 나이쯤 되면, 아니 몇 년 만 지나도 분명 나와 비슷한 실력의 연구원이 되어있을 것이었다. 그 예감이 이미 뒤처졌다고 느끼는 나를 더욱 압박했다. 내 직업적 능력, 직업적 수명이 거의 다했음을 직감했다. 몇 년 후면 능력 없이 월급만 많이 받는 퇴물취급을 받을 것만 같아 겁이 났다. 나는 지쳐 있었다. 


  몇 달 만에 그만뒀던 다른 일들과 달리 8년 이상 해왔던 이 일은 분명 나와 잘 맞았다. 하지만 한계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동기부여가 되지 않자 주어진 연구주제에 대해 호기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일을 하기보다 맡겨진 일을 그저 꾸역꾸역 해내는데 그쳤다. 전보다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느려지고, 안 하던 실수도 하게 되고, 타성에 젖어 하던 것만 하려고 하고, 딴짓을 하는 시간도 늘었다. 


  그럴 때면 연구직의 한계에 대해 생각했다. 이 직장, 직업의 끝에 대해 생각했다. 


  ‘새로 시작한 사업도 몇 년 후 기간이 끝나면 다시 해체될 텐데, 여기에서 경력을 이어간다고 한다면 그때의 나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기상청도 대전으로 이전했고, 서울에는 작은 규모의 회사들 밖에 남지 않았는데, 마흔 쯤 되면…. 나 정도의 실력이나 경력으로는 취업이 힘들지 않을까. 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처우가 안 좋은 곳에 취업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곳에서 경력을 더 쌓는 것이 매리트가 있을까. 아니면 몇 살이라도 어릴 때 좀 더 오래 일 할 수 있는 곳으로 회사를 옮겨야 할까.’


이런 염려를 하다 보면 두려워졌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은 탓인지, 자신감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마흔이 가까워지는 나이를 자각하면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마흔에는, 40대에는 안정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회사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면 향후 몇 년 간 지금과 꼭 같은 일상을 살아내야 할 것이 자명했다. 예측가능한 미래, 특히 지금의 연장일 뿐인 뻔한 미래를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사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회사’에서 처음부터 자신감을 잃고 비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아직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시절에 나름대로 성과를 내고 싶어서 추가업무를 하며 논문의 초안을 작성한 적이 있었다. 팀장님께 초안을 보냈으나 바쁜 업무 탓인지 피드백이 없었다. 두어 번 다시 얘기를 드렸는데도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내가 박사급 연구원의 지도가 없으면 논문 한편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석사급 연구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의욕을 잃었다. 개발 과정의 성과물에 대한 논문이었으므로 개발 단계가 진행되면서 시기를 놓친 논문은 쓸모가 없어졌다. 더 열심히 악착같이 했다면 가능하지 않았겠냐고 묻는다면 ‘열심히’ 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실력과 내공’이 필요한 문제였다고 답할 수 있겠다. 신입사원이 보고서의 일부를 작성할 수는 있어도 보고서 전체를 작성하고 검수하는 일은 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꼭 그 지점에서 답답했고, 답이 없었다. 개인의 역량차이가 변수로 작용하긴 하지만 연구원의 직급 사이에는 학위의 벽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일반 회사에서는 경력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대리가 과장의 업무를 할 수 있게 되고 과장이 차장의 업무를 할 수 있게 되는데, 연구직은 그렇지 않았다. 석사급 연구원이 경력을 쌓으면 박사급 연구원의 월급을 따라갈 수는 있어도 현실적으로 그만큼의 능력치를 갖진 못한다. 처음엔 회사에서 연구를 하는 것이 실무이므로 같은 기간 동안 학교에서 학위를 하며 배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그게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물론 본인의 꾸준한 노력이 언젠가 빛을 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운이 따라줘야 가능한 일이다. 해당 분야에 정통한 데다가 나를 끌어주고 성장시키려는 의지가 강한 상사를 만나는 운과 한 분야를 오래 연구할 수 있는 운. 나는 일하면서 거기에 해당하는 분을 딱 한 번 보았다. 



