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새눈 Oct 21. 2023

나에겐 아직 한 개의 꿈이 남아 있소



  이제야 나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의외로 길이 끊어진 곳에서야 말로 제대로 나를 마주할 수 있게 되나 보다. 미우나 고우나 나는 나다. 과거에 대한 글들을 쓰면서 밉기도 하고 곱기도 한, 내 마음을 아직도 쿡쿡 찌르는 무엇을 발견했다. 더 이상 다른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으므로,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숨겨둔 꿈’을 꺼내 볼 마음을 먹었다.


  그 꿈은 나에게 늘 사치였기 때문에, 그 꿈에 대해 생각할 때면 죄책감과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서 몇몇 순간에 현실을 핑계 삼아 그 꿈을 꿈으로만 남겨두는 선택을 했다. 그것이 최선이었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들이 나를 제대로 된 사회인으로 길러주었으며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데려가 주었지만, 내내 미련으로 남아 있던 것도 사실이다.


  몇몇 순간이란 작가 아카데미 대신 취업을 선택했을 때와 천문학 박사과정을 시작했을 때다. 경제적인 부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궁핍하지 않길 바랐고, 갚아야 할 빚도 있었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덜 하기 싫은 일을 택했다.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그 선택들이 도피이기도 했다는 것을.


  사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꿈과 현실적인 무언가를 맞바꿔야만 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아니라, 꿈에 턱없이 모자랄지도 모를 나의 깜냥을 알게 될 가능성이었다. 나는 확실한 좌절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 꿈 마저 없어지고 나면 나에게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천문학에 다시 매료되었던 그 해의 운명적인 만남은 ‘닐 디그래스 타이슨’ 뿐만이 아니었다. 그 해에 나는 ‘헤르만 헤세’도 만났다. 부끄럽지만 서른이 한참 넘은 나이에 헤르만 헤세의 책을 처음 읽었고, 진실로 감명을 받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때 나의 운명적 상대는 ‘헤르만 헤세’ 쪽이었던 것 같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무슨 일이든 의미가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 시절 헤르만 헤세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의 아름다운 소설을 읽으며 무료한 시간들이 잠시나마 빛났다. 특히 소설 ‘싯다르타'는 잉여스럽게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스스로 답답해하고 괴로워하는 날들을 견뎌내고 있는 나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너는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거라고, 이런 절망스러운 시간들이 앞으로 맞이하게 될 필연적인 어떤 체험, 깨달음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건네며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어떤 죄악(지금의 내 상태에서는 게으름, 무력함, 무쓸모함 등)을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말이 내 마음을 누르던 무게를 덜어내주었다.



  사실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하려고 이렇게 많은 글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쓰면서 돈도 벌고 싶다..)






  얼마 전 용하다는 **선녀에게 전화로 신점을 보았다.(심경의 변화 때문에 샤머니즘으로 빠져든 건 아니고 2년 4개월 전에 호기심에 예약을 했는데 코로나로 상담이 지연되면서 지금이 되었다.;) 그녀는 직업과 관련하여 내가 그동안 해왔던 일이나 그 분야와 관련된 것들을 가르치는 일 이외에는 나에게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실망했다. 용하다고 했는데 직접 가서 만나야 더 용한 결과가 나오는 건지, 아니면 일부 리뷰들에서와 같이 그렇게 용하지는 않은 건지 잘 모르는 채로 상담이 끝났다. 나는 무당도 보지 못한 나의 길을 잘 만들어갈 수 있을까, 잠시 의기소침했지만 금세 떨쳐버렸다.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이 나를 든든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생각이 머릿속에서 나와 글자의 형태로 글이 되어 어딘가에 존재하게 되면, 정말로 어떤 '존재'가 된다. 여기에 쓴 글들은 나의 과거이자 나의 현재이고, 나의 기록이자 나 자신이기도 하며, 나를 이끄는 도전이자 지원해 주는 지원군이고, 그리고 위안이기도 하다. 글이 존재가 되어 함께 있을 때 나는 행복하다. 돌이켜보면 인생 대부분의 순간에 글이 있었고, 글이 존재했기 때문에 나를 기억하고 찾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나는 요즘 주름살도, 잡티도, 잔병치레도, 그리고 웃음도 늘었다. 오랜만에 평온한 시간들을 맞았다. 이 나의 에너지와 시간을 내가 정말로 원하는 데에 사용하고자 한다. 더 이상 나를 소모하지 않고 나를 위해 나를 알뜰히 쓸 생각이다. 지금의 실패는 온전히 나의 행복을 위해 살도록 내게 주어진 기회다!






  살다가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면 문득문득 질문을 맞닥뜨리게 되곤 했다. 


'나는 한 때 무슨 꿈을 품었나, 나는 한 때 무엇이 되고 싶었나, 나는 꿈꿨던 대로 살고 있나, 나는 자라서 결국 무엇이 되었나,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한가.'


  현실이 답답하고 불만족스러울 때, 삶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없어졌을 때, 일상에 지쳐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내면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곤 했다. 그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귀를 기울였으나 그때뿐이었다. 질문은 가끔 옅은 회한을 안겨줬지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한가하게 목소리를 듣고 앉아있을 여유가 없었다.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쉬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고 같은 사건을 맞이하고 길을 잃은 후에야 걸음을 멈추고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책과 회의감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나였고, 나를 긍정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경종과 같은 것이었다. 목소리는 나에게 맑은 거울이 되어주었다. 그 거울을 들여다보니 내가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그래서, 별소녀는 자라서 무엇이 되었나.

글이 끝나는 지점에서 이 질문의 답은, 보는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경우에 네 가지 보기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A) 자랐다.

  1. 아직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백수다.)

  2. 여러 역할들을 해내며 주어진 인생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대견한 어른이 되었다.


B) 자라지 않았다.

  3. 아직도 꿈 많은 (별)소녀다.


C) 자라는 중이다.

  4. 작가지망생이 되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답은?



(끝)

이전 15화 변화의 물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