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적 꿈이었던 천문학을 포기하는 대신 행복한 지구를 꿈꿨다. 그리고 오랫동안 행복한 지구에 일조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고 싶었고, 다음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 다음은 잘하는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했다. 어느정도는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원의 길로 들어서 9년 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점점 허무해졌다. 더이상 무언가 하고 싶지도, 무언가 성취하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세상에 대체 도움이 되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내가 맡은 연구 주제들에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고, 분석결과가 어떻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 일을 통해서 더 이상 나를 찾거나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하니 퇴보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때 커다란 결심을 하고 오래된 꿈을 꺼내 다시 펼쳐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마흔이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내가 어떤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까. 경력을 다 버린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마흔 언저리의 아줌마일 뿐인데. 이력서를 가득 채워서 써 봤자 관련분야가 아니라면 채용 담당자에게 나의 이력들은 그저 잉크 낭비(공간 낭비)일 뿐일테지.’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취업사이트에 접속했다. 경력이 필요 없고 나이제한도 크게 없는 일들 중에 근무환경이 괜찮고 전망이 좋고 월급도 괜찮은 일들은 당연히 없었다. 할 만 하고 월급이 괜찮다 싶으면 명시적 나이제한은 없지만 암시적 나이제한이 있어 보였고, 돈을 많이 준다 싶으면 사기를 당하지는 않을지 의심해야 했으며, 크게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퇴근시간이 늦거나 주말근무가 포함되거나 월급이 적었다. 출퇴근에 많은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집 근처로 지역을 제한해서 알아보다 보니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노동의 신성함과 돈을 버는 일을 업신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상하게 돈만 버는 일은 죽어도 하기가 싫다. 돈만 버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워진다. 10년 가까이 해왔던 일은 이제 그만하겠다고 결정했다. 이제는 내가 좋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돈은 조금 적게 벌어도 좋을 것 같다. 절약할 자신이 있다.
고 주장하지만 실상 백수에 불과하다. 자발적으로 경력이 단절되고 있는 상태다. 출산과 육아라도 했다면 좀 더 의미가 있었을 텐데 나는 그저 변명만 늘어놓고 있는 고집쟁이 아줌마일 뿐이다. 예측가능한 미래가 못 견디게 숨막히고 답답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하루하루 예측할 수 없으니 이런 생활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도무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남편과도 이 문제로 몇 번 다투었다. 남편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나는 경제활동 보다 자아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중요했으므로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다. 남편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실질적으로 남편 말이 다 맞았다. 나는 남편이 우리가 나중에 돈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나는 어쩌면 남편의 수입에 기대 응석을 부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에게 일어난 사고 같은 그 사건은 내 인생에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중대한 사건이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당장의 돈 보다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 인생에 찾아온 절체절명의 위기가 가진 특수성을 남편이 이해해줬으면 했다. 결국 이번에도 남편이 나에게 져주었다.
한 번 고꾸라지고 나니 나이 때문인지 회복탄력성이 예전 같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고, 무엇을 더 하고 싶은 지 모르겠으며,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내 안에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 회복탄력성 : 크고 작은 다양한 역경과 시련과 실패에 대한 인식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뛰어 오를 수 있는 마음의 근력 (출처: 위키백과)
그러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문득 깨달았다. 내가 바라는 행복한 지구에 나의 행복이 없었다는 것을! 온 지구가 행복해도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변기 물 내리는 소리에 정신이 맑아졌다.
나는 고민을 시작했다.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그 답을 찾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길게는 20년도 더 지난 기억들 중에서 지금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아마 눈에 띄게 행복했거나 불행했던 기억일 것이다. 사소한 것들은 잊히고, 인상적인 것들만 남았을 것이다. 그 기억들에서 지금의 위기에 대한 힌트를 얻고자 했다. 당시의 나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건져 올릴 작정을 했다. 글을 써내려 갈수록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글을 한 편 쓸 때마다 그 시절로 빠져들었다. 그 때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했던 것, 함께 지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연결된 감정들을 캐내면서 나는 그 시절의 내가 되어볼 수 있었다. 스토리를 이미 다 알고 보는 드라마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감동이 덜하지는 않은 최애 드라마 같았다. (하지만 밝혀 두고 싶은 것은 나는 좋은 부분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기억이라는 것이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재구성되었을 지도 모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내 기억을 믿어 보기로 한다.)
원하는 만큼 다 쓰고 보니 지난 경험들이 참 감사했다. 모르는 것 많고 서툴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 내가 적어도 세월을 허투루 살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그 경험들이 남긴 의미들을 거스르지 않고 잘 따라와서 다행이었다. (어리고 철없던 나를 가르쳐 주었던 많은 분들에게도 다시 감사한 마음이 든다.)
글을 쓰기 전에는 내가 제대로 살아온 게 맞는지, 어딘가 잘못 끼워진 단추구멍 같은 성급한 선택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좀 더 시간을 들여서 진득하게 했다면 뭔가 다른 길이 보이진 않았을 지, 나를 탓하며 의심했다. 실패의 경험을 하고 자신감이 없어져서인지, 혹시라도 그런 지점이 발견된다면 더 이상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될 것 같아 겁도 났다. 하지만 나는 내게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예민함’ 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이 당시에는 스스로를 힘들게 하기도 하고 주변사람들을 실망시키기도 했지만, 결국 오로지 나를 위한 선택을 하는데는 도움이 되었다.
나는 안심했다. (너무 뻔한 결론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믿고 좀 더 나로 살아도 될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다. 나 다운 선택을 하면서 걸어왔음을 확인했으므로, 더 이상 뒤돌아 보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을 긍정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불행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타당한 불행인 동시에 불행이 아니기도 하다.