  석사급 연구원은 박사급 연구원이 큰 틀을 짜 놓으면 그 안에서 지시와 피드백을 받으며 일을 한다. 특히 내가 하던 업무는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들기 어려운 주제였기 때문에 여러 주제에 대해 얕게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반복적인 작업이 많았다. 내가 했던 일이 회사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 일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물론 석사급 연구원도 꼭 필요하다. 모든 연구원이 박사급 연구원만큼의 아웃풋을 낼 필요는 없고, 아까도 언급했던 세상의 이치처럼 모두가 팀장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석사급 연구원으로만 계속 일을 한다면 전문가가 되기보다는 기술자가 된다. 나는 기술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 점은 명확했다.


  업무에서 성취감을 얻지 못하자 그로 인한 무기력과 권태는 나를 침식시켰다. 그저 돈만 버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외부의 상황으로 인해 나의 욕망이 충족되지 못해서 비롯된 불만은 여행사에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비난의 화살을 내게로 돌리고 나의 영혼 깊은 곳을 흔들었다. 꽤 오래 지속되어 온 권태는 내 생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내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스스로 생명력을 잃었다고 여겼으며 생명력이 가득한 봄을 부러워했다. 화사하게 피어난 벚꽃 나무를 보며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나의 계절은 어디쯤인지 고뇌했다. 나를 알아가며 내린 선택들로 이루어진 지금이고, 지금이 터무니없거나 형편없진 않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무의미하게 소모되고 있을 뿐이라고 느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린 경사와는 별개로 나 자신을 찾는 문제가 지금의 내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여겼다.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사실 백수로 지내는 동안 우연히 닐 디그래스 타이슨의 ‘블랙홀 옆에서’라는 책을 읽고 다시 천문학에 매료되었다. 꺼졌던 마음의 불씨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우주라면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연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구를 하는 것이 결국 프로그래밍 언어와 관측자료 등을 사용해서 계산하고 분석하는 일이니 이론 공부만 새로 한다면 천문학 연구도 가능할 것 같았다. 천문학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줄 알았는데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니 가능성이 보였다. 꿈, 이 단어가 나를 설레게 했다. 거의 10년도 더 전에 현실의 벽에 부딪혀 포기했던 꿈이지만 지금이라면 다시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길이야 말로 ‘나답게’ 나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물꼬를 트기 시작한 생각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상상 속에서 나는 이미 천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 닐 디그래스 타이슨: 미국의 천체물리학자이자, 대중 과학 운동가, 작가. 미국의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의 후계자로서,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의 2014년판의 호스트를 맡은 것으로 유명하며, 미국의 뉴욕에 위치한 헤이든 플라네타륨의 관리자로 있으며, 행성협회의 회원이다. (출처: 위키백과)


  천문학 박사학위를 향한 희망을 조심스럽게 마음속에 품었다. 그러나 대충만 생각해 봐도 문제가 되는 것이 여러 가지였다. 먼저 비싼 대학원의 학비가 문제였고, 학위를 마치고 난 후에 마흔 중반일 내 나이도 염려스러웠으며, 아직 결정한 건 아니지만 출산과 육아문제도 고려해야 했고, 학위 이후의 진로도 고민해야 했으며, 노후대비도 다시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었다. 


  일을 하면서 파트타임으로 박사학위를 하는 것이 경제적인 문제를 생각하면 가장 이상적이었지만 박사학위는 파트타임 학생을 잘 뽑지도 않을뿐더러, 장학금 없이 학비를 전액 부담해야 하므로 수료기간 동안에는 전혀 저축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풀타임으로 학위를 하게 된다면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을 지고 수입 없이 지출만 있게 되는 생활을 해야 하므로 결혼을 한 지금의 입장에서 남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셈이 되었다. 아직 30년은 갚아야 할 주택담보대출도 있고, 고정적으로 나가는 생활비도 있는데 남편의 월급만으로 그것들을 모두 충당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어쨌든 학위를 하게 된다면 경제적으로 힘들 것을 각오해야 하고, 출산과 육아도 엄두를 못 낼 것이었다. 어떻게든 하려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남편의 배려와 희생이 필수적이었다. 남편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얘기도 못 꺼내고 혼자서 앓으며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와는 달리 현실적인 남편에게 무턱대고 얘기를 꺼내면 남편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웃을지도 몰랐다. 학교는 어떤 곳이 있는지, 학비는 얼마인지, 장학금은 어떤 것이 있는지, 만약에 정말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면 현실적으로 드는 비용은 어느 정도 될지 등을 조사해서 문서로 정리했다. 조사하다 보니 일하는 형태로 공부할 수 있고, 학비도 지원받을 수 있는 학교가 한 군데 있었다. 나는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로 그곳을 골랐다. 내가 열심히 하기만 하면 학교가 어디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가면 당장은 지금의 회사보다 돈을 적게 벌겠지만 어쨌든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할 수 있고, 지금 회사도 몇 년 후면 없어질 테니 이후의 진로를 고려해 봤을 때 박사학위를 하는 것이 나쁜 선택지는 아니며, 오랜 기간 품었다가 결국 포기했던 꿈을 다시 이룰 수 있는 기회인 데다가, 박사학위를 따고 나면 더 좋은(연봉이 높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남편을 설득했다. 결국 남편은 나에게 투자를 하는 셈 치고 나를 지지해 주기로 했다. 남편이 고마웠다. :)


 




  탈락의 고배를 한 번 마시고 두 번째에 대학원 합격을 했다. 그 사이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남편 회사 근처인 경기도 모처로 이사를 했다. 우리 부부는 본격적으로 미래에 대비했고, 예상대로 흘러갈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학교가 다른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입학을 했고, 한참 어린 학생들과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시험을 치르며 학교생활을 했다. 몇 년 만에 활력을 되찾았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지금으로 이르기 위한 과정들이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납득되었다. 


  그러나 한 학기가 지나고 나는 자퇴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대학원은 입학할 때 세부전공과 지도교수를 선택하는데, 입학을 하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세부전공을 잘 못 선택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뒤늦게 세부전공을 변경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학교는 학생에게 관대하지 않았고 의외로 보수적이었다. 또한 대학원의 도제제도는 생각보다 이해관계가 복잡했다. 경제적인 부분만 고려해서 선택했기 때문인지 학교 시스템도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부분들이 있었다. 사실 학교를 실제로 다녀보기 전에는 학교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 간극이 더 컸던 것 같다. 현실은 냉혹했다. 천문학 외길만 걸어온 사람들이 보는 나는, 나이가 많고 여러 경력이 있어서 못 미더운 데다가 학자로서 수명이 짧을 게 뻔한, 가치가 낮은 학생이었을지도 모르겠고, 늦은 나이에 멋 모르고 도전했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진 세상물정 모르는 만학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하는 공부를 하면서 만들어갈 나의 가치가 일을 해서 벌 수 있을 돈보다 훨씬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며, 이 길이 ‘내가 원하는 나‘ 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던 내가 불과 한 학기 만에 자퇴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받아들이게 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백수가 되었다. 막다른 길에 내몰린 나는 마음을 추스르는데 몇 달이 걸렸다. 이전의 직장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10년 가까이 해왔던 일이지만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대책이 없었지만 너무 집에만 있으면 무기력해지니 일단 규칙적으로 바깥활동을 하고 돈도 벌면서 고민을 해보라는 남편의 제안에 집 근처 공공기관의 기간제 근로자로 취업을 했다. 그러나 단순 반복업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마흔이 코 앞에 다가온 지금 나는 또 백수가 되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대책이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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